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한 시대를 지배했다고 평가받는 팀에게는 '왕조'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성기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영원한 일등도, 영원한 승자도 없다'라는 격언처럼 세월의 흐름에 밀려 어떤 강팀들도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것이 역사였다.
한국프로야구에도 시대별로 몇 번의 왕조가 거쳐갔다. 많은 강팀들이 있었지만 특히 80-90년대를 지배한 해태 타이거즈(현 KIA),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를 호령했던 현대 유니콘스(해체후 현 키움 히어로즈로 재창단), 2000년대 후반의 SK 와이번스, 2000년대~2010년대 전반기를 지배한 삼성 라이온즈 정도가 왕조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대체로 이견이 없는 팀들이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올해까지 6년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각각 세 번의 우승과 준우승을 기록한 두산 베어스 왕조가 있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팀들도 언젠가는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순간이 있다.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와 세대교체 실패, 모기업의 재정 악화나 방향성 변화, 뜻밖의 변수와 사건사고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초대 왕조인 해태는 90년대 한국 사회를 강타한 IMF 구제금융 사태의 직격탄을 맞이했다. 원래부터 야구단에 대한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해태 그룹은 경영난까지 점점 악화되면서 90년대 중반부터 이미 선동열-이종범 같은 간판 선수들을 일본으로 진출시키고, 다른 주전급 선수들은 국내 타 구단에 현금 트레이드하여 구단 운영비를 충당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태는 1997년 9번째 우승을 끝으로 이후 마지막 3시즌은 8개구단중 5-7-6위에 그쳤다. 당시 해태의 사정을 감안하면 오히려 나름 선방한 성적이기는 하지만, 밥먹듯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던 해태의 황금시절을 지켜봐왔던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몰락이었다. 결국 2000시즌이 끝나고 나서는 이때까지 팀의 모든 우승을 함께하며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명장 김응용 감독도 삼성 라이온즈로 떠난다. 2001년 8월 해태제과가 기아자동차에 팀을 매각하면서 역사는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이어진다.
두 번째 왕조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유니콘스는 1996년 창단 하여 2007시즌을 끝으로 해체하기까지 약 12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에도 4회의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굵직한 역사를 남겼다. 현대그룹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스타급 선수들을 싹쓸이하며 막강한 전력을 구축했다. 당시 대기업 라이벌이자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과 함께 야구계의 몸값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현대그룹의 상황이 점차 악화되고 최대주주였던 현대전자가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로 인수되는 등 악재가 겹치며 모기업의 지원이 끊겼다. 2004년 마지막 우승 이후, 해태의 말기와 비슷하게 주축 선수들이 다른 구단으로 트레이드되어 빠져나가는 등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며 마지막 3시즌간 7-2-6위라는 롤러코스터 행보를 보인끝에 마치며 2008년 결국 해체됐다. 현대의 마지막 프런트와 선수단은 히어로즈가 승계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인수가 아닌 '해체후 재창단' 형식이었기 해태-KIA와 달리 현대 왕조 시절의 역사는 단절되고 말았다.
SK 와이번스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각각 3회의 우승과 준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김성근 시대였던 2007년 첫 우승부터 4시즌간의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야신'으로 한창 주가를 높이던 김성근 감독이 구단 프런트와의 고질적인 불화와 재계약 문제를 둘러싼 갈등 끝에 경질당하며 마지막은 파국으로 끝났다.
2010년대들어 정근우-정우람 등 우승 주역들이 하나둘씩 팀을 떠나거나 은퇴했고, 삼성-두산 등 새로운 강자들이 약진하며 SK는 자연히 왕조에서 밀려났다. SK는 일시적으로 중위권으로 내려앉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태나 현대처럼 팀이 급격히 몰락하지는 않았다.
이는 역대 왕조중 유일하게 모기업을 둘러싼 경영난이나 재정 문제가 없었던 사례라는 것도 관련이 있다. 2018년에는 메이저리그 출신 트레이 힐만 감독 체제에서 홈런군단으로 팀컬러를 재편하여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후반기부터 팀이 급격한 부진에 빠지며 2020년에는 10개구단 중 9위까지 추락하는 등 왕조 시절보다도 더 극심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우승과는 거리가 먼 팀이었지만, 김응용-선동열 체제에서 2000년대에 3번의 우승(2002,2005-06)을 차지한 1기, 류중일 감독 체제에서 한국시리즈 통합 4연패(2011-14)를 차지한 2기를 더하여 '21세기 최강의 왕조'로 군림했다. 초기에는 명장과 스타 선수들을 외부에서 끌어모아 '돈으로 우승을 샀다.'는 조롱을 듣기도 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체계적인 육성과 꾸준한 세대교체를 바탕으로 장기집권에 성공했다.
삼성은 2014년 스포츠단 운영이 제일기획으로 이관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과거처럼 성적을 내기 위하여 스포츠단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았다. 왕조의 주역이 되었던 선수들은 하나둘씩 다른 팀으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은퇴했다. 2015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주축 선수들이 도박파문에 연루되는 논란 끝에 통합 5연패에 실패한 것은 몰락의 시발점이 됐다.
삼성은 이듬해인 2016년부터 올해까지 5년연속 가을야구 진출조차 실패했는데, 이는 종전 3년 연속(1994-96)을 뛰어넘는 구단 역사상 최장 기록이다. 해태나 현대처럼 구단명 자체가 바뀔 정도의 상황보다는 낫지만, 구단의 최전성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최악의 암흑기가 도래했다는 점에서, 인생은 '화무십일홍' 새옹지마'라는 속담이 가장 어울리는 예시가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야구팬들은 이제 두산 베어스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다. 두산은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을 포함하여 2010년대에만 4번이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현 시대를 대표하는 왕조였다. 3~4년 연속 우승에도 성공했던 해태나 삼성의 전성기만큼 압도적인 면모는 조금 부족한 면도 있지만, 장기간 큰 기복없이 꾸준한 성적을 올렸다는 점에서는 두산을 따라올만한 팀을 찾기 쉽지 않다. 핵심 선수가 이적하거나 부진해도 항상 새로운 선수를 만들어낸다는 두산 특유의 '화수분야구'는 육성이 대세가 된 현대야구계에서 많은 구단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많은 야구팬들과 전문가들은 천하의 두산 왕조도 올해가 사실상 우승에 도전할 수 있었던 '라스트 댄스'였다는 전망이 많았다. 지난 25일 KBO가 공시한 2021년 자유계약선수(FA) 명단에는 은퇴한 권혁을 제외하고 두산 선수가 8명이나 된다. 최근 2년간 부진으로 핵심전력에서 밀려난 장원준을 빼더라도 나머지 7명(김재호, 오재일, 최주환, 허경민, 정수빈, 이용찬, 유희관)은 모두 두산의 우승주역들이다.
코로나19로 각 구단들의 지갑이 위축된 상황 속에서도 두산 선수들 중 상당수가 올해 FA시장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나온다. 두산은 양의지(NC)나 김현수(LG)같은 프랜차이즈스타조차도 떠나보냈을 만큼 전통적으로 내부 FA 선수들을 잡는데 인색한 편이었다. 여기에 두산은 올해 좋은 활약을 한 외국인 투수 라울 알칸타라와 크리스 플렉센, 타자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와의 재계약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두산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자 위기는, 모기업의 재정 악화다. 올 시즌 내내 구단 매각설에 시달렸던 두산은 2군 전용 훈련장인 이천 베어스파크를 담보로 긴급 대출까지 받았던 사실이 알려질 만큼 분위기가 심각하다. 두산 2군이 화수분의 원동력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동안 구단의 성공을 지탱하던 기본적인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두산은 구단 매각설은 계속 부정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을 잡는데 큰 돈을 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코치진도 김원형 전 투수코치가 SK 와이번스 새 감독으로 부임한 것을 비롯하여, 김민재-조인성-조성환 코치들이 모두 다른 팀으로 이직하며 코치진도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두산의 프랜차이즈스타 출신인 김태형 감독은 2015년부터 친정인 두산 지휘봉을 잡은 이래 지금까지는 매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하며 명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제는 팀이 재창단 수준의 갈림길에 놓이며, 우승도전보다도 '리빌딩과 세대교체'를 이끌어야하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김응용(해태,삼성→한화), 김성근(SK→한화), 김재박(현대→LG), 류중일(삼성→LG) 등 역대 왕조를 대표하던 명장들도 하나같이 실패했던 도전들이다. 두산 구단과 김태형 감독은 다가오는 2021년에 무너지는 왕조를 재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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