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민-남주혁 주연의 영화 <조제> 포스터

한지민-남주혁 주연의 영화 <조제> 포스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사실 이렇게 말해버리고 끝내고 싶다.

"재미없는 영화가 길기까지 하다면 그건 돈 내고 입장한 관객을 향한 폭력 아닌가."

하지만, 세상 모든 걸 그렇게 단순하고 과격하게 해석할 수야 없는 일. 게다가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배우와 스태프들의 땀과 시간을 생각한다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99~1977)는 소설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출간하며 서두를 이렇게 쓴다.

'점잖고 교양 있는 한 중년 남성이 어린 여성에게 매혹당해 불행해진다. 이야기는 이게 끝이다. 그러나 소설은 시시콜콜한 설명이 필요한 장르. 독자를 위해 그가 불행해지는 과정을 아래 써볼까 한다.'

나도 나보코프의 심정으로 김종관이 연출한 영화 <조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이 영화는 일본 작가 다나베 세이코의 원작소설이 있고, 17년 전 제작된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리메이크다.

조제(한지민 분)는 다리가 불편해 걷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책읽기와 상상 속에서 산다. 스스로 지은 '조제'라는 이름도 프랑수와즈 사강(1935~2004)의 소설 속 등장인물. 우연한 계기로 비슷한 또래의 한 남자(남주혁 분)를 만난다. 그리고 누구나 예상 가능하듯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연민과 동정이 과도하게 섞인 젊은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짧은 동거가 끝나고 남자는 조제를 떠난다. 조제가 그 실연으로 인해 절망했을까?
 
 <조제>에서 섬세하고 결 고운 연기를 보여준 한지민.

<조제>에서 섬세하고 결 고운 연기를 보여준 한지민.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감독은 원작보다 나은 모작을 그리고자 했겠지만...

<조제>는 17년 전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에피소드들은 싹 덜어내고 우울하고 건조한 풍경만으로 일관한다.

그렇지만 스토리의 얼개, 조연들의 역할, 배경이 되는 가난한 동네, 마지막 장면까지는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 다른 게 있다면 조제를 연기하는 배우가 이케와키 치즈루(39)에서 한지민으로 바뀐 정도.

이런 모진 말은 가능하면 하지 않아야 되는데, 해야겠다. 김종관 감독은 분명 이전 일본 영화를 넘어서는 매력적인 리메이크작을 만들고 싶었을 터. 하지만 어림없다. 다소 과한 비유가 될 수 있겠으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본 '모나리자'라면 <조제>는 이를 흉내 내 어린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린 모사품이다."
 
 전작 <미쓰백>에 이어 <조제>에서도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 한지민.

전작 <미쓰백>에 이어 <조제>에서도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 한지민.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흉내 내기 급급한 연출력을 덮는 한지민의 연기

영화의 경우 원작을 뛰어넘는 리메이크작이 되려면 몇 가지 선결 조건이 있다. 일단 작품을 해석하는 시각이 심화·확장되어야겠고, 연출 기법까지 모방돼서는 안 되며, 모사하는 이전 영화와 다른 매력 한두 가지 정도는 갖춰야 한다. 그런데 <조제>에선 '좋은 리메이크 영화'의 요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연민과 현실 사이에 서서 갈등하는 남자의 행동 변화에는 맥락이 없고, 가능하면 메마르고 어둑신한 공간으로 카메라를 돌리는 연출에선 일본 원작과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저 힘겹게 프로 마라토너를 따라 뛰어가는 아마추어의 거친 호흡이 들릴 뿐. 그러니 '원본을 넘어서는 모사품의 매력'을 찾기는 당연지사 불가능한 일.

한 영화평론가는 "하나를 더할 이유는 못 찾겠다"라고 <조제>를 평했다. 내 의견도 비슷하다. '모나리자'는 모나리자만으로 멋진데, 뭘 하러 돈과 시간을 들여 제대로 모사하지도 못할 '또 다른 모나리자'를 그릴 것인가?

어떤 영화 앞에서건 편견을 버리고 냉혹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사람이지만, 너무 비난만 한 것 같다. <조제>가 가진 미덕 하나쯤은 이야기하고 마쳐야겠다.

한지민의 연기는 갈수록 좋아지는 듯하다. 데뷔할 땐 그저 깜찍하고 예쁜 배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전작 <미쓰백>에선 거칠게 폭발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더니, <조제>에선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우물 속에서 살아가는 발과 눈이 없는 물고기처럼 연기한다. 탁월하다고 할밖에.

홍상수의 영화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조제>는 '한지민의 힘'이 겨우겨우 구해내고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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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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