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든: 세상을 바꾸는 힘> 포스터

영화 <버든: 세상을 바꾸는 힘> 포스터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평에 정치 얘기가 끼어들면 맥이 풀린다. 관객이나 독자가 영화를 그 자체로 수용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든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버든: 세상을 바꾸는 힘>(이하 <버든>)에는 2020년 미국의 정치지형과 관련한 직접적인 서사와 사건이 다수 포진한다. 다른 한편 <버든>에는 나름의 영화 미학과 주제도 공존한다.
 
영화는 첫머리에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적시한다. <버든>이 1996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로렌스 카운티에서 발생한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얘기다. 24년 전 미국 남부에서 일어난 사건과 갈등은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떻게 지금까지 파장을 전달하고 있는가. 실화의 힘과 감독의 상상력이 어떻게 결합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단출한 관계와 서사
 
가난하고 배움도 짧은 백인 노동자 마이크 버든이 싱글맘 주디의 집을 찾는다. 그녀가 갚지 못한 빚을 텔레비전으로 대납하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다.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고용주인 톰 그리핀에게 날마다 상납하는 버든. 외아들 프랭클린을 건사하면서 전남편에게 양육비 한 푼도 받아내지 못하고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주디.
 
거칠고 투박하며 건들거리는 버든이 주디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프랭클린은 자동차 경주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고, 그런 아이를 버든이 초대한다. 세 사람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척된다. 프랭클린의 절친인 두에인의 아버지 클래런스는 소싯적 버든의 절친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그들 사이의 벽은 냉랭하고 견고하다.
 
버든은 프랭클린이 흑인 소년 두에인과 어울리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주디는 그런 버든이 못마땅하다. 흑백의 피부 색깔에 편견과 거리낌이 없는 주디. 클래런스는 주디가 버든 같은 인종차별주의자와 교제하는 것이 탐탁지 않다. 하지만 남녀관계의 진척과 속성은 이념과 편견, 인종과 종교를 뛰어넘지 않던가?!
 
버든의 뒷배인 톰 그리핀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로렌스 카운티에 KKK단을 설립하고자 한다. 그는 낡아빠진 에코 극장에 '레드넥 KKK 박물관'을 개관한다. 버든이 개관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하는 것은 당연지사. 평화롭던 마을에 KKK단을 위한 박물관이 문을 열게 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는 긴장과 대결 분위기가 조성된다.
 
케네디 목사와 KKK단
  
 영화 <버든: 세상을 바꾸는 힘> 스틸 컷

영화 <버든: 세상을 바꾸는 힘> 스틸 컷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둥글둥글한 얼굴에 언제나 웃는 낯빛의 케네디 목사는 공정과 정의와 사랑을 전파하는 목회자다. 증오는 증오로 극복할 수 없으며, 가슴에 사랑을 품어야 증오를 이길 수 있다고 설교하는 케네디. 버든과 그리핀의 KKK단이 십자가에 불을 붙이고, 백인의 순수혈통과 조국, 하느님을 위해 싸운다고 고함 지르는 장면은 섬뜩하다.
 
교차 편집된 장면에서 케네디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들은 십자가에 불을 붙이겠지만, 우리는 사랑의 불을 피울 겁니다."
 
KKK단 박물관 앞에서 케네디는 비폭력 평화시위를 벌인다. 그들의 언어에 깃들어 있는 사랑과 평화 그리고 우애의 호소는 깊은 울림을 가진다. 버든에게 무한폭력을 당한 젊은이를 대신해서 흑인 시위대가 폭력에 호소하려 하자 케네디는 극구 만류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것은 구약의 얘기야. 예수는 그러지 않으셨다."
 
영화 <버든>의 절정은 시위대를 막아서는 케네디와 그를 겨냥하는 버든의 총구가 한 치 앞을 모른 채 치달리는 장면일 것이다. 살인하려는 자, 마이크 버든과 아무것도 모른 채 신의 뜻을 설파하는 인간, 케네디의 숨 막히는 대결.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
 
버든은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후원자 그리핀에게 자유롭지 못하다. 흐느적거리는 그의 걸음걸이도 부자유스럽고 어리숙하다. 그런 버든에게 주디는 KKK단과 사랑 가운데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쌓아온 인간관계와 물적 토대의 상실이냐,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인과 결별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岐路)에 직면하는 버든.
 
관객은 여기서 상투적인 해결방식과 마주한다. 영화에 신파적이거나 고답적인 면모를 부여하는 클리셰가 작동한다. 하지만 영화는 긴장과 대결 구도로 급변한다. 그리핀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과 버든의 강렬한 대결과 충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충돌과 긴장을 완화해주는 장치는 버든과 사슴의 관계다. 어린 시절 숲에서 사슴이 가까이 다가왔던 때를 회상하는 버든.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사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버든. 하지만 그때 아버지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는 얘기. 너무도 폭력적인 상황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알아차린 소년 버든.
 
그리핀의 억압과 야비함으로 인해 유리걸식하며 떠돌던 버든과 주디 곁으로 사슴이 다가온다. 사슴을 놀라게 해서 쫓아버리는 버든. 그것은 사슴을 살리고자 하는 버든의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버든은 예전과는 다른 얼굴로 사슴과 대면한다. 새로운 삶의 문으로 들어선 인간 버든의 모습이 뚜렷하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2020년 5월 25일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우리에게 미국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무장경관 데릭 쇼빈이 비무장 흑인 플로이드를 군홧발로 짓밟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 전역으로 인종차별주의 반대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2016년 대선에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백인 남성들의 몰표를 받은 트럼프는 시위를 방관하며 묵살(默殺)하는 자세를 취한다. 세계의 용광로이자 인종전시장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은 공중 분해된 상태다. 그런 배경에는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자리한다.
 
버든을 향한 주디의 말은 KKK단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리 할아버지도 KKK단이셨어. 하지만 그들이 짓누르고 억압하는 사람들은 우리만큼 약한 흑인들이야. 당신도 저들처럼 가난하고 못 배웠잖아. 당신 꼴을 봐."
 
<버든>은 평등과 정의, 공정의 길을 가야 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 그려내면서 미래를 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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