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즈 갬빗> 관련 이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스 갬빗>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1950년대 말, 켄터키의 한 고아원에 맡겨지는 '베스 하먼(안야 테일러조이)'. 체스 게임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고, 침울하며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고아였다. 그러나 주 정부가 고아원에 공급한 진통제에 중독되면서 베스는 체스에 대한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고아원 관리인 '사이빌(빌 캠프)'로부터 체스를 배우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주도하는 삶을 경험한다.

이후 새로운 가정에 입양되었지만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던 그녀는 체스 대회에 나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함에 따라 안정감을 되찾는다. US 오픈에서 경쟁할 정도로 체스에 눈을 뜬 후 남성으로 가득한 프로 체스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프로 무대에서 경력이 쌓일수록 진통제의 부작용이 심해지고, 더욱 고독해진 그녀는 체스 경쟁에서 손을 떼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스 갬빗>의 제목은 체스 게임을 시작하는 여러 전략 중 하나인 '퀸즈 갬빗(Queen's Gambit)'과 동일한 용어다. 퀸즈 갬빗은 백이 폰 하나를 잠시 희생해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수를 뜻한다. 이 수의 가장 큰 특징은 뛰어난 체스 선수들의 그랜드 마스터 레벨에서 사용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는 점이다.

작중 조력자인 '베니(토머스 브로디생스터)'는 베스에게 변칙보다는 원래 네가 좋아하고 잘 두는 퀸즈 갬빗을 사용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바꿔 말해 퀸즈 갬빗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선택지이지만, 그럼에도 이득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효과적인 오프닝인 것이다. 퀸즈 갬빗의 이러한 전략적 특성은 익숙한 구조와 형식임에도 시청자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 드라마의 매력과도 일맥상통한다.  

스포츠물의 흥행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퀸스 갬빗>은 주인공의 천재적인 능력을 눈치채는 평범한 스승부터 조력자가 된 라이벌, 애정을 주지 않는 양아버지까지 각종 클리셰로 가득하다.

주인공인 베스의 특징도 마찬가지다. 사고로 친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며 정신적으로 학대받은 아이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능력을 깨닫거나, 양아버지에게 무시당하고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내용은 <스타워즈>나 <해리포터> 같은 작품에서 접할 수 있다. 단지 카리스마, 퇴폐미, 섹시함, 천진함, 냉철함 등 다양한 면모를 자유로이 표현하는 안야 테일러조이의 매력적인 마스크와 안정적인 연기력이 차별성을 확보할 뿐이다. 

'영웅의 여정 12단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즈 갬빗> 관련 이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스 갬빗>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전체적인 구성도 전형적이다. 총 7개의 에피소드가 다루는 내용을 보면 우선 첫 두 개의 에피소드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체스 능력을 깨닫는 베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3, 4회는 세상에 자신의 능력을 처음으로 보여준 후 새로운 삶을 즐기는 모습을, 5, 6회에서는 그녀가 보르고프라는 강자에게 패한 후 체스 경기 내외적으로 어떻게 심연에 빠져들어서 어려움을 겪는지 묘사한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자신감을 되찾은 베스가 세계 최고의 체스 선수가 되기까지를 담는다. 이러한 전개는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인 크리스토프 보글러가 조지프 캠벨의 영웅 신화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한 '영웅의 여정 12단계'와 완벽히 들어맞는다. 따라서 <퀸스 갬빗>은 일정 수준의 재미를 보장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공식에 충실한 작품이다. 

그런데도 <퀸스 갬빗>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포인트를 제시하면서 한 번에 정주행 하고 싶은 욕구를 돋우는 데 성공한다. 그 매력은 바로 1950년대 말부터 1970년 초중반까지를 다루는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한다. 이 당시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 모든 사회 영역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셜 플랜, 베를린 포위 같은 정치·경제적 대립은 물론, 6.25 전쟁 및 베트남 전쟁처럼 물리적인 충돌도 있었다. 더 나아가 우주에서도 미국과 소련은 경쟁을 이어 나갔다. 

드라마는 시대적 배경을 적극 활용한다. 우선 주요 소재인 체스 게임을 단순한 스포츠 이상으로 다루며, 그로부터 강렬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최종적으로 꺾어야 하는 상대가 소련의 체스 챔피언인 보르고프로 설정된 순간부터 체스 게임은 체제 대결, 정치적 대결의 의미를 지닌다.

모스크바에서 마지막 대회가 열리는 것, 해당 시합장의 분위기가 공산국가 특유의 칙칙한 무채색으로 연출되는 것, 소련 선수와 미국 선수 가릴 것 없이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고안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덕분에 <퀸스 갬빗> 속 체스 게임은 단순한 스포츠물이 아니라 마치 첩보 영화의 미션 수행 장면을 보는 듯한 같은 비장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선사할 수 있다. 

동시에 드라마는 국가적 경쟁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개인의 의사나 행복은 공동체의 이익보다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꼬집는다. 고아원에 남겨진 아이들의 불우한 성장환경과 아이들을 쉽게 통제하기 위해 남용된 약물은 당시의 시대상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장치다.

약물에 중독되어 뛰어난 체스 능력을 얻었지만 부작용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는 베스가 어릴 적부터 체스 선수로 훈련받은 소련 선수와 대화하는 장면도 다르지 않다. 사회 전체의 폭력으로 인해 체제와 관계없이 피해자가 나올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체스 게임에 베스가 겪어야 했던 극심한 고독함과 우울증 같은 개인의 어려움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2세대 페미니즘의 태동

또한 냉전이 격화되던 해당 시기에 2세대 페미니즘이 태동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문제의식은 또 다른 측면에서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당시 페미니즘 담론은 가부장제를 비롯한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고발하는 데 집중했고, 일부에서는 섹스가 남성 지배의 수단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오락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드라마가 양아버지의 무관심 때문에 체스 대회에서 생활금을 벌어야 했고, 어머니는 술과 피아노에 의존한 채 어렵게 살아야 했던 그녀의 가정사를 비교적 세심히 표현하는 이유다. 또한 남성으로 가득한 체스판에서 홍일점인 베스의 특출함이 유독 빛나고 그녀가 여러 남성들과 즐기는 사랑 게임이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드라마는 개인이 경험하는 억압과 특권은 인종과 계층 같은 여러 특성이 중첩되며 상호 작용한다고 주장하는 최근의 페미니즘 흐름도 담아내면서 시간적 배경을 현재에 가까운 방향으로 확장한다. 베스의 친구 '졸린(모지스 잉그럼)'이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일을 하는 데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한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결국 <퀸스 갬빗>은 체스를 통해 한 시대와 그 시대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을 조명하되 제목처럼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스포츠물의 클리셰와 영웅 신화의 구조를 착실히 따르는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체스 그 자체보다 주인공을 중심에 배치해 그녀의 내적의 변화와 성장에 더 초점을 맞춘 결과 고유한 특색을 찾아낸 것이다.

약물에 의존하던 미국의 여성 체스 선수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시합에서 친구와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약물 없이도 승리하는 수를 떠올리는 데 성공한, 작품의 문제의식이 한데 집약된 바로 그 순간 일어나는 전율을 잊을 수 없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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