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히 하고 싶은데요. 상대방이 사기와 불법 투표를 환영한다고 주장하시는데,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면 시청자들께 이 영상을 좋게 보여드릴 수가 없네요. (백악관) 이들이 주장의 근거를 가져오면 다시 방송을 내보낼 순 있겠습니다."

지난 4년 '친 트럼프' 기조를 이어가던 폭스뉴스마저 백악관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 9일(현지시각) 닐 카부토 폭스뉴스 부사장 겸 앵커가 이 같은 사실을 재확인시켰다. 이날 케일리 매커내니 백악관 대변인의 기자회견을 생중계하던 닐 카부토가 위와 같이 중계를 중단하면서다.

당시 케일리 대변인이 "우리는 모든 불법적 투표를..."이라며 예의 그 '부정선거', '선거사기' 주장을 이어가던 참이었다. 앞서 미 트럼프 선거캠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케일리 대변인은 "민주당이 참관인을 개표과정에서 제외하려 한다"며 기존 주장을 반복한 바 있다.

여기서 방점은 폭스뉴스 '마저'에 찍힌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앞서 지난 5일 미 주요 언론들은 메인뉴스 시간에 맞춰 기자회견장 카메라 앞에 선 트럼프 대통령의 생중계 화면을 가차 없이 중단하거나 중계 직후 강하게 반박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역시나 트럼프 대통령의 '부정선거' 주장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당시 CNN 제이크 태퍼 앵커는 "추하다. 솔직히 말해 한심하다"라고 직격탄을 날렸고, 레스터 홀트 NBC 앵커는 "대통령이 다수의 허위 주장을 발언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중계를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CNN 앤더슨 쿠퍼 앵커는 트럼프를 향해 "뜨거운 태양 아래 발버둥 치는 뚱뚱한 거북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반면 트럼프의 기자회견을 끝까지 전한 뒤 비판에 동참했던 폭스뉴스조차 백악관 대변인의 반복된 주장은 참지 못했던 것이다. CNN, NBC 등 '트럼프와의 전쟁'을 벌여왔던 방송사들과 달리 '트럼프와의 밀월'을 즐겨왔던 '폭스'로서는 확실히 이례적인 대처가 아닐 수 없었다.

 
미 대선일에 선거대책본부 방문한 트럼프 미국 대선일인 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선거대책본부를 방문해 발언하고 있다.

▲ 미 대선일에 선거대책본부 방문한 트럼프 미국 대선일인 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선거대책본부를 방문해 발언하고 있다. ⓒ 알링턴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가짜뉴스'성 발언을 솎아 내는 미 방송사들의 이러한 '손절'을 두고 호의적인 평가가 잇따랐다. 이번 미 대선을 거치며 '미국 민주주의의 몰락'이란 평가가 적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트럼프 기자회견 생중계 중단'을 실행해 옮긴 미 주요 방송사들의 이런 대처에 대해 '미국 언론만큼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직 백악관에서 퇴거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을 향해 방송사 앵커가 실시간으로 "추하다", "한심하다', "허위 사실을 주장한다"고 반박한 뒤 '팩트체크'에 돌입하는 뉴스 속 풍경은 놀랍다. 반면 우리네 풍경은 어떠한가. CNN 앵커가 백악관 대변인의 주장을 돌려세우던 9일, KBS <뉴스9> 전 앵커가 사직 소식을 전했다. 일부 언론이 '사직의 변'을 주목하게 만든 이는 KBS 황상무 전 앵커였다.

폭스뉴스의 파격과 KBS 전 메인뉴스 앵커의 '사직의 변'
"현대사회에 진리는 없습니다. 사실이 있을 뿐입니다. 이익이 중첩되어 첨예하게 엇갈리는 다원 사회에서 한쪽에서 말하는 정의는 다른 쪽에서는 불의가 되고, 견강부회, 곡학아세일 뿐입니다. 요즘 말로 내로남불입니다. 이른바 진영논리만이 횡행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늘날 방향을 모른 채 진영 간의 난투극 시대로 접어든 데는, 진리가 없는데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진리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황 전 앵커가 9일 KBS 사내게시판에 올린 '사직의 변' 중 일부다. 황 앵커는 이 장문의 글에서 "우리 사회 극단적 진영논리의 근저에는 망국과 식민,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해 온 암울한 역사적 유산이 있습니다"라며 한국사회 진단에 나섰다. 그 중심에 "극단의 적대정치"가 자리한다는 주장이었다. .

이날 "인생의 절반 이상을 몸담았던 KBS를 떠나려고 한다"며 사직 의사를 전한 황 전 앵커는 지난 2015년 1월부터 2018년 4월까지 KBS의 메인뉴스인 <뉴스9>를 3년 4개월 간 진행했다. KBS 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장기집권'이었다. 황 전 앵커는 1991년 KBS 18기 기자로 입사, 미국 뉴욕 특파원 등을 거쳐 KBS <뉴스광장>과 <뉴스9> 메인 앵커를 맡았다. 

"좌나 우, 진보나 보수라는 틀로서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날이면 날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날선 주장들에서 여실히 확인됩니다.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고 내로남불을 쏟아내며 욕설과 저주로 증오만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성은 없고 극단의 감정만 있습니다. 문제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키우는 '소용돌이'일 뿐입니다. 사실은 무시되고 조롱받으며, 주장과 선동만이 힘을 얻습니다(...).

KBS는 이런 극단의 적대정치에 편승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질러서는 안 됩니다. 분노와 증오의 끝은 언제나 골육상쟁의 파국뿐이었습니다.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KBS는 국민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을 지펴야 합니다. 긍정의 가치를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용서와 화해 치유와 통합은 KBS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KBS가 우리 역사의 저주,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황 전 앵커가 '사직의 변'을 공개한 지 하루만인 10일, 국민의힘 배준영 대변인은 "현 정권에서 적폐로 몰린 한 언론인의 '사직의 변'으로만 치부하기엔 그 무게가 엄중하다"고 추켜세웠다.

지난 2018년 2월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소속 일부 후배 기자들이 역시 KBS 사내 게시판에 <황상무 앵커의 사퇴를 촉구합니다>라는 입장문을 통해 황 전 앵커의 퇴진을 주장했던 과거를 길어 올린 것이다.

당시 KBS 22기, 27기 기자들은 황 앵커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목소리가 높아질 당시 야당 의원이 여당 의원들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인터넷에 유출했다며 허위 왜곡 보도를 한 인물"이라며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살수차에 맞아 희생됐을 때도 경찰의 부검 시도를 옹호하며 여야 공방으로 치부하고 사안을 정치 쟁점으로 호도했던 자"라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런 반문과 함께 말이다.

"부당한 권력 비판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정부의 확성기 노릇에 매진한 자가 어떻게 아직도 공영방송 메인뉴스의 앵커를 할 수 있느냐."

그리고, 김훈의 두 가지 고언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신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2014 KBS TV 봄 개편 설명회'에서 <시사진단> 진행자인 황상무 기자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지난 2014 KBS TV 봄 개편 설명회'에서 <시사진단> 진행자인 황상무 기자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자료사진). ⓒ 이정민

 
황 전 대표의 '사직의 변' 내용 자체는 개인의 주장일 수 있다. 하물며 '내로남불'과 '극단적 진영논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이를 부추기는 이들은 누구인지, 이를 전하는 언론의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 무엇보다 황 전 앵커가 KBS 메인뉴스를 진행하던 시절 그와 다른 '기계적 균형', '선택적 보도'가 횡행하지 않았는지 반문하는 것조차 부질없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교는 가능할 듯 싶다. 우선 세월호 참사 당시 KBS 보도에 개입했던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 황 전 앵커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 전 홍보수석의 '벌금 천만원' 확정판결은 대법원이 지난 1월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침해한 혐의'를 인정한 첫 사례였다.

아울러 황 전 앵커는 박근혜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강행했을 당시 "교과서에 이념을 넣으려고 들면 논쟁은 끝이 없고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취지의 클로징 멘트로 KBS 내부로부터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황 전 앵커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와 같은 진단에 공감할 이들은 황 전 앵커를 추켜세운 보수야당 말고 또 누구일까. 그런 황 전 앵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가짜뉴스' 취급하며 생중계를 중단시켜버린 미 방송사들의 결단은, 폭스뉴스의 대처는 어떻게 평가할까. 이마저도 '극단의 진영논리'라 치부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 매일 욕지거리와 쌍소리 악다구니로 해가 뜨고 지는 세상이 됐습니다."

황 전 앵커가 '사직의 변'에서 언급한 소설가 김훈의 말이다. 김훈은 지난해 6월 안동의 한 인문캠프 초청강연에서 위와 같이 말하며 "사람들이 생각 없이 혓바닥을 너무 빨리 놀리며 혀가 마음껏 날뛰게 내버려 둔다"며 "어수선하고 천박한 세상"이 됐다고 개탄한 바 있다.

소설가 김훈의 말을 인용한 황 전 앵커는 "말 그대로 온갖 말이 난무하는 사회입니다. 불행하게도 그 한 가운데에 KBS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종편에 밀리고, 케이블을 뒤쫓는 KBS의 위기가 본격화된 시기가 바로 황 전 앵커가 <뉴스9>를 진행하던 박근혜 정부 때였다. KBS 구성원들이 왜 파업에 나섰는지를 상기 시켜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세월호 참사 보도를 필두로 KBS의 신뢰도가 하락한 요인 역시 '친정부' 보도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 전 앵커 역시 KBS의 불행을 자초한 이들 중 하나였다는 얘기다.

소설가 김훈은 지난해 10월 고려대 강연에서 "우리 시대에 가장 썩어빠진 것이 언어"라며 이런 진단을 내린 바 있다. '사직의 변'에서 김훈을 길어 올린 황 전 앵커가, '박근혜 국정교과서'를 받아들이자며 '친정부 스피커' 노릇을 했다고 후배들로부터 평가 받았던 황 전 앵커가, 더 나아가 황 전 앵커와 같은 언론인들이 경청해야 할 고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해 말을 할수록 관계는 단절된다(...) 말을 할 때 그것이 사실인지, 근거가 있는지 아니면 개인의 욕망인지 구별하지 않고 마구 쏟아내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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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어제는 영화기자, 오늘은 시나리오 작가, 프리랜서 기자. https://brunch.co.kr/@hasungtae 기고 청탁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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