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당근마켓'에 갓난아기를 20만 원에 팔겠다는 게시글이 잠깐 올라왔다 사라졌다. 금세 삭제되어 많은 이들이 읽은 것 같지는 않으나, 몇몇 언론에 보도가 되는 바람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 게시글은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홀로 감당해온 여성의 참담한 현실을 보여준다.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어느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관련법 개정시한이 한 달 남짓 남은 시점에 이르렀다. 목하 낙태 관련해서 여성계는 물론 정계와 국회 안팎에서 주장과 시위와 대립이 혼란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만 겪는 일이 아니라며 안도할 일은 아니지만, 낙태를 둘러싼 혼란과 대립은 비단 한국만의 현실은 아니다. 전세계 공통의 현실이랄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Reversing Roe)>는, 그중에서 미국 사례를 다룬다. 러닝타임은 1시간 39분 40초.

'제인 로 케이스'란 1973년 미국에서 있었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가리킨다. 이는 낙태가 아직 정치적 문제가 아닌 의학적·사회적 문제였을 때, 연방대법원에서 7-2로 낙태 합법(Abortions Legal)을 선고한 판례다. 연방대법원에 정치적 보수를 표방하는 대법관들(전원 남성)이 주로 포진되어있었을 때에 나온 판결이었다.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의 한 장면. 스크린샷.

▲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의 한 장면. 스크린샷. ⓒ 넷플릭스

 
그런데, 그때로부터 미국에서는 그것을 뒤집기 위한 시도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는 낙태를 둘러싼 미국 정치인들의 움직임들에 주목한다. 먼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내에서 낙태가 갑자기 정치적 이슈로 부상했음을 지적한다.

공화당 정치인으로서 인기를 누렸던, 믿음직한 아버지 이미지의 레이건은 주지사였을 때 낙태허용법에 찬성을 표했었다. 그러나 1980년 대선이 시작되자 그는 낙태반대로 돌아섰다. 이 무렵 복음주의적 기독교계가 레이건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는데, 사실 기독교계는 내심 인종분리 정책을 추진해줄 보수적 후보가 필요했다. 그러나 인종분리 정책보다 낙태 이슈가 더 '핫'했고, 사회적 인정을 받기도 쉬웠다. 그래서 복음주의적 기독교계는 낙태반대운동을 표면에 내세워 지원했다. 낙태를 반대하는 대선후보를 공식으로 지지했다. 그 결과 레이건이 당선됐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 낙태가 대선결과를 판가름하는 현상이 또다시 재현됐다. 부시는 주지사 시절엔 매번 '낙태찬성(pro-choice)과 낙태반대(pro-life)를 포용한다'고 번번이 주장했었다. 그러나, 1992년 대선에 나서면서 그는 돌연 낙태반대로 돌아섰다. 그도 대통령이 되었다. 트럼프도 평소엔 낙태가 선택의 자유라며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막상 대선 레이스가 펼쳐지자 그는 낙태반대를 주장했다. 그도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2007년 연방대법원에서는 '가족계획협회 대 곤잘레스' 판결이 나왔다. '임신말기 부분출산 낙태절차'가 금지되었다. 어차피 20주가 지난 시기의 낙태율은 전체의 1.3%밖에 안 되는데도 굳이 금지조항을 집어넣어, 낙태에 부정적 이미지를 입혔다. 이 판결은 1973년 '로 케이스' 판결을 5:4로 뒤집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때 (보수적 대법관들 틈에서 열일하느라 "나는 반대한다"를 수시로 외쳐야 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에게서 "나는 반대한다"가 다시금 언급됐다. 그녀의 반대의견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이번 판결은 합법 낙태를 결의한 '로 케이스' 판결을 조금씩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라고···! 사실상 생명보호를 위한 판결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 2007년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나는 반대한다"로 의견을 낸 판사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 2007년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나는 반대한다"로 의견을 낸 판사 ⓒ 넷플릭스

 
'생명'은 딱히 보수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가치'다. 그 가치 때문에 나온 '낙태가 쉬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엔 일리가 없지 않다. 그렇지만, 낙태를 무조건 어렵게 하고 범죄시한다 해서 여성들이 낙태를 안 하게 되는 건 아니다. 낙태를 불허하고 범죄시해도 원치 않는 임신사건 자체가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낙태에 관한 한, 인과관계를 잘 연결해야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여성들은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임신중절을 하기로 결심한다. 시기를 놓치면 임신중절이 어려워지고 위험해진다는 걸 모르는 여성들은 없다. 일일이 법조항으로 정해주고 지키라 명령하지 않아도 (미국의 경우) 99%에 달하는 여성들이 이미 '어련히 알아서' 스스로 판단하고 조절해왔다.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의 한 장면. 여성들의 낙태비율을 설명하는 산부인과 의사.

▲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의 한 장면. 여성들의 낙태비율을 설명하는 산부인과 의사. ⓒ 넷플릭스

 
그런데 웬일인지 그걸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우리 사회나 미국 사회나 여성들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무분별한 임신이 무분별한 낙태를 낳는다고 본다. 낙태를 하려는 여성이 어차피 무분별하게 임신을 했기 때문 아니냐며 인과관계를 엮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물론 무분별한 임신을 하고 무분별한 낙태를 하려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많은 사람들은 낙태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고 결심한다. 심사숙고하는 사람들과 무분별한 사람들을 동급에 놓는 건 공정한 처사가 아니다.

다행히 이 다큐멘터리는 비교적 공정하게 전개된다. 낙태라는 이슈의 찬반 양쪽에 포진되어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공정하게 차례대로 보여준다. 낙태를 수술하는 병원이 사라져야 낙태가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들려준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강제로 중단시켜서는 안 된다고 절실히 기도하며 주장하는 신앙인들도 보여준다.

반면, 위생적이고 안전한 의술이 필요하다는 사명감을 갖고서 예민하고 까다로운 낙태수술을 집도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원치 않은 임신을 중지시키고 여성의 건강한 삶을 돌보는 데 목회적 돌봄을 제공해야 한다는 종교적 사명감을 지닌 신앙인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다큐멘터리가 끝나면, 골치는 아프지만 생각을 깊게 가져갈 수 있다.

하나의 사회적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를 통합적으로 두루 고찰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낙태가 만일 태아살해 범죄라면 그 범죄를 저지른 여성은 단독범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낙태수술을 해준 의사가 공범이냐고? 그 얘기가 아니다.

온 사회가 그 여성을 낙태하도록 몰아가는 점이 있다는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이기도 한데,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어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예컨대 악성댓글로 세상을 떠난 자살자는 스스로 자살하긴 했지만, 사실은 자살당한 거라고···. 마찬가지로, 만일 낙태가 범죄라면 그 범죄에는 바로 그렇게, 여성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따져보아야 할 지점들이 들어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생명을 걱정하며 낙태근절을 원한다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집단적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게 좋을 것 같다. 원치 않은 임신의 사례가 줄어들도록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여성에게 선택지를 주지도 않고, 혼자서 그 모든 걸 책임지는 게 맞다는 아이디어가 우리 사회에 지속된다면, 당근마켓 같은 사건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넷플릭스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 REVERSING ROE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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