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 스틸컷

<차인표> 스틸컷 ⓒ 넷플릭스

 
지난 2012년 방송됐던 엠넷(Mnet) <음악의 신>은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했던 '페이크 다큐'라는 포맷을 크게 유행시키며 큰 화제를 일으켰다. <음악의 신>은 1990년대 최정상그룹 룰라의 리더이자 대중가요 제작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다양한 사건사고에 휘말리며 몰락한 이상민을 주인공으로 선택하며 그의 '실제 인생'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음악의 신>은 현실과 픽션을 적절하게 결합시켜 몰입감을 높인 구성이 돋보였다. 프로그램 특유의 리얼리티와 'B급 병맛 유머' 코드가 극대화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주인공 이상민이 본인의 흑역사까지 기꺼이 자학개그의 소재로 내던지며 '살신성인'해준 덕분이었다.

이상민에게도 <음악의 신> 출연은 신의 한 수였다. 이 프로그램을 기점으로 그는 <아는 형님> <님과 함께> <미운 우리새끼> 등 인기 예능의 단골손님으로 거듭나며 성공적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또한 2016년 방송된 <음악의 신> 시즌2에서는 역시 각종 논란으로 하락세를 타고 있던 탁재훈과 동반출연하여 프로젝트 걸그룹 C.I.V.A를 성공시키는 등 '좌절한 연예인 재활용 전문예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후로도 비슷한 포맷의 페이크 다큐 프로그램들이 몇 차례 시도되기는 했지만 무엇도 <음악의 신>만큼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차인표>를 보며 오버랩 된 <음악의 신>
 
 영화 <차인표> 속 한 장면.

영화 <차인표> 속 한 장면. ⓒ 넷플릭스


2020년에 찾아온 영화 <차인표>를 보면서 <음악의 신>이 오버랩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차인표>는 한때 대스타였던 배우 차인표가 전성기의 영예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다. '90년대 스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 다수의 출연진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주인공의 실제 인생과 이미지-캐릭터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 B급 유머와 자학개그를 강조한 구성까지 사실상 영화판 <음악의 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차인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배우 커리어와 독특한 인간적 매력을 겸비한 인물이다. 1994년 MBC <사랑을 그대 품안에>도 하루아침에 당대의 최고 스타 반열에 오른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자, 이 작품으로 인연을 맺어 평생의 반려자가 된 아내 신애라와 러브스토리로도 큰 화제가 됐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불운한 작품 선구안과 과장된 오버연기로 인하여 우스꽝러운 패러디의 단골손님으로 전락하는 흑역사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반듯하고 모범적인 바른 생활 이미지와 달리, 조금은 느끼하고 부담스러운 열정남과 은근히 허당스러운 이미지가 공존하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차인표는 정극과 예능에서의 이미지 간극이 유독 크게 부각되는 배우로도 유명한데, 물론 본인은 한껏 진지한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표정과 과장된 캐릭터 때문에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웃기게 느껴진다는 게 '차인표식 연기'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단지 여기까지만 보면 한때 전성기를 누리다가 나이를 먹고 시대흐름에 뒤쳐지며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수많은 중견 연예인들과 다를 게 없어보인다. 하지만 차인표라는 배우가 그저 놀림감으로 전락하지 않고, 오히려 '호감 배우'으로 재평가받을 수 있었던 건, 배우 스스로가 과거의 명성에 얽매이기보다 대중과 현실의 간극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대인배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기 외적으로 큰 구설수가 없었고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것 역시 대중에게 신뢰감을 준 원동력이었다.

엄청난 충격 선사했던 차인표의 예능 도전

차인표는 알고보면 이상민보다도 시대를 훨씬 앞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전복하여 웃음의 소재로 만드는데 두려움이 없었던 배우이기도 하다. 차인표와 이휘재가 1990년대 후반 '립싱크 개그'로 화제를 모았던 희극인 김진수-이윤석 듀오의 '허리케인 블루'를 패러디하며 스틸하트의 히트곡 <쉬즈곤 She's gone>을 립싱크했던 장면은 당시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다.

당시만 해도 차인표에게는 여전히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섹시한 오렌지족 신사' 이미지가 남아있었던 데다가, 정극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중시하는 주연급 배우가 그 정도로 대놓고 망가지는 경우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록스타로 분장하고 장발의 가발을 뒤집어쓴 채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립싱크를 열창하던 '예능인 차인표'는 그렇게 세상에 처음 탄생했다.

차인표의 쉬즈곤 패러디 연기는, <사랑을 그대품안에>의 '색소폰 립싱크' 장면, <그대 그리고 나>에서 그레이스 존스의 'I've Seen That Face Before'에 맞춰 몸을 흔들던 '방구석 나홀로 댄스' 장면 , 그리고 <홍콩 익스프레스>에서 선보인 양치질-팔굽혀퍼기-에어로빅 댄스등 이른바 '분노 3종세트' 등과 더불어, 차인표의 인생 4대 몸연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처럼 차인표는 나름 예능감이 있고 코믹한 이미지에 거부감도 없는 배우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유머 코드가 이른바 전형적인 '아재 개그'라는 점이다. 차인표는 센스 있는 입담이나 순발력 있는 몸개그보다는, 분위기에 맞지 않는 썰렁한 농담이나 의도하지 않은 진지한 모습으로 피식하고 웃음을 짓게 만드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유머 코드는 영화나 드라마같은 장르에서 구현하기 쉽지 않다. 

진정으로 대중이 보고 싶어한 것은
 
 <차인표> 스틸컷

<차인표> 스틸컷 ⓒ 넷플릭스

 
어쩌면 <차인표>의 가장 큰 실수는 <음악의 신>처럼 예능이나 페이크 다큐가 아니라, 굳이 영화라는 장르를 선택했다는 점일 수도 있다. 영화 <차인표>를 제대로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일단 차인표라는 배우의 캐릭터와 개인사를 어느 정도 알아야한다. <음악의 신>은 에피소드 초반부터 이상민과 연관된 수많은 지인들을 등장시키고, 궁상맞은 일상을 이어가던 주인공의 현 주소를 보여주면서 배경 지식이 없는 시청자들에게도 이상민이 어떤 캐릭터인지를 자연스럽게 알려줬다. 물론 10부작 이상의 분량으로 다양한 에피소드를 펼쳐낼 여유가 충분한 TV 예능 장르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영화 <차인표>에는 러닝타임상 이런 배경 설명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차인표에 대하여 잘 모르는 젊은 시청자들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패러디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차인표는 비록 커리어에 다소 부침은 있었지만, 이상민처럼 사회적 위상이 바닥까지 추락하거나 큰 구설수에 휘말린 경험은 없다. 최민식-송강호 같은 유명 배우들을 언급하며 자신이 그들과 여전히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모습, 굳이 기를 쓰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극중 차인표의 허세와 무리수에 대한 공감대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음악의 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TV와 영화의 장르적 차이만은 아니다. 이 프로그램은 주인공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10년차 연습생' 이수민, '사고뭉치 매니저' 김영광같은 개성 넘치는 조연들을 곳곳에 배치하며 '오피스물'에 가까운 집단 군상극을 표방했다. 이상민이 운영하는 작품 속 연예기획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스케줄과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화려한 무대 이면에 가려진 연예계의 속성과 비하인드 스토리들까지 흥미롭게 풀어냈다. 대중이 이러한 장르에서 어떤 볼거리를 기대하는지 그 욕구를 정확히 파악한 결과였다.

아쉽게도 <차인표>는 이미 영화 제목으로 예측이 가능하듯 지나치게 차인표 개인에게만 초점이 맞춰져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셀프 패러디하여 웃음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용기는 좋았지만, 대중이 과연 보고싶어한 것이 그저 차인표의 '원맨쇼'뿐이었을까. 오히려 <음악의 신>과 비슷한 콘셉트로 대스타 차인표가 아카데미 수상에 도전한 것이나, 젊은 후배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도하면서 스스로의 배우경력을 돌아본다는 등 '페이크 다큐'의 성격을 좀 더 강화했더라면 훨씬 개연성 있고 공감대 높은 에피소드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차인표는 여전히 매력 있는 배우이고, 예능으로나 정극으로나 수많은 아이디어를 풀어낼 수 있는 충분한 그릇을 가지고 있다. <차인표>는 아쉽게도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그저 그런 요리를 만들었다는 아쉬움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굳이 차인표라를 배우를 코미디의 소재로 다룰 것이었다면, 차라리 '연기의 신'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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