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이 여성 가수들에게 끌리고 여성들이 남성 가수를 좋아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마마무나 블랙핑크의 음악방송 사전녹화에는 여성팬들이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갓세븐이나 NCT 같은 보이그룹의 공연에서 남성들이 응원구호를 외치며 좋아하는 모습은 쉽게 접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남성들이 여성 가수들에게만 일방적인 사랑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과거 들국화나 시나위, N.EX.T 같은 록밴드들은 열성적인 남성팬들이 없었다면 존재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록스타들 외에도 이승환과 김동률, 박효신 같은 발라드 가수들 역시 의외로 남성팬층이 적지 않다(버즈의 민경훈이 군복무 시절 군인들의 떼창을 이끌어낸 전설의 공연 직캠은 지금도 동영상 사이트에서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다).

남자들이 발라드를 부르는 남자가수에게 심취하는 이유는 그들의 노래의 가사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의 히트곡은 남자들에게 '노래방 애창곡'이 되곤 한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남자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는 큰 인기를 얻었던 남자가수가 있었다. 바로 한국형 록발라드의 전성기를 열었던 '터프가이' 김정민이 그 주인공이다(물론 김정민은 그 시절 여성팬도 상당히 많았다).

2집 <슬픈 언약식>과 <마지막 약속>으로 연타석 홈런
 
 김정민은 1996년 한 해에만 <가요톱텐> 1위곡을 세 곡이나 배출했다.

김정민은 1996년 한 해에만 <가요톱텐> 1위곡을 세 곡이나 배출했다. ⓒ 엠케이두손코리아

 
1994년 청순가련 스타 이미연과 <사랑이 뭐길래>의 신애라, 떠오르는 신예였던 이종원과 김찬우 등이 출연했던 <세 남자 세 여자>(SBS)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사실 <세 남자 세 여자>는 대중들의 기억에 남을 만큼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드라마 삽입곡이었던 <그대 사랑 안에 머물러>는 드라마의 인기와 별개로 꽤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OST를 부른 가수가 바로 언더그라운드 록밴드 출신의 신인 김정민이었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와 핸섬한 외모로 주목 받았지만 사실 김정민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1994년은 고 장국영을 빼다 박은 '꽃미남' 김원준이 3집 <너 없는 동안>으로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여기에 '발라드 황제' 신승훈이 건재했고 매력적인 홍일점 멤버를 전면에 내세운 대형신인 투투와 룰라가 등장했으며 남자들의 우정을 노래했던 신성우의 <서시>도 남성팬들을 사로 잡았다.

하지만 1995년 김정민의 두 번째 앨범이 발매되면서 상황은 크게 반전됐다. 1집에서 고수했던 정장 스타일의 평범한 패션 대신 반항적인 가죽 재킷과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한 짧은 헤어스타일로 변신한 김정민은 신곡 <슬픈 언약식>을 통해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슬픈 언약식>은 1996년 겨울 KBS <가요톱텐>에서 이소라의 <난 행복해>를 제치고 정상에 올라 골든컵(5주 연속 1위)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무엇보다 화제가 됐던 것은 김정민의 독특한 창법이었다. 김정민은 1절 후렴구부터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2절 후렴구에선 목에 핏줄이 튀어 나오는 극단적인 샤우팅 창법으로 노래를 불렀다. 특히 고음파트인 "워워워~ 이렇게 입 맞추고 나면"을 부를 땐 목 전체가 빨개질 정도로 얼굴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스케줄을 생각하지 않은 듯한 김정민의 샤우팅은 후속곡 <마지막 약속>에서도 이어졌다. 사실 김정민의 노래들은 김종서나 김경호처럼 아주 높은 고음이나 넓은 음역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김정민의 노래들은 남자들이 노래방에서 부르기 최적화된 곡들이었다. 지금은 노래방에서 임재범의 <고해> 같은 곡을 고르면 대역죄인이 되지만 당시만 해도 남자들이 노래방에서 록발라드를 부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로커 출신의 훤칠한 발라드가수였던 김정민은 2집 앨범의 대히트를 통해 가요계를 대표하는 솔로 남자가수이자 '가요계의 터프가이'로 자리 잡았다. 록발라드가 가요계에서 본격적인 '주류'로 떠오른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1996년 10월 김정민은 2집 성공의 기세를 몰아 3집 앨범을 발표했다. 인기 작곡가 김형석이 전체 프로듀싱을 담당했고 훗날 플라워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고성진이 작곡가로 참여한 앨범이었다.

호랑이 3마리 재킷은 트릭, 감성충만 김정민 3집

김정민 3집은 황금색 호랑이 세 마리가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앨범 재킷부터 강렬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뒷면에는 매서운 눈매를 자랑하는 '터프가이' 김정민이 보인다. 음악을 들어보지 않으면 록밴드 출신의 발라드 가수가 다시 로커 시절로 돌아가 아주 강렬한 록음악으로 회귀한 앨범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렬하고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재킷 사진은 대중들에게 더 큰 반전을 주기 위한 일종의 '트릭'이었다. 김정민 3집은 히트곡을 제외하면 록성향의 노래들이 요소요소를 채웠던 2집과 달리 부드러운 노래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3집 타이틀곡은 2집의 <슬픈 언약식>의 작사가였던 박주연이 가사를 쓰고 고성진이 작곡한 <애인>이었다. <슬픈 언약식>이 세상에 축복받지 못하는 외로운 연인들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노래했다면 <애인>은 헤어진 연인에게 다시 한 번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의 노래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현악기를 많이 사용한 프로듀서 김형석의 편곡이 노래의 애절함을 더해준다.

3집 타이틀곡 <애인>은 KBS <가요톱텐>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변함없는 인기를 과시했다. 김정민은 1996년 한 해 동안 <슬픈 언약식>과 <마지막 약속>, <애인>으로 이어지는 세 곡으로 <가요톱텐>에서 무려 9번이나 정상을 차지했다. DJ DOC와 솔리드, R.ef 등 많은 가수들이 전성기를 달렸던 1996년 가요계에서 김정민보다 많은 1위 트로피를 가져간 가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김정민이 <애인>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을 때도 팬들 사이에는 김정민 3집에 <애인>을 능가하는 명곡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표적인 노래가 하해룡-고성진 콤비가 만든 후속곡 <무한지애>다.  <애인>이 부드러운 편곡과 애절한 가사로 여성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면 <무한지애>는 기타, 베이스, 드럼 등 밴드악기를 중심으로 편곡된 정통 록발라드로 남성팬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김정민은 <무한지애>로 활동하면서 무대에서 밴드와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다거나 큰 키를 이용해 스탠딩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등 다양한 무대연출로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물론 세상을 떠난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는 가사 내용 역시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 충분했다.

<애인>이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고 <무한지애>가 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였다면 남자들이 노래방에서 가장 애창했던 김정민 3집의 명곡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세 번째 타이틀로 잠시 활동했던 < Good-Bye My Friend >였다. 가사 내용은 큰 상관이 없지만 < Good-Bye My Friend >는 일찍 세상을 떠난 김정민의 친구를 추모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 Good-Bye My Friend >는 목숨처럼 아끼는 친구와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가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곡이다. 특히 '의리'로 똘똘 뭉친 가사가 그 시절 남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김정민 3집에는 원로가수 패티김의 명곡 <이별>의 리메이크 버전도 실려 있다. 김정민을 인기가수로 만들어 준 트레이드 마크인 '샤우팅 창법'을 잠시 내려 놓은 채 목에 힘을 빼고 차분하게 감정선을 따라 가는 김정민의 노련한 보컬이 인상적인 곡이다. 프로듀서 김형석이 작곡한 < Dreaming > 역시 김정민의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달달한 팝발라드 곡이다.

지난 7월 싱글앨범 발표... 현재진행형 가수 김정민
 
 김정민은 지난 6월 <복면가왕>에 출연해 건재한 실력을 뽐냈다.

김정민은 지난 6월 <복면가왕>에 출연해 건재한 실력을 뽐냈다. ⓒ MBC 화면 캡처

 
하지만 2집에서 전성기가 시작돼 3집에서 정점을 찍었던 김정민의 인기는 4집부터 조금씩 하향세를 그렸다. 물론 이는 김정민이 4집 앨범을 준비하는 사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아이돌 가수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민은 연예계에서 나름의 생존 방식을 찾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연기 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와 하정우의 출세작으로 유명한 <히트>에 출연해 연기자로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은 김정민은 2014-2015년에 걸쳐 방송되며 시청률 40%를 기록한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가족의 평화를 위해 줏대를 버린 허허실실맨 서중백을 연기했다('가요계의 터프가이' 시절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지난 1월 <슈가맨3>에 출연해 히트곡 메들리를 부르며 건재한 실력을 과시한 김정민은 지난 6월 <복면가왕>에서 Y2K의 <헤어진 후에>와 이덕진의 <내가 아는 한가지>, 이승철의 <말리꽃>을 부르며 가왕결정전까지 진출했다(하지만 상대가 무려 김연자였다). 지천명의 나이에도 여전히 강렬한 샤우팅 창법을 유지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김정민은 지난 7월 직접 작사에 참여한 싱글 앨범을 발표한 '현재진행형 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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