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편집자말]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투사 혹은 그냥 회사원. 그 사이 어디쯤 있는 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JTBC 금토드라마 <허쉬>. 이 드라마의 주인공 한준혁(황정민)은 그 누구보다 정의를 위한 글을 쓰고 싶어하는 기자다. 하지만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디지털 뉴스부로 좌천(?)됐고, 스스로도 '기레기'임을 인정하며 살아가게 된다. 지난 4회까지의 방송은 '기자'이고 싶지만 '기레기'로 살 수밖에 없는 준혁이 겪는 갈등을 잘 담아냈다. 

그런 그가 마침내 4회 말미 '기레기 탈출'을 선언했다. 인턴기자 수연(경수진)의 자살 사건으로 그 어느 때보다 고통과 갈등 속에 있던 그는 불현듯 "세상 모든 미숙이들이 공정한 대가를 치를 때까지 조진다"며 동료들에게 다시 '기자'로 살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나 때문에!"
 
긴 시간 체념하듯 살아온 그가 다시 열정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그가 외치는 '나 때문에'는 어떤 의미일까? 준혁의 심리적 변화는 수치심을 극복한 인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준혁(황정민)은 한 때 열정을 가진 기자로 살고픈 '꿈나무' 였다.

준혁(황정민)은 한 때 열정을 가진 기자로 살고픈 '꿈나무' 였다. ⓒ JTBC

 
죄책감이 수치심이 될 때
 
준혁은 한때 '꿈나무'였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늦은 나이에 기자가 됐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일하기를 원하는 기자였다. 윤경(유선), 세준(김원해), 기하(이승준)는 준혁의 이런 진심을 알아봐준 선배들이다. 이들의 따뜻하면서도 혹독한 트레이닝 덕에 준혁은 진짜 기자가 된다. 하지만 언론계 동료이자 취재원이기도 했던 MBS 노조위원장이 왜곡된 뒤 게재된 그의 기사로 인해 자살을 하고, 이후 그의 모든 것은 달라진다.
 
처음에 그를 사로잡은 건 죄책감이었다. 심리학에서 죄책감은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 양심 혹은 사회적 규범 등에 반해서 행동했다 여겨질 때 드는 불안, 초조, 우울 등 다양한 감정을 말한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편집된 글 때문에 동료가 자살했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글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준혁에겐 엄청난 죄책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죄책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통해 힘든 감정들을 극복하려 애쓴다. 드라마에서 자주 반복되는 장면 중 하나인 준혁이 15층까지 뛰어 올라가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는 모습은 그가 죄책감을 유발한 그 사건을 바로잡고자 애썼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죄책감은 분명 불편하고 힘든 감정이긴 하지만, 문제를 바로잡고, 수정해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잘못한 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준혁이 아무리 항의를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입 닫고 조용히 있어"라는 말뿐이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과조차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준혁은 분노와 무력감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은 죄책감을 넘어 수치심에 이르게 한다.

수치심은 죄책감과는 구분되는 감정으로 '내가 무언가 잘못된 존재'라는 사고에 기반을 둔 감정이다. 즉, 죄책감이 어떤 사건이나 행동 자체에 대해서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수치심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 자체를 탓하는 마음이다. 수치심에 빠져들 때 우리는 스스로를 부적절한 존재로 여기게 되고 삶을 체념하게 된다.
 
수치심을 직면하다
 
'꿈나무' 준혁이 '기레기'가 된 것은 바로 이 수치심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제 스스로를 '부적절한 존재'로 여기게 된 준혁은 더 이상 열정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냥 체념한 듯, 하루하루 불만 가득한 채로 살아갈 뿐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보살피거나 가꾸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동료들의 진심어린 걱정에도 그는 여전히 자살한 선배와 마지막 먹었던 곰국을 입에 대지 못한 채로 자기 자신과 현실을 모두 외면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런 그에게 인턴기자 교육임무가 주어진다. 그리고 지방대를 나왔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배제될 운명을 가진 수연의 사망사건이 벌어진다. 준혁은 눈 앞에서 수연의 사망을 목격하고, 이 사건은 그토록 잊고 지내려 했던 예전의 일을 떠올리게 한다. 여전히 "넌 계속 입 닫고 조용히 있어"라고 말하는 국장(손병호)과 누군가의 죽음마저 이용하려드는 언론사의 치졸함은 깊은 수치심에 빠져 지내고 있는 준혁을 자극한다.
 
특히 수연과 인턴동기이자 사망한 MBS 노조위원장의 딸이기도 한 지수(윤아)의 날선 시선은 준혁을 더욱 수치스럽게 만든다. 지수의 과거를 모르는 준혁은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지수의 시선이 불편하고 부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지수의 이런 시선은 준혁이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묘하게 일치한다. 아마도 준혁은 지수의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시선, 즉 자기 자신을 '한심하고 부적절한 존재'로 여기는 자신의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때문에 지수의 쏘아보는 눈빛이 더욱 신경쓰였을 것이다.
 
바로 이 시선을 통해 준혁은 자신이 수치심에 사로잡혀 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지수의 눈빛이 부당하다 느껴졌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 역시 부당했다고 느낀다. 2회 국장 앞에서 준혁이 맨손으로 화분을 깨뜨리는 장면은 자신을 옭아맸던 분노와 수치심을 깨어버리고 싶은 그의 심경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동시에 주변 인물들의 말들도 수치심에 가려져있던 그의 책임감을 일깨운다.
 
"맛있게 먹고 기운 차려서 책임지고 싶은 것만 책임지면 돼." (김형사, 2회)
"어디다 책임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수연 동생, 4회)
"니 잘못 아니니까 이제 좀 그만 내려놓고 사람처럼 좀 살라고" (윤경, 4회)

 
이런 말들은 그에게 수치심에 빠져 무기력하게 있는 한, '책임질 수 없음'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준혁은 이제 두 번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선다.
  
 지수(윤아)의 불편한 시선은 준혁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 있다.

지수(윤아)의 불편한 시선은 준혁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 있다. ⓒ JTBC

 
나를 돌보기로 다짐하다
 
그 방법으로 준혁은 3회 고수도 의원의 비리를 캐내려 한다. 하지만 그와 동료들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도전은 무기력을 낳고 이는 또 다시 수치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 그를 구한 건 바로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였다.
 
4회 준혁은 보다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보자는 동료들과 한바탕 큰소리로 다툰 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아버지는 준혁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준혁아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 힘들고 부대껴도 집에 들어가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뭔 수가 나와도 나올 거야." (준혁 아버지)
 
'집'은 온전히 쉴 수 있는 곳, 즉 내 몸과 마음을 보살피는 곳을 상징한다. 아버지는 '나 자신을 돌봐라'라는 의미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대의를 위해 일한다 하더라도,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즉 나 자신을 보살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었을 게다. 준혁은 다행히 이 말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집에 들어간 그는 사진 속 어린 딸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아빠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해서."
"미안해서? 그럼 더 빨리 와서 '미안해' 했어야지."

 
준혁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이 대화는 그가 진정으로 수치심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이제 준혁은 어쩔 수 없었던 일들로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멈춘다. '수치심'을 거두고, '미안한' 마음에 책임을 지기 위해 다시 펜을 들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다음 날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발은 집에서부터 신고 나오는 거잖아. 집에도 가지 않고 뭘 하겠다고 한건지." (4회)

이는 그의 '미안함'이 자기자신에게도 향하고 있음을, 자신을 돌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음을 보여주는 대사였다.
 
 준혁은 마침내 '나를 위해' 다시 펜을 들겠다고 다짐한다.

준혁은 마침내 '나를 위해' 다시 펜을 들겠다고 다짐한다. ⓒ JTBC

 
"나 때문에. 이번이 내가 진짜 기자라고 명함 들이밀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같거든!"

마침내 준혁의 입에서 나온 이 다짐은 그 어떤 것보다 진실되고 힘있게 들려왔다. 그 어떤 정의와 대의를 위한 일을 하더라도 이를 실천해야 할 나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아끼지 않는다면 그건 허울에 불과할 것이다. 지독한 수치심을 경험한 준혁은 마침내 이를 깨달았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부터 돌보는 게 먼저임을 말이다. 아마도 앞으로 준혁의 활약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을까? 나를 아끼며, 나를 위해 쓰는 글은 그 어느 것보다도 힘이 있을 테니 말이다.
 
"왜 때문에?" "나 때문에!"
실은 우리 모두는 '나 때문에' 사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허쉬 황정민 윤아 수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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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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