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한 장면

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한 장면 ⓒ SBS

 
부스스한 머리는 기본이다. 긴 소파에 누워 엉덩이를 긁적이더니, 어느새 일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는 콧노래를 부르고 호들갑을 떤다. SBS 금토드라마 <날아라 개천용> 17회, 배우 정우성이 꾀죄죄한 프리랜서 기자 박삼수로 등장한 첫 장면은 꽤 자연스러웠다.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후배 이유경 기자(김주현)이 던진 첫 대사는 이랬다. 

"선배, 뭔가 달라진 거 같은데. 뭔가 어색해 진 거 같은데."

그러자 정우성이 "나도 내가 어색해, 내가 예전의 내가 아니잖아"라고 맞받는다. 뒤이어 등장한 박태용 변호사(권상우)도 "요즘 일이 술술 풀려서 그런가, 우리 박 기자님 얼굴이 상당히 좋아 보이시네"라고 농을 친다. 정우성의 큰 키를 빗대기라도 하듯, "키높이를 신었나"라고 강조하면서. 

비록 짧은 분량에 대수롭지 않은 대사였지만, 극의 흐름과도 크게 상관없는 묘사가 맞았다. 이게 다 정우성 때문이다. 하차한 배성우 대신 우여곡절 끝에 SBS <날아라 개천용>의 박삼수 역으로 정우성이 17회부터 합류했다.

위의 뜬금없는 대사나 설정은 그렇게 시청자들이 교체된 배우에게 적응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날아라 개천용> 박상규 작가와 곽정환 PD가 마련한 재치어리고 여유로운 첫인사라 할 수 있었다.  

마치 '자, 지금부터 정우성이 등장합니다! 맞아요, 그 지저분하고 더러운 박삼수!'라는 선언과도 같은. 그렇다면 정우성의 등장만으로도 일부 시청자들로부터 "TV가 스크린이 됐다"는 반응을 이끌어냈던 <날아라 개천용>의 배우 교체는 득이었을까, 독이었을까.

처음 만나는 정우성의 잔망
 
갖은 잔망을 다 부린다. 아마 최초일 것이다. 수시로 호들갑을 떨고, 쉴 새 없이 냉탕과 열탕을 오가며, 무엇보다 '귀척'(귀여운 척)에다 '잔망'까지 떠는 정우성은 이제껏 없었다. 정우성의 이전 작품들을 훑어본다면, <똥개>의 '경상도 한량 청년'이 얼추 근사치에 가깝다 랄까.

이전 작품 속 직업을 떠올려 보라. 영화 <강철비2 : 정상회담>에선 무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애쓰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연기했다. 그에 앞서 <증인>은 '민변' 출신 변호사였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선 살짝 나사가 빠져있을지언정 말끔하게 차려입은 세관 공무원이었다.

애초 <날아라 개천용>은 <셜록>의 박상규 기자와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 <지연된 정의>를 모티브로 삼아 화제를 모았다. 또 대본을 직접 쓴 박상규 기자와 박삼수를 연기한 배성우와의 '싱크로율'도 관심을 끌었다. 더욱이, 정우성의 드라마 출연조차 <빠담빠담> 이후 8년 만이었다.
 
 영화 <강철비2 : 정상회담> 스틸 컷

영화 <강철비2 : 정상회담>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핵심은, 정우성이 연기하는 박삼수가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쓴 대사대로 뭔가 달라진 듯, 뭔가 어색해진 듯 느껴질 수 있지만, 소탈하고 인정 많으며 감정표현에 솔직한, 적당히 속물적이면서도 정의로움을 견지하는 박삼수 기자를 연기하는 정우성이 딱히 위화감을 주지 않았다는 얘기다.

도리어 장점도 부각됐다. 이전 배성우가 연기했을 때와 배역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이점 말이다. 이전의 박삼수가 배성우 특유의 색깔로 인해 곰살맞은 익살과 짜증을 머금은 듯한 생활감이 극대화됐다면, 정우성의 박삼수는 그와는 또 다른 묘한 설득력이 부여됐다고 하면 과장일까. 권상우와 정우성의 '미모'를 의식한 듯, "둘이 사귀어요?"와 같은 대사와 함께 일종의 '티키타카'와 장면을 배치한 것 역시도.

각설하고, 17화의 후반부가 딱 그랬다. 서울시장 강철우(김응수) 일가가 '지배'하는 '공고'(공업고등학교)를 방문한 박삼수가 손가락이 잘린 여학생의 울분을 마주했을 때 말이다. 점차 그 학생의 절절한 사연에 공감하면서도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감정 연기는 친숙하기에 더 큰 표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우성의 '얼굴 연기'만으로도 묘한 공감과 진심어린 설득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18부의 마지막, 장윤석 검사(정웅인)을 향해 "난 잃을 게 없어서 무서울 것도 없다"며 분개하던 장면도 마찬가지였고. 그건 그저 배우들의 연기력 차이나 그 배우에 대한 호불호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개별 배우가 품은 연기색의 '다름'이자 각기 다른 매력의 배우가 발산하는 해석의 차이다. 더군다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개천용>은 이미 초반부에 박삼수의 아픈 성장사나 개인사를 주입, 또 주입시켜왔다.

시청자들이 달라진 배우에게 몰입할 여지를 충분히 줘왔다고 할 수 있다. 잔망을 떨고, 호들갑을 떠는 정우성의 발성이 살짝 과한 면이 없진 않지만, 그런 차이조차 박삼수 캐릭터를 연기한 배성우가 그간 얼마나 안정적인 연기를 펼쳤었나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비교 지점으로 작용했다.

그런 가운데, 박삼수와 같은 기자 캐릭터, 즉 현실에서도 유일무이한 기자를 연기하는 일이나 앞선 배우의 하차로 인한 중간 투입은 부담스러울지언정 정우성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게다. 흔치 않은 기자 역할을 연기하는 일도, '똥개' 이후 '잘생김'을 내려놓은 배역을 연기한 일 모두.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청년 세대가 전하는 통쾌한 작별 선고
 
 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한 장면

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한 장면 ⓒ SBS

 
"이제 다 끝났어요, 할아버지. 세상은 이제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18회의 마지막, 청년 세대이자 언론인인 이유경이 '대한민국 법조 설계자' 김형춘(김갑수)에게 한방을 날리는 통쾌한 장면이 연출됐다. 그간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절대 나서지 않는' 법원과 검경 수사기관, 그리고 언론이라는 한국 사회의 공고한 기득권을 질타해온 <날아라 개천용>이 궁극적인 최종 '빌런'에게 한 방을 날리는 결정적 장면이었다.

극 중 김형춘이 누구인가. 전 검찰총장이자 전 법무부장관으로 현직 대법관을 만들고, 유력 대권후보를 굽신거리게 만드는, 집권 세력을 수차례 창출해온 이른바 '그림자 정부'의 실력자가 아니겠는가. 박삼수와 박태용, 이유경이 합작, 겨우 몰락시킨 조기수 대법관(조성하)의 배후 거물임을 밝혀 낸.

일본 간첩단 사건 조작의 달인이었고, 군사 정부 시절 공안 검사로 승승장구했으며, 노태우 정부 시절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지냈던, 이전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고 지금은 투옥 이후 풀려나 재판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 분명한 김형춘.

여전히 잔존하는 한국사회의 보수 기득권은 물론 이른바 '박정희 시대'를 상징하는 김형춘이란 인물에게 이유경은 "이 나라가 할아버지 꺼에요? 이젠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물러나는 놓치는 것도 되게 추해요"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가 과거 군사독재 정권에게 영혼을 팔 때 쓴 반성문을 되돌려주며.

<날아라 개천용>은 이렇게 결말을 앞두고 거대한 법조 권력 구조의 정점에 선 인물을 몰락시키는 것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극적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중이다. 변호사와 기자, 두 주인공과 함께 청년 세대 언론인인 이유경에게 막중한 역할을 함께 짊어지운 채. 잔존하는 한국사회의 보수 기득권은 물론 상징적인 '박정희 시대'와의 결별을 선언하며.

'윈윈'으로 남을 정우성의 긴급 투입 
 
 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한 장면

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한 장면 ⓒ SBS

 
현직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전직 검찰총장의 사법농단에 이어, 이제 남은 권력은 서울시장 출신 대권 지지율 1위 강철우일 터. 누가 봐도 최근 감옥에 재수감되면서 전직 대통령의 지위를 박탈당한 그 분의 여러 특성을 연상시키는 캐릭터의 몰락이 남았고, 19회는 그 전초전이었다.

여기서 <날아라 개천용>은 역시나 범상치 않은 길을 간다. 이미 정우성의 첫 등장 예고편으로 활용된 승운 공고 비리 역시 실제 박상규 작가가 취재‧폭로했던, 어느 지역 공고 이사장의 '조폭' 버금가는 폭력과 사학 내 비리에서 모티브를 가져왔기 때문.

<날아라 개천용>은 일찍이 승운 공고를 강철우가 비자금을 감춰 둔 사학으로 설정하면서 아이들의 미래를 볼모로 잡고서 그 아이들의 고혈을 빠는 정치권력과 사학 비리에 대한 응징이 펼쳐질 것을 예고해왔다. 19회는 이에 대한 박삼수와 박태용, 이유경의 취재와 증거 수집이 전개됐다.

학교가 취업률을 위해 회사로 내몰았던 학생은 새벽 퇴근 길에 버스정류장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학교는 이를 은폐하고 보상금까지 편취했다. 학생의 유일한 혈육이던 할머니는 경찰서를, 언론사를,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봤지만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외면 받았다. 

돈 없고 빽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는 법조계와 검경 수사기관, 그리고 언론이란 한국사회 주류를 질타해온 <날아라 개천용>은 마지막까지 이렇게 실제 '재심' 사건과 사학 비리를 모티브로 가져와 한국사회의 반영으로서 실제 사건과 극적 재미와 의미를 연결짓고자 노력 중이다. 현실에서 보기 힘든 '유쾌 활극'이란 장르적 요소를 잃지 않으면서. 

그렇게 '재심' 사건으로 출발해 예상보다 더 거시적이고 상징적인 거악과의 대결로 치 치닫고 있는 <날아라 개천용>. 이쯤 되면, 정우성의 긴급 투입이야말로 시청률과 상관없이 본인에게나 제작진, 그리고 시청자 모두에게 드라마틱한 '윈윈'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어제는 영화기자, 오늘은 시나리오 작가, 프리랜서 기자. https://brunch.co.kr/@hasungtae 기고 청탁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