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토일드라마 <철인왕후>에 등장하는 철종의 증조부는 1762년에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만 27세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이 사건은 그 뒤 조선 정치의 핵심 쟁점이 됐고, 먼 훗날 증손자가 왕이 된 뒤에도 이슈가 될 정도로 생명력이 강인했다.
 
음력으로 임오년에 발생했다 해서 임오화변으로 불리는 그 사건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철종의 큰할아버지인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적 노력을 경주하는 원동력이 됐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정조는 죽기 얼마 전에 "4년 뒤 갑자년(1804)이면 원자(아들 순조)가 열다섯이 되니 왕위를 물려주기에 충분할 겁니다"라며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마마(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경모궁(사도세자)께 자식으로 행하지 못했던 평생의 큰 한을 이룰 겁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아닌 사람을 아버지로 둔 왕들의 공통된 꿈은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왕인 사람한테서 왕위를 물려받아야 정통성 있는 군주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1804년에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뒤, 상왕의 도읍을 수원 화성으로 옮긴 다음에 그 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이루지 못한 꿈

하지만 정조는 1800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꿈이 이뤄진 것은 1899년 고종황제 때였다. 이때 사도세자는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위상을 갖게 됐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됐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사후에나마 황제로 격상된 것이다.
 
결국에는 사도세자의 법적 4대손인 고종이 "자식으로 행하지 못했던 평생의 큰 한"을 대신 성취시켜 줬지만, 이 한을 풀기 위한 노력은 정조시대에 가장 치열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핵심적인 정치 쟁점으로 부각됐다. 기득권층의 압력을 받아 사도세자를 죽인 아버지 영조의 처분이 그른가 옳은가가 정치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쪽은 시파(時派), 반대편은 벽파(僻派)로 불렸다. 시파는 '시류에 편승하다' 할 때의 시(時)에서 느껴지듯이, 정조 편에 서서 사도세자에 대한 동정론을 펴는 세력을 얕잡아 부르는 표현이었다. 시파는 시배(時輩) 또는 시의(時議)로도 불렸다. 벽파는 한자 벽(僻)에 들어 있는 '후미지다, 궁벽하다, 치우치다' 같은 의미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영조의 처분을 옳다 여기며 정조의 정책과 스스로 거리를 두는 세력을 지칭했다.
 
양대 파벌의 다수는 기득권층인 노론당에서 생겨났다. 이들의 등장 시점에 관해 박광용 가톨릭대 교수의 <영조와 정조의 나라>는 "시파와 벽파로 분열된 출발점은 정조 8년 이후였음이 분명하다"고 한 뒤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지각을 뚫고 정치 표면으로 터져 나온 시기는 정조 12년 이후부터"라고 말한다. 정조 즉위 12주년인 1788년부터 시·벽의 대립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사람들 같으면 정조 편에 선 세력을 시파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폄하의 뉘앙스가 담긴 이 표현은 사도세자 및 정조의 적대진영에 선 사람들의 시각을 반영했다. 하지만 시파로 지목된 사람들 자신도 사용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이 표현은 비교적 광범위하게 활용됐다.
 
작년 9월 발행된 최성환 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의 저서 <영·정조대 탕평정치와 군신의리>는 "통상 '시배', '시의' 표현은 노론 벽파가 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조 8년 이후에는 채제공 등 남인뿐 아니라 시파로 지목된 정민시·심낙수 등도 사용할 정도로 이 시기의 정치세력 구도를 이해할 때 중요한 준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시파·벽파의 분열까지 낳을 정도로 사도세자 문제가 커다란 쟁점이 됐지만, 정조시대에는 고종 때만큼의 성과가 달성되지 못했다. 사도세자의 무덤이 왕자급인 묘(墓)에서 세자급인 원(園)으로 격상되고, 그를 죽이는 데 적극 가담한 홍인한이 사약을 마시게 되고, 홍인한의 본가이자 정조의 외가인 홍씨 가문이 멸문에 가까운 화를 입는 일이 일어났으나, 정조가 원했던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사도세자의 무덤. 1899년에 현륭원에서 융릉으로 격상됐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사도세자의 무덤. 1899년에 현륭원에서 융릉으로 격상됐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 김종성

 
정국을 뒤엎은 벽파와 정순왕후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이 어느 정도 달성되느냐는 그를 죽인 기득권 세력을 얼마나 약화시키느냐에 달려 있었다. 정조의 권력으로는 완벽한 명예회복이 힘들었다. 그 상태에서 그가 만 10세 된 아들 순조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자, 벽파가 정조의 새할머니인 정순왕후와 손잡고 정국을 뒤엎는 일이 발생하게 됐다.
 
벽파는 다산 정약용 같은 정조 측근들을 숙청하고 정조가 24년간 이룩한 개혁을 원위치시키는 일종의 분탕질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의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득권과 맞서 싸운 사도세자의 도전은 정치적 진보와 관련된 의제를 낳았고 이 의제는 정조시대에 조선 사회를 상당 정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런 과정에서 사도세자를 죽인 기득권세력이 약해진 데다가, 정조의 아들에게 왕권이 가 있었기 때문에 벽파의 분풀이가 오래 이어지기는 힘들었다. 순조를 대신해 1803년까지 수렴청정(대리통치)을 했던 정순왕후가 1806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벽파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위의 박광용 책은 "정순왕후 김씨가 사망하자, 당시 순조의 권유를 받은 김이영이 영조 연간 '큰 의리를 위해서는 전주 이씨라면 누구라도 군주로 추대할 수 있다'고 한 정순왕후의 숙부 김한록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폭로하면서 벽파가 완전히 몰락"했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김한록의 이 말은 사도세자와 그 후손은 모두 죄인이므로, 정순왕후의 양자를 두어서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곧 이후, 벽파는 군주를 바꾸려고 기도한 역적으로 규정되어 더 이상 정파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
 
벽파는 사도세자와 그 후손들을 없이 여기고 개혁적 열정을 폄하했다. 이들은 순조시대에 탄핵을 받고 정계를 떠났다. 홍인한 같은 인물이 더 이상 동정을 받기 힘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먼 훗날, 정조의 적들 중에서도 적인 홍인한을 사면하자고 주장한 인물이 있었다. 집권 6주년이 된 1855년 당시의 철종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홍인한을 복권시키고자 한 철종
 
 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 tvN


음력으로 철종 6년 4월 18일자(양력 1855년 6월 2일자) <철종실록>에 따르면, 철종은 "내가 이 사람의 일에 관해 말하고 싶은 지가 오래됐다"면서 홍인한을 복권시키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홍인한이 오해를 샀으며, "정조께서도 그 원통한 실상을 일찍이 훤히 알고 계셨"다며 홍인한의 관직과 작위를 회복시키라는 왕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 왕명은 반발에 부딪혔다. <철종실록>은 엘리트들이 주로 진출하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 나서서 왕명을 거둘 것을 촉구했다고 알려준다.
 
이로 인해 철종은 물러섰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음력으로 그해 12월 15일자(양력 1866년 1월 22일자) <철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동일한 왕명을 다시 꺼내들어 반발을 자초했다.
 
철종은 매우 집요했다. 철종 9년 10월 25일자(1858년 11월 30일자) <철종실록>에도 그의 동일한 왕명이 등장한다. 홍인한을 사면해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이때도 사면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신하들의 반발이 이 시기의 실록에는 기록돼 있지 않다. 3년 만에 사면론이 관철된 것이다.
 
철종은 홍인한을 사면해주는 것이 같은 집안인 혜경궁 홍씨와 그 아들인 정조의 명예를 살려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조가 홍인한을 적대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으므로 철종의 논리는 힘을 갖기 힘들었다.
 
철종의 사면론은 정치적 실리도 명확히 담보되지 않는 것이었다. 시파의 세상이 된 뒤였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몰락한 벽파가 되살아나서 후원 세력이 되어주지 않는 한 그랬다.
 
시파인 안동 김씨의 후원으로 임금이 된 그가 그런 고집을 부린 이유에 관해 2012년에 <한국사 학보> 제49호에 실린 역사학자 임혜련의 논문 '철종대 정국과 권력집중 양상'은 "철종은 선대왕을 존숭하고 효를 다하면서 그 과정에서 정통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치력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면서 이 사건을 '철종의 셀프 정치력 시험'으로 해석한다.
 
"선대왕들에 대한 존숭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고 판단하여, 정조의 의리를 따르던 시파였던 안동 김문에 대한 정치적 시험으로 볼 수 있다"고 논문은 말한다. 안동 김씨와 협력하면서도 독자 영역을 넓혀볼 목적으로 그런 논의를 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인한 사면은 철종의 입지를 확대하는 방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 같은 정치적 목표는 달성되지 않았다. 후대 사람들은 좀 과장되기는 하지만 철종을 안동 김씨의 허수아비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철종의 사면론이 그의 정치적 목표를 성취시켜주지 못한 것은 그것이 안동 김씨의 의지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대의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사도세자의 개혁 의지를 꺾고자 했으며 개혁군주 정조에 의해 비토를 받은 홍인한을 사면해주자는 그의 주장은 시대 흐름에 명백히 뒤처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철종 자신에게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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