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에서 조제 역을 맡은 배우 한지민.

영화 <조제>에서 조제 역을 맡은 배우 한지민.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감정을 분출하고 말로 표현하든, 그 감정을 애써 꾹꾹 누르든 결국 어떻게든 드러나고 들키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말이다. 영화 속 캐릭터에 이를 빗대면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속 조제는 전자, 13년이 지나 한국 영화로 리메이크 한 <조제> 속 조제는 아마도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하반신을 못 쓰는 장애가 있는 여성, 세상과 소통하길 거부하며 때로는 괴팍하게 보이기도 하는 조제라는 캐릭터는 일본은 물론이고 국내 영화팬들 사이에서도 사랑받는 인물이다. 한지민에게도 그랬다. 이누도 잇신 감독이 연출한 원작을 '인생 멜로'라고 꼽을 정도로 애착이 있었다. 그리고 국내 리메이크를 책임질 김종관 감독을 만나게 됐다. 그렇게 한지민은 조제를 품게 됐다. 

원작의 무게감

<조제>의 중심인물은 원작에서처럼 두 남녀다. 휠체어에서 넘어진 조제를 우연히 발견한 영석(남주혁)은 묘한 끌림을 느끼며 조금씩 조제에게 다가가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원작에선 사랑이라는 감정의 파고, 두 인물의 매력 자체를 몽환적으로 표현했다면 <조제>는 두 사람과 그 주변인들, 사물을 밀도 높게 제시하며 둘 사이에 놓인 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한다. 

"원작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단 감독님의 전작을 재밌게 봐서 꼭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직접 만나서 여러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감독님이 그릴 조제와 제가 느낄 조제를 얘기했다. 원작에 한국적 색을 입히고 지금의 시점으로 각색하면 어떨까 하는 설렘이 생기더라. 가공하지 않은 민낯 그대로인 이야기라서 끌렸다. 감독님이 담고 싶어 하는 현실적 이야기와 맞닿을 수 있다면 제가 조제로 살아보고 싶었다."

한지민은 원작과의 비교는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작품에 참여하고 촬영하는 동안엔 그런 생각에 부담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이 표현하는 조제가 더 중요했다. 집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온갖 책을 섭렵하고, 위스키병을 모으는 조제를 한지민은 오로지 눈빛과 말투, 그리고 해당 인물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로 표현하려 했다.

원작 속 조제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격하게 감정을 내뱉고, 자기 멋대로인 조제가 아닌 시종일관 낮고 절제된 목소리다. 그래서 영석을 향해 "집에 오지마!"가 아닌 "더이상 오지 않는 게 좋겠어"라는 등 마치 책의 문장을 말하듯 하는 한지민의 조제가 그렇게 탄생할 수 있었다.

"원작의 조제는 그 사랑스러움이 겉으로 드러났지만 제가 표현하고자 한 조제는 말로 담아내기보단 눈빛 변화와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거로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다른 작품에선 문어체 대사가 있다면 감독님과 얘기하며 제게 편한 말로 바꿔왔는데 여기선 쓰인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조제라는 인물이 할머니와만 소통했고, 그 할머니와도 많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바깥으로 전달함에 있어서 분명히 책에 쓰인 문장 같은 느낌으로 할 것 같더라.

매 장면마다 산을 넘는 기분이었다.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제가 해야 할 게 정확했고, 대사를 뱉을 때만큼은 설령 그게 아닐지언정 제가 맞다는 확신으로 연기했다. 그런데 이번엔 물음표가 많았다. 비우고 덜 채우는 작업이라 그만큼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했다. 원작과 다른 점을 일부러 찾아내서 바꾼 건 아니다. 우리 영화 속 조제는 어릴 때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다. 그게 조제가 스스로를 자신만의 세계에 가둔 이유이기에 원작과는 조금 다른 외로움이 담긴 것 같다."

 
 영화 <조제> 관련 이미지.

영화 <조제> 관련 이미지.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이별의 이유보다 중요했던 내면 성장

한지민의 말대로 <조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등장인물의 표정들이다. 여기에 더해 공간에 스며드는 빛과 바람 등도 영화에서 주요하게 작용한다. 이에 비해 두 사람이 사랑하고 이별하는 이유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또다른 공간과 상황인 두 사람이 등장할 따름이다. 한지민 또한 "그 부분을 감독님께 가장 많이 물어봤다"고 말했다.

"꼭 남녀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기는 여러 변화가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계 변화는 분명 있거든. <조제>에선 사랑이라는 감정이 조제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영석이가 조제를 억지로 끌고 나온 게 아니라 관계를 통해 한 걸음 더 성장한 것이지. 

이별에 대해 끊임 없이 감독님께 질문했다. 그간 작품에선 제 캐릭터가 사랑하고 이별할 때 이유가 명확했거든. 헤어지는 과정이 급작스럽지 않을까 싶었는데 감독님이 그러셨다. 이별할 때 과연 나 자신에게도 솔직할 수 있을지, 이별 이유를 한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지 말이다. 엄청 나쁜 일을 했다는 등 명확한 경우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마음의 온도가 맞지 않으면 이별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듯 이별 이유도 여러가지겠다고 생각했다. 감독님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이기심이나 장애로 인한 현실적 부딪힘 등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한지민에게 <조제>는 일종의 성장 영화와도 같았다. 세상과 담을 쌓은 이가 사랑의 감정을 느낀 후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영화 후반부 조제가 딱 한 번 환하게 웃는 장면이 나온다. "마냥 행복해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나에게 생긴 변화에서 나온 웃음이라고 감독님이 주문했다. 복합적 감정이 눈에는 담겨 있고, 입으로는 크게 웃는 것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한지민은 촬영 당시 기억 일부를 전했다. 

"문득문득 조제는 잘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요즘도 한다. 작품이 끝나고 마음이 쓰이는 캐릭터로는 조제가 가장 진한 것 같다. 그만큼 조제가 세상 밖으로 용기있게 나왔다는 자체가 너무 좋았다. 지금까진 책으로 세상을 접했지만 앞으로는 어떤 단단함이 생겨서 낯설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뭔가를 표현해 내는 조제가 돼 있을 것 같다."
 
 영화 <조제>에서 조제 역을 맡은 배우 한지민.

영화 <조제>에서 조제 역을 맡은 배우 한지민.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사실 이 대목은 한지민 스스로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간 노희경 작가와 함께 법륜 스님 강좌를 들어오는 등 자신을 돌아보고 수련해 온 그는 "(영화 속 영석이 조제에게 그랬듯) 제가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게 한 분이 법륜 스님"이라 말했다. 20대 청춘 스타에서 30대 후반 이제 어떤 완숙미를 연기로 보이고 있는 한지민은 <조제>를 통해 20대의 터널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작가님과 법륜 스님을 만나며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지고 마음도 단단해졌고, 눈물도 적어졌다. 소속사 대표님은 배우로서 제가 좀 더 단단해지게 하고 전환점을 맞게 한 분이다. 뒷풀이 자리, 동료 배우와 교류가 적었던 저인데 대표님은 제가 가진 제 모습을 장점이라 했고, 사람들 사이에 절 던져놓고 싶어 했다. 이후에 저도 작품 선택하는 데에 용기를 더 낼 수 있게 됐다.

영화 <벌새>를 보면서도 느꼈는데 중학생 땐 그때가 젤 힘들다고 생각했었고, 고등학생 땐 수능 걱정을 했다. 그리고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될 것 같은데 취직을 고민하게 되잖나. 지금 이 순간에도 전 나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걸 지나면 그 어려웠던 과정이 경험치로 쌓여 마음에 굳은 살로 자리매김 하는 것 같다. 20대는 일단 고민하고 불안한 시기가 맞는 것 같다. 30대 되면 그 나이에 맞는 힘듦이 또 찾아오는데 청춘과 젊음만이 느낄 수 있는 고민과 에너지가 있다. 충분히 즐겼으면 좋겠다. 

전 20대에 제법 많은 작품을 했었지만 두려움도 컸다. 편하지 않은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꼭 조제 같았더라. 근데 그때만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감정이 있다. 즐기고 실컷 놀아보라고 하고 싶다. 나이 들어서 놀려고 하니 힘들다. 같이 놀 사람도 자꾸 없어지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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