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벌써 12월 말이라니...'라는 말이 무심결에 튀어 나오는 요즘입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신음한 2020년이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위로를 받았던 순간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외출이 어려운 상황이라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 대중문화들이 많은 힘을 줬을 듯한데요. '2020 날 위로한 단 하나의 OO'에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 순간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깊은 상처를 지녔지만 완전히 다른 남녀가 만나 통합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 포스터.

깊은 상처를 지녔지만 완전히 다른 남녀가 만나 통합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 포스터. ⓒ tvN

 
'괜찮다, 괜찮다…'로 시작하는 시가 있다.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는 듯한 그 속삭임에 펑펑 눈물을 쏟았던 기억. 아파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괜찮다'는 짧은 말에는 그 어떤 유려한 언사도 갖지 못하는 강력한 위로의 힘이 있다. 여기 '조금 이상해도 괜찮다'며 위로의 손길을 내민 드라마가 있다.
 
올 여름 방영됐던 tvN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는 이상한(?) 이들이 많이도 등장한다. '괜찮은 병원'에는 부모의 차별과 학대, 딸의 죽음, 전쟁의 상흔 등 저마다의 사연으로 어딘가 '이상해진'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위로 받고 때로는 그들을 돕기도 하며 성장하는 세 사람이 있다.
 
학대와도 같은 양육을 했던 사이코패스 엄마와 그것을 방관한 아빠 사이에서 자라 타인과 공감할 줄 모르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가는 문영(서예지 분). 장애를 지닌 형에게 치우친 사랑을 주었던 엄마에 대한 원망과 형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려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는 데 익숙한 동생 강태(김수현 분). 엄마가 살해 당하는 것을 목격한 뒤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인 형 상태(오정세 분). 다들 조금씩 이상한 사람들이다.
 
드라마는 이 세 사람이 트라우마를 벗어나 행복을 찾고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드라마 속 동화 <진짜 진짜 얼굴을 찾아서>에서 문영은 소리만 요란하고 속이 텅 빈 깡통공주, 강태는 입꼬리만 웃는 가면을 쓴 소년, 상태는 답답한 박스 속에 갇혀 사는 아저씨로 그려진다. 그들은 어떻게 깡통과 박스와 가면을 훌훌 벗어던지고 자신의 진짜 진짜 얼굴을 찾게 될까?
 
온기를 맛 본 문영이 향한 곳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 현장 사진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 현장 사진 ⓒ tvN

 
문영은 자신의 감정과 욕구에만 충실한 탓에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고 즉흥적이며 공격적이다. 사이코패스 엄마와 방관자 아빠가 초래한 공허한 내면은 화려한 옷으로 가린다. 그런 문영이 정반대의 사람, 강태를 만났다. 장애인 형을 돌보라고 너를 낳은 거다, 말했던 엄마에 의해 너무 일찍부터 책임감을 강요 받았던 강태는 엄마가 죽은 뒤 스스로 그 짐을 짊어진다. 보호자로서의 삶이 고단해 자신을 돌아볼 여력은 없다. 그저 삭히고 감추는 데 능한, 그래서 눈은 슬픈데 입만 웃는 조커 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간다. 이렇듯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내면에 웅크린 '예쁨 받고 싶어하는' 아이를 알아보고 품어준다. 그리고 정반합을 이루듯 서로를 꼭 반씩 닮아간다.
 
문영은 강태에게서 감정을 날것 그대로 폭발시키지 않는 법,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운다. "왠지 자꾸 너한테 길들여지는 기분이 들어"라고 투정하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다. 자기밖에 모르던 문영이 강태 상태 형제와 부대끼면서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삶에 발을 들인다. 한 번 맛본 온기를 다시는 놓을 수 없게 된 문영은 엄마를 찾아가 말한다.
 
"다행이지. 나도 엄마처럼 악귀가 될 뻔했는데. 난 엄마가 불쌍해. 자기가 불쌍한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게. 식욕만 있지 온기가 뭔지 몰라.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지. 그래서 난 엄마와 달라. 난 이제 알았거든. 그게 얼마나 따뜻하고 좋은 건지."
 
딸이 자신을 꼭 닮은 완벽한 '작품'으로서 '남을 집어 삼키면서 강하게' 살기를 원한 사이코패스 엄마의 그늘. 너무 오래 묶여 있어 끊는 법마저 잊어버렸던 그 목줄을 이제 문영은 스스로 끊어낼 용기를 얻었다. 끔찍한 죄를 저지른 엄마를 대신해 꺽꺽 울며 미안하다 용서를 구할 만큼 감정과 온기를 나눌 줄 알게 된 깡통공주 문영에게서 깡통이 '깡' 하고 떨어져 내린다.

강태의 안전핀을 뽑아준 문영
 
감정을 억누를 줄만 알았지 표현할 줄 모르던 강태의 '안전핀'은 문영이 뽑아준다. 문영을 때린 남자에게 달려들어 한방 시원하게 날린 뒤 정직 당한 강태의 얼굴에는 묘한 해방감이 스친다. 문영 때문에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는 강태는 다 엉망진창이 된 순간 어느때보다 환히 웃는 얼굴로 말한다.
 
"나 정직 먹었어. 그동안 월급도 한푼 안 나올 거고 조만간 고소장도 날아올거래. 완전 다 엉망진창이야. 네가 전에 그랬지? 언제든 내가 원하면 납치해 준다고. 나 너랑 놀러가고 싶어. 지금이야. 가자."
 
일방적으로 참고 맞기만 하던 형과의 관계는 속 시원히 싸울 수도 있는 사이로 바뀌어간다. "맞으니까 아프지? 나도 아파… 이제 못 참아. 안 참는다고." 형과 엎치락 뒤치락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 친구에게 고백하는 강태. 형이랑 치고 받고 싸워보는 게 꿈이었다고, 미치게 좋았다고, 이제 좀 남들처럼 사는 것 같다고. 강태는 그렇게 형의 '보호자'가 아닌 진짜 동생이 된다.
 
자신도 돌아볼 줄 알게 된 강태에게 가족을 지키는 일이란 더이상 '억지로 하는 지겹고 지치는 일'이 아닌 '꽤 멋지고 근사한 목표'가 됐다. 가족을 지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자아를 찾았기에 그 의미가 바뀌었다. 강태의 입꼬리만 웃는 가면도 '툭' 하고 떨어졌다.
 
고통의 기억을 마주한 상태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극중 간필옹은 버스 안에서 귀를 막으며 중얼거린다. "저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극중 간필옹은 버스 안에서 귀를 막으며 중얼거린다. "저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 tvn

 
상태에게 나비란 공포와 동의어다. 엄마를 죽인 뒤, 말하면 너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던 살인자의 가슴에는 나비 모양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나비가 날아드는 봄이 올 때마다 멀리멀리 도망치듯 이사해야 했던 이유다.
 
어느 날, 상태는 전쟁의 트라우마로 평생 고통받는 환자 간필옹(김기천 분)을 돕게 된다. 공사장 기계 소리에 총소리가 연상돼 발작을 일으킨 간필옹에게 달려가 동생이 자신에게 했듯 옷을 벗어 덮어주며 "괜찮아, 괜찮아… 괜찮습니다." 품에 꼭 안아 진정시켜준다. 보호 받기만 하다가 보호하는 입장에 선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그후, 과거에 갇히면 문이 보이지 않아 영원히 나올 수 없다는 간필옹의 말이 깊이 각인된다. '이겨내지 못하면 영혼이 자라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라는 문영의 동화 속 메시지도 자꾸만 되새겨본다.
 
나비에는 '치유'의 의미가 있으며 세상에는 무서운 나비보다 좋은 나비가 훨씬 많다. 상태가 과거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병원장 오지왕(김창완 분)도 넌지시 일깨워준다. (상태가 작업중인) 벽화에 나비를 그려넣지 않으면 벽화비를 줄 수 없다는 오지왕은 보이스피싱보다 더 나쁘다며 분노하면서도, 상태는 고통의 기억을 마주하며 열심히 치유의 나비 그리기 연습을 한다.
 
그렇게 트라우마를 극복해감과 동시에 진짜 어른으로 성장하는 상태. 강태를 문영에게 '뺏기는 게 아니라 함께 있어줄 한 명이 더 생기는' 것임을 깨닫고, '호적에도 없는' 문영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동생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고, 소중히 모아둔 만원짜리 몇 장을 용돈이라 내밀며, 무엇보다 '강태는 (형을 돌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닌) 강태 거'임을 인정할 줄 알게된 상태는 이제 진짜 어른이다. 그리고 자신도 삽화작가로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 기꺼이 독립된 길을 가기로 한다. 갑갑한 박스는 저멀리 벗어던지고서. 그런 형에게 등 두드려 달라, 어리광도 부리고 "형이 우리 형이라 다행"이라 말하는 강태의 눈시울이 붉다.
 
고통스런 기억은 지우는 게 아니라 '덧칠'하는 것이다. 살인자가 자신의 벽화에 그려놓은 무서운 나비를 없던 듯 지울 순 없었지만 상태는 그 위에 덧칠을 한다. 감쪽같이. 그리고 새로운 치유의 나비를 그려넣는다.

그래도 괜찮다고 우릴 위로한 드라마
 
 tvN 토일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스틸 컷

tvN 토일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스틸 컷 ⓒ tvN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 처절하게 후회했던 기억, 남을 상처 주고 또 상처 받았던 기억, 버림 받고 돌아섰던 기억… 그런 기억들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아가는 자만이 더 강해지고, 뜨거워지고 더 유연해질 수가 있지. 행복은 바로 그런 자만이 쟁취하는 거야. 그러니 잊지 마. 잊지 말고 이겨내. 이겨내지 못하면 너는 영혼이 자라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야."

동화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을 통해 이렇게 말한 문영은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과거의 고통은 잊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는 것임을. 다만 용기가 없었을 뿐. 용기는 너와 나의 온기에서 비롯된다. 오지왕의 말처럼 약하니까 서로 기대사는 게 인간이다. 강태 친구의 말처럼 '약한 놈인 걸 인정하고 약한 것들끼리 똘똘 뭉치면 천하무적'이 되는 거다. 문영과 강태와 상태는 이제 천하무적이다. 상태가 말했다.
 
"몸은 정직해서 아프면 눈물이 나지요. 그런데 마음은 거짓말쟁이라 아파도 조용하지요. 그러다가 잠이 들면 그때서야 남몰래 개소리를 내며 운답니다. 끼잉~ 끼잉~"
 
과거의 고통으로 밤이면 남몰래 내는 개소리를 그들은 서로 알아봐줬다. 이상해도 괜찮다고 보듬으며 온기를 나눴다. 그 온기로 용기를 얻어 깡통도 가면도 박스도 훌훌 벗어던졌다.
 
코로나19로 너나없이 모두가 조금은 이상해진 요즘이다. 소중한 사람이 아플까 두렵고, 다시는 예전의 일상을 찾을 수 없을까 불안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시공간을 공유할 수 없음에 우울하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그래도 괜찮다고 우리를 위로한다. 울음소리를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과 온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이 이상한 시절의 끝에서, '잊지 않고 이겨낸' 우리의 영혼은 한 뼘 자라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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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째 손 맞잡고 함께 걷는 한 남자, 그리고 꽃같고 별같은 세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 런던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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