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면 신인들이 데뷔하는 요즘과 비할 바는 못되지만 1990년대 후반 가요계는 '아이돌 가수'들이 범람하던 시대였다. 특히 '10대들의 승리' H.O.T.와 '6개의 수정' 젝스키스는 해체된 지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아이돌의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물론 당시 아이돌이 H.O.T.와 젝스키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잊혔지만 당시만 해도 많은 팬들을 설레게 했던 보이그룹들이 꽤 많이 있었다. 

'새롭게 빛나는 그룹(New Radiancy Group)'이라는 뜻을 가진 N.R.G는 미소년이었던 노유민을 앞세워 말랑말랑한 노래들을 주로 불러 많은 인기를 끌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초창기의 샤이니와 이미지가 비슷했다. 잉크의 7명을 뛰어넘은 8인조 O.P.P.A는 당시 아이돌 그룹 역대 최다 멤버 수를 자랑하던 팀이다. 당시 O.P.P.A는 'O.P.P.A 007'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돌 최초로 '유닛' 활동을 하며 많은 화제를 모았다.
 
훗날 리치라는 이름의 솔로 가수로 데뷔했던 막내 대니와 한 때 CIA 요원으로 활동했던 카리스마 리더 론이 주축이 됐던 이글파이브도 있었다. 이글파이브는 노래보다 "우리는 이그으으을 파이븝니다!"라는 독창적인 자기소개 멘트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신화입니다", "우린 슈퍼주니어에요~" 등으로 대표되는 독창적인 자기 소개법의 원조 같은 팀이다(이글파이브가 신화보다 데뷔가 4일 정도 빨랐다). 

모두들 각자의 개성으로 그 시절 대중들에게 어필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절의 보이그룹들은 남자들의 마음까지는 사로잡지 못했다. 각각 '애국심'과 '궤도'라는 강렬한 데뷔곡을 선보였던 O.P.P.A와 이글파이브는 후속곡으로 '그대야 미안해'와 '오징어 외계인'이라는 당황스러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애초부터 '귀여운 아이돌'이라는 콘셉트를 들고 나온 N.R.G 역시 남성 팬들이 좋아하기엔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소외되던 남자들은 김경호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나 시나위의 '은퇴선언', 부활의 'Lonely Night' 같은 강한 록 음악을 들으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남자들의 감성과 순정을 대변해 줄 또래의 남자 아이돌 가수가 하나쯤 나타나주길 기다렸다. 그러던 1997년 11월, 남성미가 풀풀 풍기는 강인한 4인조 댄스 그룹 태사자가 등장했다. 

남자들을 위한 강인하고 감성적인 보이그룹 태사자 
 
 태사자는 자켓 사진부터 음악 스타일까지 남성미를 한껏 강조했다.

태사자는 자켓 사진부터 음악 스타일까지 남성미를 한껏 강조했다. ⓒ 민사운드스토리엔터테인먼트

 
영어 이름이 대세를 이루던 시절에 태사자는 뜬금없이 한자 이름을 들고 나왔다. 클 태(太), 넉 사(四), 아들 자(子). '네 명의 큰 아들'이라는 아주 명쾌한 뜻이다. 한자사전이 필요할 만큼 어려운 글자도 없다. 사실 태사자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 나라의 무장으로 손책과 나눈 '사나이들의 뜨거운 으리'로 독자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인물이다. 태사자라는 그룹명은 당시 소속사 선배였던 김희선이 삼국지 게임을 하다가 추천한 것이라고 한다.

멤버는 4명이었는데 이들에게도 각각 캐릭터가 있었다. 베이스 랩을 맡고 있는 리더 김형준은 천(天), 리드 보컬 이동윤은 우(雨), 하이톤 랩의 박준석은 운(雲), 메인 보컬이자 막내 김영민(그의 본명이 김영득이란 사실은 잠시 잊도록 하자)은 풍(風)이었다. 여기서도 한자가 또 등장한다. 그것도 하늘과 비와 구름과 바람. 멤버들의 캐릭터 역시 뭔가 무협지에나 등장할 법하다('천우운풍'은 태사자의 팬클럽 이름이기도 했다). 

데뷔곡 제목은 '도'. '칼(刀)'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길(道)'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가슴 속에 칼을 품은 사나이의 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듯 하다. 태사자의 데뷔곡 '도'는 H.O.T.의 '캔디'와 '행복', O.P.P.A의 '그대야 미안해', UP의 '뿌요뿌요', '바다' 같은 캔디팝 전문 작곡가 장용진이 만든 남성적인 댄스곡이다. 심지어 전주에는 무협지처럼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까지 효과음으로 들어갔다. 

'도'는 노래방에서 남자 네 명이 부르기 딱 좋은 곡이다. 어떤 파트를 맡아도 마이크를 잡고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김영민과 이동윤을 맡으면 분량을 실컷 챙길 수 있고 김형준 파트는 추임새를 넣는 부분이 많다. 박준석은 가장 분량이 적지만 짧은 만큼 강렬하다. 만약 1절만 불렀는데 '정지' 버튼을 누르는 친구가 있다면 "음악도 모르는 한심한 놈"이라고 실컷 비웃어주면 된다. 

박준석의 랩은 적당한 하이톤으로 적당히 방정 맞으면서도 적당히 구슬프게 불러야 제대로 맛이 산다. 이 부분을 확실히 살리지 못하면 "아~~에~~ 태사자 인더 하우스 어!"라는 강렬한 도입부도, "저 하늘을 날아가~(하늘 날아가~)"라는 애절한 후렴구도 빛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도'의 킬링포인트를 맡고 있는 박준석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뜻이다.

데뷔곡보다 더 무거워진 태사자의 후속곡 <TIME> 

1990년대 후반의 아이돌 그룹들은 심각한 곡으로 활동한 후 발랄한 후속곡으로 변신하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였다. '전사의 후예'에서 '캔디'로 변신한 H.O.T, '학원별곡'에서 '폼생폼사'를 외친 젝스키스, '해결사' 이후 '으쌰으쌰'를 내놓은 신화, '애국심'에서 '그대야 미안해'로 이미지 변신한 O.P.P.A, '어머님께'에서 '관찰'로 전환한 god 등이 대표적이다.

태사자 역시 검증된 공식을 답습할 거라 예상됐지만 태사자 1집에는 8번 트랙 'Tom & Jerry' 정도를 제외하면 발랄한 댄스곡이 없었다. 이에 태사자는 아이돌그룹의 관습을 따르는 대신 자신들만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테이프로는 A면 마지막에 숨어 있는 'Time'이라는 템포가 느린 노래를 후속곡으로 선택한 것이다. 태사자는 그룹 이름부터 활동 방식까지 기존의 아이돌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R.ef의 이성욱을 연상케 하는 김영민의 애절한 보컬은 후속곡 'Time'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도'에서 '결정적 한 소절'을 담당했던 박준석 역시 "친구들은 날 비웃겠지 허~"로 변함없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결국 'Time'은 데뷔곡 '도'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으며 태사자라는 그룹을 가요계에 안착시켰다. 'Time'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대중들에게 태사자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태사자는 3번째 활동곡 역시 '사랑, 눈물, 기쁨, 상처'라는 폭발적인 랩이 돋보이는 댄스곡을 선택하면서 끝까지 자신들의 '도(道)'를 지켰다. 태사자의 노래들은 대부분 사랑 이야기다. 다른 아이돌 그룹처럼 사회 문제를 건드리거나 자아 형성 따위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 그 중에서도 이별 노래들을 주로 불렀다. 비슷한 경험을 했던 그 시절의 또래 남자들이 태사자의 노래를 좋아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남자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던 유일한 남자 아이돌 
 
 태사자는 <슈가맨3>에 출연해 전성기 못지 않은 실력과 비주얼을 선보였다.

태사자는 <슈가맨3>에 출연해 전성기 못지 않은 실력과 비주얼을 선보였다. ⓒ jtbc 화면 캡처

 
태사자는 분명 다른 아이돌 그룹과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시절 아이돌 시장을 양분했던 H.O.T.와 젝스키스의 벽은 너무 높고 견고했다(결정적으로 남자들은 또래의 남자 아이돌을 위해 지갑을 여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결국 태사자는 1998년 2집 '애심'과 '아그작', 1999년 3집 '회심가'를 차례로 발표했지만 1집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지 못했고 결국 2000년 4집 '도약'을 마지막으로 4년의 짧은 활동을 마치고 해체되고 말았다. 

해체 후 각자의 삶을 살며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대중들에게 소식을 들려주지 않았던 태사자 멤버들은 작년 11월 <슈가맨3>의 첫 번째 가수로 출연해 데뷔곡 '도'를 비롯해 그 시절의 히트곡을 불렀다. 태사자는 '다시 만난 첫사랑이 실망스럽게 변했다는 이야기가 듣기 싫어'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많은 감량과 함께 혹독한 연습을 소화하며 관객들과 시청자들에게 멋진 무대를 선보였다.

태사자는 <슈가맨3> 출연 이후 신곡을 발표해 활동하진 않았지만 간헐적인 방송출연을 통해 팬들과 만나고 있다. 태사자는 지난 8월에도 <불후의 명곡>에 출연해 이동윤이 빠진 3인 버전의 '도'를 불렀고 리더 김형준은 박준석의 아내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 들어가 광고를 찍기도 했다. 비록 활동기간도 짧았고 정상에 서지도 못했지만 태사자는 1990년대 후반 남자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던 남자 아이돌 그룹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