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 당시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이었던 철기 이범석(1900~1972).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청산리 대첩 당시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이었던 철기 이범석(1900~1972).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 국가보훈처

 
학부 시절, 대학 도서관에서 낡은 책 한 권을 빌려본 적이 있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 당시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이었던 철기 이범석(李範錫)이 쓴 회고록 <우둥불>이었다.

나는 그 낡아 바스라지기 직전이었던 책을 손에서 떼지 못했다. 일본군과 마적에게 쫓기던 우리 독립군의 처량한 신세, 우둥불(모닥불) 하나에 의지해 쪽잠을 자면서도 독립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독립군의 의지, 적의 대병력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운 용기 등은 젊은 나의 가슴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백여 근의 무장을 몸에 걸치고 하루에 백수십리 길 험산 황야를 가로질러 강행군하면서 피가 튀는 치열한 전투까지 치렀던 것이다. 그 배고픔, 그 추위, 그 투지가 아직 내 숨소리의 갈피에 배어 있다. 어찌 내 이를 잊을 수 있으랴!" - <우둥불>, 백산서당, 25쪽.

<우둥불>에서 묘사된 독립군에 대한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했던 나머지, 모두가 '어벤져스'에 열광하던 그 무렵, 나는 이들에게 빠져들었다. 그와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자가 되겠다는 꿈도 비로소 확고해졌다.
 
유튜브에서 만난 드라마 <우둥불>
 
 KBS 기록드라마 <우둥불>

KBS 기록드라마 <우둥불> ⓒ KBS

 
며칠 전 잠시 잊고 살았던 <우둥불>의 추억이 떠올랐다. 습관처럼 유튜브에 들어갔더니 <우둥불>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추천 영상으로 뜨는 게 아닌가. KBS에서 추억의 프로그램들을 업로드하는 공식 채널에 드라마 <우둥불> 전회를 업로드한 것이다.  

1982년작 KBS 드라마 <우둥불>은 이범석이 쓴 동명의 회고록을 토대로 제작된 기록드라마이다. 요새는 '동네 한 바퀴'를 열심히 돌아다니는 배우 김영철이 주인공 이범석으로 등장한다. 옛날부터 보고 싶었던 드라마였지만, 너무 오래 전에 방영되어 다시보기 서비스도 제공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고전드라마를 유튜브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사실 화려한 CG나 스토리에 길들여진 '신세대' 입장에서 40년 전에 만들어진 드라마가 재밌어봐야 얼마나 재밌을까 싶기는 했다. 그저 역사전공자로서, <우둥불>을 감명 깊게 읽었던 독자로서 약간은 의무적인 시청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어설픈 CG나 무기·지명·인명의 오류 등 고증에 어긋나는 부분들이 눈에 띄었지만 시대적 한계로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만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기술적·사료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을 최대한 재연하려 노력한 티가 났다.
 
 주인공 철기 이범석으로 분한 배우 김영철

주인공 철기 이범석으로 분한 배우 김영철 ⓒ KBS

 
전투 장면보다 인상적인 독립군 병사들의 이야기

사실 학계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우둥불>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시해왔다. 당사자인 이범석의 회고록이라는 점에서 검증되지 않은 개인의 주장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특히 청산리 대첩 당시 김좌진 부대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펼쳤던 홍범도 부대에 대해 '5만이 넘는 적의 대병력의 기세에 압도당해 전의를 상실하여 몰래 전선을 이탈했다'는 등의 주장이 그렇다.

그럼에도 <우둥불>의 진면목은 수많은 무명·유명 독립군 병사들의 이야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결혼한 지 사흘 만에 독립군에 자원입대한 17세 소년병 지용호, 대한제국군 병사 출신으로 독립군이 된 한상등, 자기 몸을 기관총에 묶고 기관총과 생사를 함께 한 최인걸 등... 이범석은 수많은 동지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한 명 한 명 꼼꼼하게 기록해두었다. 이범석의 기록 덕분에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채 잊힐 뻔했던 수많은 독립군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범석의 기록에 충실하여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많은 비중을 할애한다. 저마다 사연 하나씩 갖고 있는 독립군 개개인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처럼 엮여 한 편의 서사가 완성된 것이다.

독립군이라고 해서 모두 용감하게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내부에서 분열을 획책하는 밀정, 겁에 질려 우는 소년병의 모습은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는가 되돌아보게 한다.

정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청산리 대첩 전투 장면은 3부 마지막에만 잠깐 그려질 뿐이다. 제작진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우리 독립군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했는지, 그들은 왜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지 시청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싶었던 것 같다.
 
 청산리 대첩을 묘사한 장면

청산리 대첩을 묘사한 장면 ⓒ KBS

 
배우들의 리즈시절 보는 재미 쏠쏠해

이 드라마의 또 다른 흥미 요소는 지금은 원로배우가 되었거나 고인이 된 배우들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 이범석 역을 맡았던 배우 김영철은 당시 28세였다. 장년의 모습만 기억하는 내게 20대 리즈시절의 김영철의 모습은 신선했다. 이때 김좌진의 충직한 부하로 등장하는 김영철이 20년 뒤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으로 등장하는 등 흥미로운 부분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로 분한 배우 주현, 북로군정서 대원으로 단역 출연한 20대의 유동근 등 대배우들의 리즈시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북로군정서 대원으로 등장한 배우 유동근과 주현

북로군정서 대원으로 등장한 배우 유동근과 주현 ⓒ KBS

 
특히 백야 김좌진 장군 역을 맡은 고 문오장의 모습은 흡사 김좌진이 살아돌아온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사실 그동안 김좌진하면 <야인시대> 버전의 김좌진(최동준 분)을 자연스레 떠올렸는데, <우둥불> 버전의 김좌진이야말로 역대급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백야 김좌진 장군으로 분한 故 문오장

백야 김좌진 장군으로 분한 故 문오장 ⓒ KBS


<우둥불> 리메이크를 고대하며

그러고 보니 올해가 바로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이었다. 이렇듯 의미 있는 해를 맞아 <우둥불>이 2020년 버전으로 리메이크 되었어도 참 좋았을 텐데 하는 뒤늦은 아쉬움이 든다.

올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이러한 바람은 이미 허사가 되어버렸지만 언젠가 <전우>처럼 <우둥불> 역시 리메이크로 재탄생하기를 고대해본다. 40년 전보다 발달한 CG 기술과 축적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청산리 대첩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블록버스터급 드라마 한 편 만들어도 의미 있지 않겠는가. 만약 리메이크작이 만들어진다면 원작에서 이범석 역을 맡았던 김영철이 이번에는 김좌진 역을 맡으면 어떨까.
 

☞ 드라마 <우둥불> 다시 보기
https://youtu.be/SZnBs8ElSE0
https://youtu.be/554RTA8K7yc
https://youtu.be/02rec6VlQ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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