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중음악의 구분은 매우 단순했다. 기껏해야 느린 노래와 빠른 노래, 조용한 노래와 시끄러운 노래, 가요와 팝송으로 구분됐을 정도로 장르의 구분이 모호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이문세와 유재하, 변진섭 등이 차례로 등장하고 김완선과 소방차, 박남정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대중가요는 크게 발라드, 댄스, 트로트로 삼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다수 대중들이 세상의 음악 장르는 3가지 밖에 없다고 여기던 1992년 어느 날, 세상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등장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바로 보이즈투맨이라는 미국의 4인조 보컬그룹이 부른 < End of the Road >였다. < End of the Read >는 느리지만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리듬을 타게 만드는 독특한 노래였다. < End of the Road >는 빌보드 차트에서 무려 1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보이즈투맨의 인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들이 내세운 새로운 음악 장르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도 보이즈투맨이 추구하는 장르가 '리듬&블루스', 일명 'R&B'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보이즈투맨이나 가능할 법한 정통 R&B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팀이 국내에도 등장했다. 바로 재미교포인 정재윤과 김조한, 그리고 이준으로 구성된 3인조 보컬그룹 솔리드였다.

가요 3분화 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교포 3인방
 
 솔리드는 국내에서 흔치 않았던 정통 R&B 발라드를 들려 주던 팀이었다.

솔리드는 국내에서 흔치 않았던 정통 R&B 발라드를 들려 주던 팀이었다. ⓒ 한국음반산업협회

 
1990년대에 접어 들면서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교포 출신 가수들이 국내에서 데뷔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의 호주 교포 이정현(남자가수, <와>, <바꿔> 등을 부른 여성 가수 겸 배우 이정현과는 동명이인)은 <그 누구보다 더>와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등을 히트시키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1년에는 미국 교포 양준일이 <리베카>, <가나다라마바사>같은 노래로 잠시나마 '한국의 마이클 잭슨'으로 불리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재미교포 박정운은 오석준, 장필순과 '오장박'이라는 팀을 결성해 <내일이 찾아오면>을 히트시켰고 2집 <오늘 같은 밤이면>과 3집 <먼 훗날에>같은 자작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물론 90년대 교포 가수 최고의 성공사례는 강수지와 이현우였다). 

1993년에도 LA의 한인교회에서 만난 3명의 재미교포가 모인 신인그룹 '솔리드'가 데뷔했다. 하지만 솔리드 1집은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의 실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솔리드는 대중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인기 작곡가 김형석을 만나 1995년 2집 앨범을 발표하며 1집의 부진을 만회했다.

당시 솔리드는 작곡과 프로듀싱에 정재윤, 랩과 비주얼에 이준, 그리고 보컬에 김조한으로 완벽한 역할분담을 했고 특정 멤버를 향한 쏠림 현상 없이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2집 타이틀곡 <이 밤의 끝을 잡고>를 통해 보이즈투맨이나 가능할 법한 정통R&B의 진수를 선보인 솔리드는 후속곡으로 힙합리듬이 가미된 댄스곡 <나만의 친구>를 통해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특히 '늦어버린 아침에 난 거리에서'로 시작되는 이준의 랩은 당시 남학생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슬럼프> <잠든 널 포켓 속에> 등 솔리드 2집에 담긴 많은 곡들이 동시에 사랑을 받았다.

솔리드는 1집의 부진을 씻고 2집을 대히트시키며 한국을 대표하는 R&B그룹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2집이 나온 지 정확히 1년의 시간이 지난 1996년 4월, 앨범 수록곡 전곡을 멤버들이 직접 작곡한 솔리드의 3집 앨범이 세상에 공개됐다(2집 역시 정재윤이 대부분의 곡을 만들었지만 프로듀서 김형석이 <꿈>의 작곡, <이 밤의 끝을 잡고>의 공동 작곡에 참여한 바 있다).

R&B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 들어있는 솔리드 3집

솔리드는 댄스, 발라드, 트로트로 삼등분된 가요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각 노래마다 친절하게 장르를 붙여줬다(사실 이는 2집부터 사용했던 방식이다). 타이틀곡은 당연히 솔리드를 인기그룹으로 만든 R&B 발라드 장르의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였다. 2집의 <이 밤의 끝을 잡고>가 슬픈 가사가 돋보이는 이별 노래였다면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벅찬 감정을 다룬 러브송이다. 

솔리드는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로 활동하면서 팀의 상징과도 같았던 솔리드볼이 달린 지팡이를 포기했다. 대신 정재윤이 기타를 메고 나와 격한 '핸드싱크'를 선보였다. 솔리드는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로 KBS <가요톱텐> 2주 연속 1위, MBC <인기가요 베스트50>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SBS <TV가요20>에서는 '라이벌' R.ef가 <찬란한 사랑>으로 5주 연속 1위를 하는 바람에 한 번도 1위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솔리드는 3집 앨범 후속곡 활동을 확실하게 하지 못했다. 후속곡이 될 만한 좋은 곡들이 워낙 많아 여러 곡들을 방송에서 한 번씩 선보이다가 정작 후속곡을 정하지 못한 채 활동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하며 유력한 후속곡 후보로 떠올랐던 발라드 <이제 그만 화풀어요>는 김조한이 힘을 빼고 담백하게 부른 곡이다(실제로 김조한이 직접 작곡과 편곡에 참여했다).

솔리드 3집에는 2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시대를 뛰어 넘어 여러 세대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 있다. 바로 노래방, 클럽 등을 통해 젊은층을 통해 마치 구전가요(?)처럼 전해 내려 온 <천생연분>이다. 사실 <천생연분>은 발표 당시엔 솔리드가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않아 아주 많은 인기를 끌진 못했다. 하지만 오늘 날에는 <이 밤의 끝을 잡고>와 함께 솔리드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남아 있다. 

<천생연분>은 여자친구 몰래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여자친구를 만난다는 재미있는 가사의 노래다. 사실 <천생연분>의 가사는 '우리는 서로 속여도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천생연분이니까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는 내용이다. 그 시절 일부 남학생들은 "약속을 정하고 그날이 왔어"로 시작되는 이준의 랩을 하기 위해 노래방에서 격한 몸싸움도 서슴지 않았다. 

2번 트랙 <해피엔딩>도 세 멤버의 비중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는 곡으로 후속곡 후보 중 하나였다. 신나는 펑크 장르와 <천생연분>에 버금가는 재미 있는 가사가 특징인 < Love햄릿 >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남자의 못된 심보를 그린 곡이다. 이 노래는 솔리드의 곡 중에서는 독특하게 이준의 분량이 전혀 없고 <천생연분> 못지않게 많은 랩파트를 전부 정재윤이 소화한다.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앨범 마지막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이준 작곡의 <널 위해서라면>은 이준의 팬이라면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래다. 그동안 김조한에 가려 팀 내에서 한정된 역할만 하던 이준이 한풀이를 하려는 듯 노래 사이사이에 폭주하는 랩을 많이 넣었다(물론 간주의 속사포 영어랩은 토익 고득점자나 현지인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듣기 쉽지 않다).

대중들에게 R&B라는 선물을 남기고 떠난 솔리드
 
 2018년 재결합한 솔리드는 <슈가맨2>에 출연해 변함 없는 인지도를 과시했다.

2018년 재결합한 솔리드는 <슈가맨2>에 출연해 변함 없는 인지도를 과시했다. ⓒ JTBC

 
솔리드는 1997년 4월 시인 원태연이 3곡의 작사에 참여한 4집 앨범을 발표했다. 솔리드는 4집에 <끝이 아니기를>이라는 R&B 명곡이 있었음에도 힙합 댄스곡 <끼리끼리>를 타이틀곡으로 정했고 H.O.T.와 이지훈, 양파, 언타이틀 등이 나오면서 2,3집과 같은 큰 사랑을 받지 못했다. 결국 한국에 R&B라는 장르를 전파했던 솔리드는 5년 동안 4장의 앨범만 발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부분의 인기그룹들은 해체 후에도 활발한 개인 활동을 이어가지만 솔리드는 김조한만 솔로가수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했을 뿐 이준과 정재윤은 사실상 국내에서의 활동을 접었다. 지난 2014년 <무한도전-토토가>에서 김조한이 전한 소식에 의하면 정재윤은 대만에서 프로듀서로 성공했고 이준은 미국에서 '<무한도전>의 존재도 모른 채' 부동산 사업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토토가>에도 출연하지 못했을 정도로 한국 가요계와 철저하게 담을 쌓고 살았던 솔리드는 지난 2018년 <슈가맨2>의 마지막회에 단독으로 출연해 두 곡의 슈가송(<이 밤의 끝을 잡고>, <천생연분>)을 불렀다. 약 25년 전 노래인 <이 밤의 끝을 잡고>가 86불을 얻은 것도 대단했지만 <천생연분>은 노래가 시작되기도 전에 전주만으로 100불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며 노래의 인기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솔리드는 <슈가맨2> 출연과 함께 정규 5집 앨범을 발표했고 복귀 콘서트는 예매 시작 5분 만에 전좌석이 매진되면서 솔리드의 건재를 실감했다. 사실 김조한을 제외하면 오랜 기간 현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솔리드가 현재의 젊은 대중들에게 큰 어필을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R&B라는 장르조차 생소하던 그 시절, 무대에서 수준 높은 '정통 R&B'를 들려주던 솔리드는 대중들에게 반가운 선물 같은 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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