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의 작년 마지막 방영분과 올해 첫 방영분은 통쾌한 장면들을 연이어 보여줬다. 지방 사또의 비위 사건을 놓고 두 차례의 어사출도(出道)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각 다른 방법으로 출도를 단행됐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보기 힘든 '더블 출도'였다.
 
지난 12월 29일 제4회 방송 끝부분에서는 암행어사 성이겸(김명수 분)이 금광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어사출도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노동자들은 중앙 유력자와 현지 사또가 불법으로 운영하는 비밀 금광에서 노예노동을 강요받는 이들이었다.
 
이곳에 잠입한 어사 성이겸이 위급에 처하자, 노동자들은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며 집단행동을 벌여 어사를 구하고 스스로를 구했다. 어사출도 때 동원되는 역졸(역 직원)의 역할을 그들이 대신했던 것이다.
 
1월 4일 제5회 방송 초반부에는 성이겸이 그 여세를 몰아 읍내 관청 앞으로 가서 어사출도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의 두 번째 어사출도는 역졸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역졸들이 관아로 진입해 아전들을 때려잡고, 탐관오리 강인충(최종원 분)이 어사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이 연이어 펼쳐졌다.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한 장면.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한 장면. ⓒ KBS2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한 장면.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한 장면. ⓒ KBS2

 
지루하고 지난한 어사출도

이렇듯 드라마 속의 어사출도는 항상 통쾌하고 후련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실제의 어사출도는 지루하고 지난한 다음 단계를 동반했다. 다음 단계는 진득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면 쉽게 감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열공' 모드였다. 일반적인 경우에 서류나 마패를 보여주며 신분을 공개(어사출도)한 암행어사가 그 직후에 하는 일은 사또를 무릎 꿇리고 호통 치는 일이 아니었다. 어사출도 뒤의 흔한 장면은 창고를 살펴보거나 서류더미를 진득하게 검토하는 모습이었다.
 
지방행정에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어사가 출도 직후에 밟는 다음 절차는 봉고파직(封庫罷職)이었다. 관아의 창고를 봉쇄하고 수령 파면 절차를 밟는 일이었다. 봉고 처분의 경우에는, 관아에 보관 중인 물품이나 서류에 대한 수령의 접근이 차단되고 암행어사의 조사 작업이 개시됐다.
 
이 같은 봉고파직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아서 문책을 받은 암행어사가 있었다. 정조 임금 때의 이희갑이 그 주인공이다.
 
이희갑은 영조 때인 1764년에 태어나 평균보다 10여 년 빠른 26세 때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했다. 이 해는 정조가 즉위한 지 14년이 흐른 1790년이다. 이로부터 5년 뒤인 1795년, 그는 호남 암행어사로 파견됐다. 비교적 젊은 편인 31세에 어사가 됐던 것이다.
 
어사 이희갑은 전라도 나주에서 부조리한 상황을 접했다. 기근 때문에 백성들이 굶는데도 나주목사 조시순이 구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긴급재난지원'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 백성들이 굶어죽고 시신이 논두렁 같은 데에 버려져 방치되고 있었다. 음력으로 정조 19년 4월 28일(양력 1795년 6월 14일), 그는 한양에서 이 상황을 임금에게 보고했다.
 
43세 된 정조는 띠동갑인 이희갑의 보고를 받고 딱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중대한 상황을 확인하고도 현지에서 어사출도 및 봉고파직을 하지 않은 채 그냥 귀환했기 때문이다.
 
재조사 착수 지시한 정조

위 날짜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즉시 출도해서 사실을 조사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며 전라도로 당장 가서 재조사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비위 사실을 확인했으면 즉시 어사출도해서 진상을 파악해야지 이렇게 그냥 돌아오면 어쩌자는 것이냐고 말한 것이다. 정조는 "오늘 안으로 다시 내려가라"고 엄명을 내렸다. 사정이 긴박했기 때문에 징계를 보류한 채 그냥 되돌려 보낸 것이다.
 
3주 뒤, 이희갑이 정조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나주 주민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직접 감독하고 나주목사 조시순을 상대로 어사출도 및 봉고파직을 한 뒤 돌아왔다. 그러나 정조는 3주 전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딱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조 19년 5월 22일자(1795년 7월 5일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어사의 별칭인 수의(繡衣, 수놓은 옷)라는 표현을 거론하며 이희갑을 나무랐다. "수의가 출도도 하지 않고 몰래 갔다가 몰래 오는 일은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재위 19주년인 이때까지 이희갑 같은 암행어사는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몰래 갔다가 몰래 돌아올 바에는 처음부터 뭐 하러 간 것이냐고 질책한 정조는 징계 처분에 착수했다. 정조가 내린 징계는 파면이었다. 어사출도 및 봉고파직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은 이희갑은 이처럼 중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이희갑의 관료 인생에 마침표가 되지는 않았다. 얼마 뒤 복귀해 엘리트 코스인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관찰사와 판사 등을 지내고 사신으로 청나라에 파견되기도 했다.
 
사실, 봉고파직은 정조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대부분의 어사들은 소수 인원을 데리고 평화적 방식으로 어사출도를 했기 때문에, 현지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지방 수령을 상대로 창고를 봉쇄하고 파면 절차에 착수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봉고파직의 '파직'도 부담스럽지만 '봉고'도 어느 정도는 부담스러웠다. 압수·수색영장 집행 뒤에 압수물 검토 작업이 수반되는 것처럼, 봉고 뒤에도 그런 절차가 뒤따랐다. 어사출도 뒤 봉고를 단행한 암행어사는 과거시험 수험생처럼 서류에 파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희갑이 최초로 파견됐을 때 봉고 권한을 행사했다면, 그는 긴급재난지원에 관한 서류를 조사하느라 5년 전의 고시생 모드로 돌아가야 했을 수도 있다.
 
어사들이 출도 직후에 얼마나 많은 서류를 검토했는지는, 고종시대 영남암행어사 이헌영(1837~1907)의 활동 기록인 <교수집략>을 분석한 김현영 국사편찬위원회 교육연구관의 논문에 나타난다. 2009년에 <영남학> 제16호에 '이헌영의 교수집략을 통해 본 암행어사의 실상과 경상도 지방관'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이 논문은 어사가 출도 뒤에 감당해야 할 엄청난 독서량을 이렇게 예시한다.
 
"암행어사가 출도를 하면, 대개 그 지역의 각종 문부(文簿)와 수도책(囚徒冊, 수감자 명부) 등을 사열(査閱, 조사)하고 민장(民狀, 민원서류)과 각읍의 보장(報狀, 보고서)을 제결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요하였다. 그가 진주에 출도하였을 때에는 진주목 동헌에 처소를 정하고 민장을 제결하였는데, 하루에 300여 장, 어떤 날에는 밤늦게까지 600~700장에 이르는 민장을 제결하기도 하였다."
 
서류 검토를 위해 동헌의 방을 얻어 작업을 했을 정도다. 이처럼 어사출도 직후의 암행어사들은 각종 문서를 검토하고 처리하느라 밤을 꼬박 새야 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안 되는 대부분의 어사들은 어사출도와 함께 고시생 모드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암행어사> 제5회에서처럼 "어사출도요!"라는 외침 속에 역졸들이 관아로 난입해 아전들을 두들겨 패고 관청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일은 실상은 아주 드물었다. 지긋지긋한 수험 생활에 염증이 나서 과거 급제와 함께 책을 덮은 어사라면, 어사출도를 단행하는 데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열공' 모드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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