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론> 영화 포스터

▲ <얼론> 영화 포스터 ⓒ (주)안다미로


갑작스럽게 발발한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변하면서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집 안에 홀로 갇힌 신세가 된 에이든(타일러 포시 분)은 전염병에 걸려 쉴 새 없이 공격하는 이웃들로 인한 두려움과 더는 정상적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외로움에 점점 지쳐간다. 희망을 잃어버린 에이든이 죽음을 결심한 순간, 건너편 아파트에 있는 또 다른 생존자 에바(섬머 스피로 분)를 발견한다.

조니 마틴이 감독한 영화 <얼론>은 유아인과 박신혜가 주연으로 분하고 조일형 감독이 연출한 우리나라 영화 <#살아있다>(2020)와 동일한 시나리오로 제작된 작품이다. 시나리오 작가 맷 네일러가 쓴 각본 <얼론>의 미국판 각색 작업에 참여했던 조일형 감독은 각본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한국판의 연출을 맡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 <#살아있다>의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얼론>과 <#살아있다>는 리메이크의 관계가 아닌, 하나의 시나리오에서 파생된 두 가지 판본인 셈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얼론>과 <#살아있다>는 원인불명의 상황에 처하여 고립된 인물의 이야기란 뼈대는 같되 살은 국가와 문화적 차이에 맞추어 다르게 붙여졌다. 캐릭터의 배경, 공간의 설정, 디지털 환경, 공권력의 존재 유무 등 여러 변화 가운데 가장 확연하게 다른 건 남녀 주인공의 관계 설정이다.

맷 네일러의 각본을 그대로 따른 <얼론>은 에이든과 에바의 관계를 러브 라인으로 발전시킨다. 이와 달리 <#살아있다>의 준우(유아인 분)와 유빈(박신혜 분)은 함께 상황을 극복하고 희망을 꿈꾸는 파트너로 그려진다. <엑시트>(2019)의 남녀 주인공의 관계처럼 말이다.
 
<얼론> 영화의 한 장면

▲ <얼론> 영화의 한 장면 ⓒ (주)안다미로


그렇다면 원래 시나리오에 충실한 <얼론>만의 장점은 무엇일까? 장르물의 공식을 깬다는 것이다. <얼론>엔 영웅이 없다. 주인공 에이든은 위기를 극복하는 능동적인 인물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익숙한 공간이 공포로 가득한 곳으로 바뀌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수동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그는 한정된 공간 속에 갇힌, 아니 스스로 가둬버린 채로 가만히 있을 뿐이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워킹 데드 나잇>(2018)과 비슷한 설정을 공유하고 있기에 비교해봄직한 구석이 많다.

감염자의 묘사는 단연 파격적이다. <얼론>의 외피는 언뜻 보면 좀비물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인 좀비와 거리가 멀다. 영화는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강한 폭력성을 드러내고 보통 식인 행위를 일삼는 감염자들에게 낮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추었고 약간이나마 인간 시절의 기억이 있다고 설정한다. <#살아있다>는 장르의 재미를 위해 이 부분을 포기했다. 지능을 갖춘 좀비는 <랜드 오브 데드>(2005), <웜 바디스>(2013), <기묘한 가족>(2018)에서 개별로 다뤄진 바 있지만, 다수로 묘사한 건 <얼론>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감염자들은 환기구를 타고 이동하는 영리한 모습을 보여준다. "죽여줘", "내 말 들어", "조용히 해" 같은 단순한 문장을 내뱉기도 한다. 마치 좀비이기보단 식인 풍습을 즐기는 야만인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것은 혐오와 차별, 분노와 광기를 표출하는 미국 사회의 '문명화된 야만'에 맞서는 남녀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얼론>은 <캐스트 어웨이>(2001), <김씨 표류기>(2009), <127 시간>(2011), <터널>(2017>과 마찬가지로 1인극에 가깝다. 극의 대부분을 에이든 혼자서 책임진다. 그런데 영화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든 이는 에이든이 아니다.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고 우리에겐 <헝거게임> 시리즈 속 스노우 대통령으로 친숙한 할리우드의 연기파 배우 도날드 서덜랜드는 의문의 인물인 에드워드로 분해 15분 남짓한 짧은 출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존재감을 발산한다.
 
<얼론> 영화의 한 장면

▲ <얼론> 영화의 한 장면 ⓒ (주)안다미로


<얼론>은 형제 관계와 다름없는 <#살아있다>에 비해 캐릭터 묘사와 장르로서의 매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살아있다>의 준우는 드론을 활용하고 게임 등 주로 온라인 세계에 빠져 사는 등 오늘날 디지털 세대를 대표한다. 반면에 에이든은 서핑을 좋아한다는 것 외에 다른 설정이나 배경이 나오질 않는다. 당연히 캐릭터는 평면적인 수준에 머문다.

저예산인 관계로 감염자의 분장이나 움직임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현대무용의 예표승 안무가가 좀비들의 몸동작을 구성하고 <부산행>(2016)과 <반도>(2020)에 참여한 황효균 특수 분장 감독이 분장과 비주얼을 맡은 <#살아있다>와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좀비 장르의 애호가 또는 <#살아있다>와 비교를 하고 싶은 분이라면 <얼론>의 감상을 권하겠다. 혹여 두 영화를 모두 안 보았다면 <#살아있다>를 보길 추천하고 싶다. <#살아있다>는 <얼론>의 원작 시나리오보다 캐릭터를 폭넓게 개발하고 '고독'과 '소통'의 범위를 더 흥미롭게 해석한 버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출, 촬영, 특수효과, 연기 등 모든 면에서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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