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꾼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제훈·조우진·신혜선·임원희 주연의 범죄영화 <도굴>에는 문화재 악당을 대표하는 상길(송영창 분)이 등장한다. 상길은 철통같은 이중·삼중의 비밀 창고에 값비싼 문화재들을 은닉해놓고 흐뭇함을 느낀다.

고대 이래로 인류가 영화 속의 상길처럼 문화재에 높은 가치를 매기는 동기 중 하나는 그 상당수가 신성한 왕실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 있다. 문화재는 그 자체로도 금전적 가치가 있지만, 사료(역사 기록물)처럼 문자를 담은 경우에는 왕실의 기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가치를 갖는다.
 
문화재에 담긴 정보는 특정 왕실이 과거에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를 분석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는 왕실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이런 이유에서도 문화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된다.
 
외국 침략군들이 문화재 도굴에 뛰어든 까닭
 
 영화 <도굴>

영화 <도굴> ⓒ CJ엔터테인먼트

 
외국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가 사료를 지키기 힘든 것도 그 때문이다. 전쟁에 수반되는 파괴 행위 때문에 자연적으로 훼손되는 경우도 있지만, 문화재에 담긴 정보를 얻고자 하는 침략군의 의도적 약탈로 인해서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고구려 역사를 기록한 <유기> 100권도 그랬다. <유기>는 서기 3세기의 위나라(조위) 장군인 관구검의 침략으로 사라졌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동명성제·대무신왕 때에 사관(史官)이 조선 상고시대부터 고구려 초반까지의 정치적 사실을 기록하여 <유기>라 명명했는데 100권이었다. 하지만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략으로 약탈당하고 말았다. 단군왕검의 이름과 삼한·부여의 역사가 <위서>에 모두 실린 것은 위나라 사람들이 <유기>에서 그런 내용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건축물은 부수고 불태우면서도 외규장각의 귀중 문헌들만큼은 조심스레 반출해갔다.
 
<도굴> 주인공인 강동구(이제훈)는 상길에 대한 원한을 갚을 목적으로도 문화재 도굴 무대에 뛰어들었지만, 동구의 동기 중 상당부분은 금전과 관련된 것이다. 엄밀히 말해 도굴범과 다를 바 없는 외국 침략군들은 동구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동기로 문화재 약탈에 뛰어들었다. 상대국의 비밀을 알아내고 행동 패턴을 포착하는 것도 그들의 목적 중 하나였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인체는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된다. 그래서 10세 때의 신체와 40세 때의 신체는 사실상 전혀 다른 물질적 토대 위에 서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10세 때의 자신과 40세 때의 자신을 동일인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기억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만약 과거를 조금도 기억할 수 없다면, 과거의 자신을 지금의 자신과 동일인으로 인식하기 힘들 것이다.
 
문자 형태이건 아니건 문화재는 사회 구성원들이 동일한 기억을 갖고 일체감을 느끼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 문화재를 접촉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회 전체는 공통의 기억과 정체성을 갖게 된다.
 
침략자들이 외국 문화재에 욕심을 내는 이유 중 하나도 거기에 있다. 정복하고자 하는 국가의 문화재를 거의 대부분 입수하게 되면, 그 나라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입력하는 것이 개념상 가능해진다. 외국 문화재를 확보하게 되면 외국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그만큼 수월해지게 된다.
 
그래서 문화재를 가져가는 것은 곧 기억을 가져가는 것이고, 기억을 가져가는 것은 곧 국가 공동체를 없애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라가 약해지거나 멸망하게 되면 문화재를 지킬 힘도 자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는 침략국과 그 국민들에 의한 체계적인 문화재 약탈이나 도굴 혹은 반출이 횡행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도굴>에서 언급된 오구라 컬렉션의 실체
 
 영화 <도굴> 스틸컷

영화 <도굴>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오구라 컬렉션'은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국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준다. 이 소장품 수집자인 오구라 다케노스케(1870~1964)가 컬렉션이라 불릴 만큼의 대규모 문화재를 식민지 한국에서 모을 수 있었던 최대 원동력은 다름 아닌 일본제국주의의 힘이었다. 일제의 한국 강점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오구라 컬렉션이란 말 자체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하면 '작은 창고'를 뜻하는 소창(小倉)이란 한자로 표기되는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의 별명은 전기왕이었다.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24세 때인 1904년 경부철도 대구출장소로 발령받아 한국에 정착한 오구라가 그 별명을 갖게 된 이유에 관해 2018년에 <동양사학연구> 제145집에 실린 이형식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의 논문 '조선의 전기왕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조선사회'는 이렇게 설명한다.
 
"1909년 지역 자본가들과 공동으로 전기 사업에 출원해서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얻어 대구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18년에는 회령전기를 설립하고 같은 해 함흥전기를 합병하여 대흥전기를 설립해 사업 규모를 확대했다."
 
샐러리맨으로 한국에 온 그가 29세에 큰 사업을 경영하게 되고 대구뿐 아니라 함경도까지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총독부의 지원 덕분이었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또 지역 금융업에도 진출하여 남선은행·대구상공은행의 두취(頭取, 은행장)에 취임하여 풍부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지방의 전기회사를 공격적으로 매수했다. 조선총독부·조선은행·조선식산은행의 비호를 받으면서 2168만 3000원의 자본금을 가진 남선합동전기의 사장을 시작으로 북선합동전기 사장 및 조선전력회사 사장에 취임함으로써 '조선의 전기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남선(남조선)과 북선(북조선)의 전기 사업을 총괄하게 됐으니 '조선의 전기왕'으로 불릴 만도 했다. 그렇게 축적한 자본을 발판으로 오구라는 미술품 수집에도 정력적으로 뛰어들었다. '작은 창고'에 미술품을 담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도굴>에서도 언급되는 '오구라 컬렉션'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됐다.

8.15 해방 뒤 밀반출 된 문화재들
 
오구라가 문화재 수집에 뛰어든 것은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52세 혹은 53세 때인 1922년이나 1923년부터다. 위 논문은 "오구라가 미술 골동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선에서의 '발굴 붐', '도굴 붐'과 무관하지 않을 것"라며 "1920년대 들어와 양산 부부총(1920), 경주 금관총(1921), 달성군 고분(1923) 등에서 많은 수의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면서 고적 조사에 대한 관심이 일반인들까지 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오구라의 '작은 창고'에 담긴 문화재들은 고도의 가치를 갖는 것들이었다. 오늘날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수집품만 봐도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 작년에 <아세아연구> 제62권 제2호에 실린 엄태봉 대진대 강의교수의 논문 '북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는 현재 공개돼 있는 오구라 컬레션의 면면을 이렇게 요약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재 도쿄박물관에 소장된 오구라 컬렉션의 총 건수는 1110건이며 그중 고고 자료가 590건이고 대부분이 한국 관련 문화재다. 이 중 중요문화재와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것이 각각 8점, 31점이다. 그리고 고고유물, 불교 조각, 금속공예, 목공예·지공예, 도자, 회화, 전적(서적)·서예, 복식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으며, 낙랑 관련 유물은 선사시대 유물, 삼국시대의 고분 출토품·기와류, 통일신라시대(남북국시대)의 금속공예·토기·기와와 함께 고고유물에 포함되어 있다."
 
 영화 <도굴> 스틸 컷

영화 <도굴> 스틸 컷 ⓒ CJ 엔터테인먼트

 
8·15 해방 뒤 일본인 재력가들은 재산 반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개중에는 일본으로 몰래 옮기다가 붙들리는 이들도 있었다. 오구라도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됐다. 위의 이형식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오구라는 지금까지 수집했던 막대한 귀중품과 미술품을 일본으로 밀반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고미술품의 일부는 과수원을 하는 최창섭에 맡겨 훗날을 도모했고, 컬렉션의 일부는 대구부에 헌납하기도 했다. 8·15 이후의 혼란한 틈을 타서 지금까지 수집했던 귀중품과 미술품을 재빨리 일본으로 반출하려다가 저지되기도 했다."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오구라는 다른 일본인들에 비하면 꽤 기민한 편이었다. 일본인 재산을 동결하는 군정청 포고가 있은 지 얼마 뒤 그는 행동에 나섰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오구라는 군정청 포고가 있은 지 불과 1주일도 안 되어 300톤의 작은 배에 몸을 싣고 1만 엔을 휴대하고 조선을 몰래 급히 떠났다. 1945년 12월 부산의 3거두 혹은 4거두 소리를 듣던 가시이, 오이케 주스케, 하자마 후사타로 등이 주식·채권·보험증서 등을 숨겨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해안경찰에 체포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발 빠른 밀항이었다."
 
이 같은 성공적인 밀반출 뒤에 그의 수집품들은 오구라컬렉션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1956년 조선에서 가져온 골동품은 나라시야에 건설한 창고에 수장하고, 그곳에 재단법인 오구라컬렉션보장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해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9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오구라가 문화재 확보에 투입한 자금은 오로지 그의 노력만으로 생긴 게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인들을 착취하는 조선총독부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가 문화재 입수에 투자한 돈은 결국 한국인들의 돈이었다. 그는 한국인들의 돈으로 '작은 창고'에 막대한 양의 문화재를 담았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를 8·15 해방 뒤에 밀반출했다.
 
오구라가 가져간 것은 한국인들의 '기억'이다. 한국의 기억이 불법적으로 밀반출된 것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한국인들이 '우리'라는 관념을 갖게 만드는 '기억'들이 오구라 컬렉션을 이루고 있다.
 
한국인들의 돈으로 사들인 것을 한국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반출했기 때문에 오구라컬렉션은 도굴품과 다름없다. 그의 수집 행위도 도굴과 진배없다. 오구라 컬렉션이 원래 위치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한국인들은 자신에 관한 완전한 기억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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