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런>.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두 배우 사라 폴슨과 키에라 앨런.

영화 <런>.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두 배우 사라 폴슨과 키에라 앨런.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도그마(Dogma)에 빠진 결정론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똑같은 것을 사용해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

복어의 피와 내장엔 치명적인 독이 들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자객들은 복어 피를 이웃나라 왕을 암살할 칼에 묻혔다. 진시황을 죽이러 간 형가(荊軻)가 그랬다. 하지만, 똑같은 독이 든 복어의 내장으로 요리사는 푸아그라보다 식감 좋은 요리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51%가 '감독의 예술'. 나머지 49%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건 배우의 역할이다. 최근 여성 주연이 영화의 스토리 전반을 이끌어 가는 영화 2편을 연이어 봤다. 그걸 보면서 '복어의 피와 내장'을 생각했다. 관객에게 독이 될 수도, 감각적 즐거움을 줄 수도 있는.
 
 <나이스 걸 라이크 유> 포스터.

<나이스 걸 라이크 유> 포스터. ⓒ ㈜영화사 빅

 
21세기, 이처럼 시대를 거스르는 영화가 개봉하는 게 '신기한 일'

먼저 '독'이 될 듯한 영화 이야기다. 크리스 라이델 연출, 루시 헤일 주연의 <나이스 걸 라이크 유>.

여기 한국의 부자와 고위 공무원들이 제 자식을 보내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미국 하버드대학을 나온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공부만 잘 한 게 아니다. 바이올린을 들어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과 '비발디의 겨울'을 연주하는 루시(루시 헤일 분).

정치·사회·예술 어떤 분야건 논쟁에서 지지 않는 지성에 매사 똑 부러지는 루시지만 단 하나의 약점이 있으니 성(性)에 관해 거의 무지하다는 것. 그로 인해 동거하던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루시는 결심한다.

"수학공식 외우듯 섹스에 관해 학습해 기필코 그걸 마스터 하리라." 그리고는 노트에 쓴다. 죽기 전에 해봐야 할 일을 적은 버킷 리스트와 유사한 '성생활 마스터플랜'을.

그런데 그게 '성매매업소 가보기' '자위기구 판매점 방문하기' '포르노배우와 인터뷰하기' 따위라니… 거기엔 여성과 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요즘 애들 말로 '1'도 없다.

거기다 그 유치한 루시의 '미래 계획'(?)을 따라가는 카메라 역시 중학교 영상반 수준으로 밋밋하고 뻔하다. 은유도 없고, 상징도 없으며, 심지어 맥락도 없다.

대체 21세기에 이런 영화를 대놓고 만드는 감독의 배짱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가 궁금할 정도. 여성 배우로 하여금 화장실 거울을 보며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슬랭(Slang)을 거듭 외치게 만드는 연출은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힐 정도.

세상은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니 뭘 모르면 침묵하는 것이 마주한 다른 사람에 대한 도리고 예의다. <나이스 걸 라이크 유>의 감독 크리스 라이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 분명하다. 카메라 들고 찍어 극장에서 개봉한다고, 그게 모두 '영화'는 아닐 터인데.
 
 <런> 포스터.

<런> 포스터.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두 여성을 통해 '모성의 신화(神話)'를 전복하는 신선한 발상

이제 '감각적 즐거움'을 준 작품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다.

<런>(도망쳐)이라는 간명하면서도 수많은 의미를 내포한 제목을 가진 영화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칭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건 재론의 여지없이 두 명의 여성 배우다. 사라 폴슨(엄마 셔먼 역)과 키에라 앨런(딸 클로이 역).

우리는 쉽게 말한다. "모성(母性)은 위대하다. 왜냐? 어머니의 사랑은 대가와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과연 그럴까? 결국 엄마도 욕망에 흔들리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인데.

태어날 때부터 천식과 피부 발진, 당뇨와 전신 마비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가졌던 딸. 자그마치 17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엄마는 딸만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산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인 투약 시간을 꼼꼼히 체크해주고, 식이요법에 맞춘 식단을 준비하며 재활운동을 조력하는 것까지… 그런데, 이게 뭐지? 영화의 중반. 감독과 두 배우는 관객의 뒤통수를 망치로 때린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다.

<런>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불변의 가치처럼 숭배 받던 '모성의 신화'를 드라마틱하고 스릴감 넘치게 뒤집어버린다. 영화를 연출한 아니쉬 차칸티가 관객들에게 냉소적으로 묻는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욕망을 자의적으로 거세한 자식을 위한 희생양이라고? 과연 그럴까? 네가 아는 그게 정말 진실일까?"

감독의 연출력에 힘을 더해주는 건 엄마 역을 맡은 사라 폴슨의 광기 어린 연기와 딸 역의 키에라 앨런이 보인 나이답지 않은 차분함이다. 둘은 영화라는 예술 장르가 지닌 '동일화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어떤 영화평론가 하나가 <런>을 크리틱하며 "끝까지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고 했다. 어지간해선 남의 말에 맞장구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이 말엔 동의한다.
그리고 이제 결론. 심플하다.

<나이스 걸 라이크 유>는 피해가고, <런>은 봐라. 앞서도 말했지만, 복어의 피와 내장은 독이 될 수도, 감각적 즐거움을 선물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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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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