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가족

완벽한 가족 ⓒ 조이 앤 시네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기본 단위는 아직까지는 '가족'이다. 나날이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는 건 현실이다. 하지만 혼자 사는 가구조차도 '원가족'이라는 '가족'의 테두리에서 자유롭지만은 않다. 그래서 '가족'은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된다. '가족'이기에, '가족'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고 눈물흘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로저 미첼 감독의 영화 <완벽한 가족>은 영화를 보기도 전에 그 제목에서 질문을 안긴다. 과연 어떤 가족이 완벽한 가족일까? 아마도 그 질문은 우리가 지향하지만 도달하기 힘든 이상향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알게 된다. 원제 'blackbird'를 '완벽한 가족'이라고 해석한 이 한글 제목이 매우 역설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가족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고 있음을.  

안락사를 선택한 엄마

영화는 바닷가를 마주하고 있는 아름다운 저택으로부터 시작된다. 너른 갯벌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가장인 폴(샘 닐 분)은 앞 뜰의 정원에 물을 주고 거기에서 딴 과실들로 아침 식사를 마련한다. 여기까지는 풍족한 전원 주택의 삶이다. 그런데 이어진 침실 장면부터 분위기가 전환된다.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진 발에 어렵게 한 쪽씩 신발이 신겨진다. 폴의 아내이자, 이 집안의 엄마 릴리(수잔 서랜든 분)다. 폴은 코에 호흡기까지 낀 그녀를 걱정스럽게 지켜보지만 릴리는 남편의 도움을 거절한 채 모든 걸 홀로 해내려고 한다. 

이 도입부의 한 장면으로 엄마인 릴리가 어떤 사람인지 각인된다. 영화 중반부쯤 폴은 말한다. 스스로 삶을 마감할 것을 결심한 사람들은 의지가 박약해서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자기 삶에 대해 의지적이며 자신에게 벌어진 사태에 대해 냉철하게 조율하고자 하는 이성적인 면이 강한 사람이라고. 영화 속 릴리는 바로 그런 폴의 설명에 딱 어울리게 행동하고 결정한다. 

그녀의 육체는 잠깐의 산책도 버텨내기 어렵다. 영화에 병명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남편 폴의 말대로 릴리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주관할 수 있는 시간이 몇 주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릴리는 스스로 육체와 의지를 통제할 수 있는 이 마지노선과 같은 상황에서 '안락사'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결정을 실행하기에 앞서 가족과 마지막 주말을 보내고자 한다. 

엄마의 죽음 앞에 선 가족들 
 
 완벽한 가족

완벽한 가족 ⓒ 조이 앤 시네마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마감하겠다는 엄마의 결정에 가족들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남편은 홀로 정원에 숨어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누구보다 차분하게 아내의 결정에 따른다. 그래서 아내의 결정을 도울 약도 준비해주고, 아직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 따른 뒷마무리까지 마련해 두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두 딸과 이 부부의 오랜 지인 리즈가 찾아온다. 첫째 딸 제니퍼(케이트 윈슬렛 분)는 이른바 전형적인 '맏딸'이다. 재미는 없지만 의사인 남편과 모범생이라는 아들로 이루어진 가정의 통제권을 쥔 듯한 그녀는 엄마의 결정 앞에 맏딸답게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려 애쓴다. 삶이 얼마남지 않은 엄마의 이 주말이 어떻게든 '평온'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반면 그동안 연락을 끊다시피 했던 둘째 딸 안나(미아 와시코우스카 분)는 어쩐지 불만이 가득하다. 당연히 그런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는 어떻게든 평화로운 주말을 보내고자 하는 언니의 의도와 부딪치고 해묵은 자매의 갈등이 재연된다.

이 주말이 지나면 엄마는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주말을 평화롭게 보내는 게 생각만큼 여의치 않다. 모두들 죽어가는 릴리를 위해 애써보려 하지만, 가족들은 아직 엄마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한 가족을 이끌어 왔던 '안주인'을 보내기 위해선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영화는 '안락사'라는 '특별한 상황'을 맞이한 가족을 통해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묻는다. 

그 질문은 둘째 딸로부터 시작된다. 약물에 자살시도까지 했던 둘째는 아직 스스로 홀로 설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동안 부모의 지원으로 이것저것 해보았지만 그 어느 것도 꾸준히 해낼 수도 없었고 지금도 막막하다. 그런 그녀이기에 엄마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더구나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려 했다는 엄마의 말이 위선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자신은 강하기는커녕 혼자 남을 자신이 없는데. 

그런 둘째의 반발에 언니는 어떻게든 동생을 설득하여 엄마의 결정을 존중해주려 애를 쓴다. 하지만 겨우 동생을 설득했는가 싶었는데, 뜻밖의 사실이 큰 언니 제니퍼의 마음을 흔든다. 그는 자신이 큰 딸로써, 그리고 안락한 가정의 책임감 있는 안주인으로 살아왔다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마주한 불합리한 가족의 이면에 혼란스럽다. 그리고 그 혼란은 엄마의 결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안락사라는 인위적인 결정 앞에 선 가족들은 결국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저마다 가지고 있었던 고민과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저 이 며칠 동안 행복한 척 지내고 엄마를 보내드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 기간 동안 가족의 진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맏딸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그 어떤 문제도 덮고 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가려 했던 큰 딸, 그리고 아직 스스로의 정체성조차 혼란스러운 둘째 딸, 거기에 뜻밖의 '내연 관계'까지. 가족은 엄마의 죽음 앞에서 '콩가루 집안'이라는 현실을 마주한다. 

그렇다면 '완벽한 가족'이라는 건 애초에 위선적이었던 것일까? 여기서 영화의 원제를 짚어보게 된다. 원제 'blackbird(블랙버드)'는 우리 말로 찌르레기다. 찌르레기라는 새는 독특한 습성을 갖고 있다. 알을 낳은 뒤 수컷과 암컷이 함께 알을 품어 알에서 나온 새들에게 먹이를 연신 날라주지만, 어린 새들이 이제 좀 자라서 '이소'할 시기가 다가오면 더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다 큰 자식에게 더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찌르레기처럼, 영화 속 엄마 릴리는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자식들을 '이소'하고자 한다. 심지어 홀로 남겨질 남편의 애정 문제까지 해결해주고자 한다. 엄마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할 딸들의 '이소'는 문제가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삶을 직시하고 거기에 마주할 용기를 내도록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관장'할 수 있을 때 삶을 마감하려 하듯, 엄마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자식들과의 '이별'을 선택한 것이다. 

엄마의 죽음은, 엄마라는 생물학적 육체의 종결이지만, 동시에 한 가족을 아울러왔던 존재로서 엄마라는 자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적 존재에 대한 '마감' 결정을 내린 엄마는 동시에, 스스로 독립할 어린 새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찌르레기처럼 이제 엄마로서 가족들을 떠나보내고자 한다.
 
 완벽한 가족

완벽한 가족 ⓒ 조이 앤 시네마

 
사람이 나이들면 어린애가 된다는 속설처럼, 대부분 우리 부모님 세대는 늙고 병들어가며 자신들이 부모로서 갖고 있던 권위마저 상실한 뒤 우리 곁을 떠나곤 한다. 어쩌면 자식들이 더 가슴 아파할 순간은 큰 바위같던 부모님이 나이 들고 병드는 과정보다 내가 의지했던 부모라는 존재의 상실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나이 들면서 치매 등을 두려워하는 건, 더는 자식들 앞에서 온전한 '어른'으로 자신의 존재를 기억되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이다. 릴리는 자신이 그렇게 되기 전에 '의연한 엄마'의 모습 그대로 아이들의 곁을 떠나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의지적인 결정을 내린 엄마 릴리의 모습은 '안락사'라는 '웰다잉' 방식의 또 다른 지점을 생각하게 한다. 

갈등하고, 반항하고, 그리고 엄마의 결정을 불신했던 딸들. 하지만 '강인하게 키웠다'란 엄마의 말처럼 딸들은 결국 저마다 한 고비를 넘기고 엄마의 죽음 앞에 선다. '완벽하다'는 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맞닥뜨리더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해 나갈 힘을 서로 도모해 가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문제에 천착하고 골몰해가는 우리에게 영화는 삶의, 가족의 해법을 전해준다. <완벽한 가족> 속 엄마 릴리는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가족의 중심에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완수한다. 아마도 그런 마지막 엄마 노릇으로 인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서 제니퍼와 안나는 지금까지와은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의식이 다하는 그 날까지 '엄마'였던 릴리.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며 릴리만큼만 엄마 노릇을 하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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