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MBC <무한도전>은 못생긴 동료 연예인을 소개하는 '못친소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외모를 개그소재로 삼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무한도전>은 2011년에도 '미남이시네요' 특집을 마련하는 등 외모를 웃음포인트로 삼는 데 이미 익숙한 프로그램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방송가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지금보다 좀 더 만연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의외의 웃음을 준 인물들은 뮤지션들이었다. 훌륭한 보컬리스트들을 묶어서 부르는 '김나박이'의 멤버로 손꼽히는 김범수는 무대에선 언제나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는 가수다. 그러나 <무한도전> '못친소' 편에선 순식간에 무장공비 취급을 받으며 첫인상 투표에서 당당히 7표를 획득해 1위를 차지했다. 록밴드 뜨거운 감자의 리더 김C 역시 '못친소 페스티벌'에서 신치림의 조정치와 콤비를 결성해 '김치 듀오'로 큰 웃음을 안겼다.

그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음악성, 뛰어난 브레인까지 겸비한 가수 이적은 '못친소 페스티벌'을 통해 순식간에 '맹꽁이' 캐릭터를 얻었다. 이후에도 이적은 <무한도전>이나 <놀면 뭐하니?> 등에 출연하면 어김없이 유재석으로부터 '맹꽁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이적이 김진표와 함께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독설을 내뿜던 패닉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예상치 못했던 <달팽이>와 <왼손잡이>로 대박행진
 
 묻히는 듯 했던 패닉1집은 <달팽이>의 성공과 함께 대반전을 맞았다.

묻히는 듯 했던 패닉1집은 <달팽이>의 성공과 함께 대반전을 맞았다. ⓒ 케이앤씨뮤직

 
사실 패닉 1집에는 김진표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이는 애초에 패닉 1집이 이적의 솔로앨범으로 준비하던 앨범이기 때문이다. 사실 앨범 발표 당시만 해도 패닉 1집에 대한 반응은 미지근했다. 패닉은 봄여름가을겨울처럼 2인 밴드도 아니었고, 듀스나 터보처럼 댄스듀오도 아니었고 녹색지대처럼 화음을 넣는 듀엣도 아니었다. 보컬과 래퍼로 구성된 패닉의 특이한 멤버 조합은 당시로선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내 머리를 잠궈줘, 이제 나는 멈출 수가 없어"로 시작되는 패닉의 독특한 데뷔곡 <아무도> 역시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노래였다. 패닉 역시 이를 의식한 듯 <아무도>에 상당히 격렬한 안무를 포함시켰는데 지금도 유튜브에서 '아무도'를 검색하면 열심히 춤을 추는 이적과 김진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패닉은 그 시절 가요계에 등장한 특이한 아이들로 남았다.

그렇게 패닉의 첫 번째 앨범이 대중들로부터 잊힐 때 즈음 패닉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빛을 만났다. 바로 4번 트랙에 조용히 숨어 있던 이적의 솔로곡 <달팽이>가 PC통신과 라디오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목표를 향해 꾸준히 걸어 가겠다는 <달팽이>의 주제가 그 시절을 살아가던 청춘들에게 제대로 먹힌 것이다.

패닉은 반강제로 활동곡을 <달팽이>로 바꿨고 이적은 당시 '달팽이 머리'라고 불리던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큰 화제를 모았다. <달팽이>에서 노래나 랩 분량이 전혀 없는 김진표는 원곡에 없던 색소폰 간주로 한 몫을 담당했다. <달팽이>는 KBS <가요톱텐>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패닉이라는 팀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패닉은 3번째 노래 <왼손잡이>까지 크게 히트시키며 인기가수로 거듭났다. 하지만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던 패닉의 리더 이적은 TV 스타가 된 현실에 대해 회의를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패닉은 1996년 9월, '밑'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1집보다 훨씬 특이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2집에도 <달팽이>나 <왼손잡이>처럼 듣기 좋은 노래들이 수록됐을 거라던 팬들의 기대를 시원하게 배반한 대반전이었다. 

대중들의 기대 철저히 배신한 패닉의 실험정신
 
 패닉은 파격과 실험정신으로 뭉친 2집 앨범을 통해 대중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패닉은 파격과 실험정신으로 뭉친 2집 앨범을 통해 대중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 케이앤씨뮤직

 
두 멤버의 사진 대신 만화가 이우일이 그린 기괴한 일러스트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패닉 2집은 재킷부터 파격과 난해함의 연속이었다. 패닉 2집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음반 사전검열제도가 없어진 혜택을 정면으로 누린 앨범이었다. 사실상 이적의 솔로 앨범에 김진표가 숟가락을 얹었던 1집과 달리 2집에서는 김진표가 메인 래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솔로곡이나 다름 없는 노래도 두 곡이나 들어있다.

패닉 2집의 타이틀곡은 < UFO >. 아마도 이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지상파 방송국 심의통과가 상대적으로 용의한 곡이기 때문에 타이틀곡으로 정해진 듯하다(물론 '살찐 돼지들의 거짓놀음'같은 기괴한 가사가 등장하는 노래가 대중적이라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 UFO >는 후렴구로 넘어가기 전 이적의 스캣(가사 없이 흥얼거리는 창법)과 김진표의 랩이 맞물리면서 분위기가 고조되는 부분이 압권이다.

< UFO >는 1집의 대히트 덕분에 발매 당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기대만큼 큰 인기를 끌진 못했다. 3번 트랙 <혀>는 선정적인 언론을 '비린내 나는 상한 혀'로 빗댄 곡이다. 언론을 대놓고 저격했으니 언론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리 없었다.

경쾌한 현악 4중주로 시작되는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는 마을 사람들에게 억울하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광대의 세 아들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복수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치 한 편의 호러영화 시놉시스를 보는 듯한 섬뜩한 가사와 음침한 분위기, 그리고 이적의 창법이 매우 인상적인 곡이다. 

김진표가 만들고 이적이 편곡한 <벌레>는 폭력 교사에 대한 증오심을 담았고 <마마>는 부모님의 그릇된 자식교육에 대한 반발을 담은 곡이다. 가사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직설적이지만 패닉은 김진표의 가사를 앨범에 그대로 수록했다. 특히 <벌레>는 당시 폭력적인 노래 가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에 단골로 등장했지만 당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반항적인 남학생들은 <벌레>를 꽤 좋아했다.

삐삐밴드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화제가 된 <불면증>은 11분 58초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곡이다. 스튜디오 라이브 버전으로 녹음한 <불면증>은 패닉과 삐삐밴드의 보컬 이적과 이윤정이 서로 자기가 더 졸리다는 식으로 '배틀'을 벌이다가 5분 만에 노래가 끝난다. 그리고 나머지 6분58초 동안은 아무 의미 없는 소리들로 채워진다. <불면증>은 패닉 2집에서도 가장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노래로 패닉의 독특한 실험정신을 함축해 놓은 곡이다. 

패닉 2집은 지난 2007년 음악전문웹진 가슴네트워크가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순위에서 89위를 차지했다. 패닉 2집은 2018년에 발표한 100대 명반 3차발표에서도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독창적인 사운드로 청각화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61위에 이름을 올렸다. 대중들의 기호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지만 평단에서는 패닉의 실험정신에 상당히 높은 점수를 줬다.

아이돌의 시대, 더욱 그리운 패닉의 음악
 
 이적과 김진표는 이적 정규 6집 타이틀곡 <돌팔매>를 통해 15년 만에 협업을 했다.

이적과 김진표는 이적 정규 6집 타이틀곡 <돌팔매>를 통해 15년 만에 협업을 했다. ⓒ KBS 화면 캡처

 
하지만 패닉은 2집 앨범을 끝으로 더 이상 파격적인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1998년에 발표한 3집의 히트곡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와 <숨은 그림 찾기>는 2집 수록곡들에 비하면 '건전가요'에 가깝다. 이적은 카니발과 긱스, 그리고 솔로 가수로 입지를 구축했고 김진표 역시 솔로 활동과 노바소닉 활동을 거쳐 카레이서와 차량 관련 프로그램 MC, 그리고 성우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현재는 레이싱팀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패닉은 지난 2005년 <로시난테>와 <정류장>이 들어 있는 4집 앨범을 마지막으로 함께 음악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패닉의 데뷔 20주년이 된 2015년 팬들 사이에서 패닉 재결성에 대한 루머가 있었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이적과 김진표는 작년에 발표된 이적의 6집 타이틀곡 <돌팔매>에서 김진표가 랩피처링을 하면서 패닉 결성 25주년을 기념했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통해 패닉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불렀다. K팝 아이돌 육성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현재 가요계는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천편일률적인 아이돌이 판을 치는 시대가 됐다. 실험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던 패닉의 독특한 음악들이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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