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프로야구를 즐겨 본 사람이라면 '비운의 아기호랑이' 고 김상진 투수를 기억할 것이다. 이대진, 임창용 등 해태 타이거즈 에이스들의 모교인 진흥고 직속 후배였던 김상진은 만 20세의 나이였던 1997년 LG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미래로 떠올랐다. 하지만 김상진은 이듬 해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1999년 6월 만 22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사실 김상진은 프로에서 뛰었던 3년 동안 한 번도 두 자리 승수를 올리지 못했다. 통산 성적도 승리(24승)보다 패(26패)가 더 많았을 만큼 기록만 보면 평범한 투수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많은 야구팬들은 김상진이 살아 있었더라면 분명 위대한 투수로 성장했을 거라 믿고 있다. 자고로 영웅이란 눈부시게 빛나던 모습 그대로 사라지게 되면 사람들의 추억이 덧붙여지면서 영원한 별로 남기 때문이다.

야구선수 김상진처럼 약관의 나이는 아니었지만 가요계에도 너무 이른 나이에 요절해 많은 가수들과 음악팬들의 전설로 남은 불세출의 보컬리스트가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고 전태관, 빛과 소금의 장기호와 박성식, 천재 뮤지션 고 유재하를 자신의 밴드 멤버로 썼고 윤상을 작곡가로 데뷔시켜 준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적인 보컬 '가객' 김현식이다.  
어린 나이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 인정 받은 보컬 유망주
 
 김현식의 6집은 그가 세상은 등진 후 1991년에야 세상에 공개됐다.

김현식의 6집은 그가 세상은 등진 후 1991년에야 세상에 공개됐다. ⓒ 케이앤씨뮤직


 
유희열이나 이적, 루시드폴, 장기하처럼 공부 잘하고 학벌 좋은 뮤지션도 많지만 대부분 음악에 열중하는 뮤지션들은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현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아티스트 지드래곤은 대학을 중도에 그만뒀고 아이유는 아예 진학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아시아의 별' 보아는 가수활동을 위해 고교 진학마저 포기했고 최근 아이돌 중에도 가수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고교 과정을 마치지 않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김현식 역시 중학시절 기타를 접하면서 학업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명지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음악 동아리에 가입했다가 선배들과 주먹다짐을 벌인 후 동아리에서 퇴출되고 결국 2학년에 진학하기 전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물론 김현식은 자퇴 후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졸학력을 인정 받았다).

자퇴 후 종로의 음악다방에서 노래를 하며 가수의 꿈을 키우던 김현식은 전인권, 한영애 등 선배 가수들에게 실력을 인정 받으며 '검은 나비', '신촌 블루스' 등 당시 잘 나가던 언더그라운드 밴드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5공화국 정권이 들어선 후 록 성향의 음악에 대한 금지곡 지정이 대거 해제되면서 김현식은 <봄여름가을겨울>을 타이틀로 한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김현식 1집은 이미 유신시대였던 1978년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김현식의 데뷔 앨범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김현식은 이를 비관해 술과 담배에 매달리게 된다. 만약 이 때 김현식의 과도한 음주와 흡연 습관을 고쳐줄 사람이 있었다면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물론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김현식이 그 말을 그대로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결혼 후 '김현식과 돌개바람'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던 김현식은 당대 최고의 언더그라운드 기획사였던 동아기획과 전속계약을 체결했다(80년대 중·후반 조용필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에서 '아티스트'라 불리던 뮤지션들은 대부분 동아기획을 거쳐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김현식은 1984년에 발표한 2집 앨범에서 <사랑했어요>를 크게 히트시키며 주류와 비주류를 아우르는 인기가수로 떠올랐다.

전설적인 뮤지션들이 모인 밴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

동아기획이라는 든든한 '빽(?)'을 얻은 김현식은 자신의 음악과 라이브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한 밴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후배 김종진과 전태관(이상 봄여름가을겨울), 장기호(빛과 소금), 그리고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키보드를 쳤던 막내 유재하를 영입해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사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보컬 김현식의 존재감이 워낙 커서 대중들에게는 솔로 가수 김현식의 백밴드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김현식은 오히려 이를 경계해 밴드 이름 앞에 자신의 이름을 빼고 그냥 '봄여름가을겨울'이라고 이름을 짓고 싶어 했다고 한다(봄여름가을겨울은 이후 김종진과 전태관이 결성한 2인 밴드의 이름이 됐다. 물론 이는 존경하는 선배가수 김현식에 대한 '오마주'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함께 공연을 다니며 밴드의 팀워크를 쌓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더 김현식은 3집 앨범을 준비하면서 멤버들에게 한 가지 '미션'을 줬다. 바로 자신의 3집 앨범에 수록할 곡을 하나씩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재능 있는 후배들에게 작곡가로 데뷔할 기회를 주기 위한 김현식의 배려였다. 멤버들은 우상으로 삼았던 전설의 보컬리스트가 부를 곡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곡작업에 매진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난을 떨었던(?) 사람은 한양대 작곡과 출신의 키보드 주자 유재하였다. 이미 조용필 7집의 <사랑하기 때문에>와 이문세 3집의 <그대와 영원히>를 만들며 또래들보다 먼저 작곡 데뷔를 했던 유재하는 다른 멤버들에 비해 작곡가로서의 자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렇게 유재하는 김현식에게 자신의 솔로 앨범을 위해 써둔 곡을 모두 제출하는 유난(?)을 떨었다.

하지만 김현식은 다른 멤버들과의 형평성을 위해 유재하가 헌정한 주옥 같은 곡들 중에 <가리워진 길>만 앨범에 수록하기로 했다. 유재하는 김현식 3집을 한창 녹음하던 시기 솔로 데뷔를 위해 팀에서 탈퇴했고 훗날 '빛과 소금'의 멤버가 되는 박성식이 새로운 키보드 주자로 합류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새 멤버 박성식이 만든 <비처럼 음악처럼>이 3집 타이틀곡으로 선정되면서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1987년 김현식이 대마초 혐의로 구속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의 길을 걸었다. 김현식은 1988년 <언제나 그대 곁에>와 <여름 밤의 꿈>(윤상의 작곡 데뷔곡), <그대 내 품에> 등이 들어 있는 4집을 발표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최고의 쇼프로그램이었던 KBS의 <젊음의 행진>에서 1시간 짜리 '김현식 새 앨범 발매기념 단독 콘서트'를 편성했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1989년 신촌블루스와 함께 활동했던 김현식은 1990년 강인원, 권인하와 함께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부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계속된 술과 담배로 이미 김현식의 몸은 본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상해 버렸다. 결국 김현식은 1990년 11월1일 간경변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김현식의 나이는 고작 만 32세로 빅뱅의 지드래곤, 동방신기의 최강창민, 배우 김수현, 정해인 등의 현재 나이와 같았다. 

사후에 발매돼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김현식 6집

사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났을 땐 대마초 파동과 간경변 투병에 의한 공백 등으로 대중적인 전성기가 다소 지난 상태였지만 사후에도 김현식이 가요계에 남긴 존재감은 대단했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움직임이 가요계 안팎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실은 1991년 1월 실질적인 유작 앨범인 김현식 6집 앨범의 발매로 이어졌다. 

김현식 6집의 타이틀 곡은 신예 작곡가 오태호가 만든 <내 사랑 내 결에>. 이 곡은 언더그라운드 록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오태호가 누구를 주려고 만든 노래가 아니라 연습실에서 기타를 치며 흥얼거리던 습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우연히 들은 김현식이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해서 김현식의 6집에 수록됐다고 한다(이 곡이 크게 히트하면서 오태호도 발라드 전문 작곡가로 변신했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곡 자체도 워낙 좋지만 김현식의 애절한 목소리를 만나 더욱 높은 생명력을 얻었다. 앨범에는 현악기를 사용한 부드러운 편곡을 살린 버전이 실렸지만 김현식이 녹음했던 스튜디오에서 발견된 다른 버전을 들어보면 마치 절규하는 듯한 김현식의 거친 고음을 들을 수 있다. 만약 김현식이 살아 있었다면 공연에서는 여러 가지 버전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김현식은 (당연하게도) 6집 앨범 발매 후 방송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사랑 내 곁에>는 KBS <가요톱텐>에서 골든컵(5주 연속 1위)을 차지하며 그야말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김현식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던 세대부터 김현식을 잘 모르던 어린 세대까지 모두 <내 사랑 내 곁에>를 흥얼거렸을 정도. 

김현식의 양대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내 사랑 내 곁에>와 <비처럼 음악처럼>은 모두 후배 작곡가가 써준 곡이지만 사실 김현식은 뛰어난 작사, 작곡 능력을 가진 싱어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6집에서 <내 사랑 내 곁에>에 버금가는 명곡으로 평가 받는 <추억 만들기>가 바로 김현식의 자작곡이다. 특히 "뜨거운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천천히 식어 갑니다"라는 마지막 가사가 마치 김현식의 유언처럼 들려 더욱 먹먹하게 느껴지는 곡이다.

원로 작곡가 손석우 옹이 만든 <이별의 종착역>은 김현식이 신촌블루스의 보컬로 활동하던 시절에 불렀던 곡이다. 김현식 2집의 히트곡 <사랑했어요>도 6집에 다시 실렸다. 이 앨범에서 새롭게 녹음된 곡은 사랑과 평화의 리더 최이철이 작곡한 <겨울바다>와 <사랑했어요>뿐이다(나머지 곡들은 모두 5집 작업 당시 녹음했다가 앨범에 실리지 못한 미발표곡이다).

그렇다고 김현식의 마지막 앨범에 슬프고 우울한 노래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빠른 리듬과 염세적인 보컬이 돋보이는 김현식의 자작곡 <사랑사랑사랑>은 이 앨범에서 몇 안 되는 경쾌한 곡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이 만들고 노래에도 참여한 <나의 하루는> 역시 김현식의 저음과 김종진의 고음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매력적인 곡이다.

대중들은 김현식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마지막 길을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그의 6집 앨범에 폭발적인 사랑을 보냈다. 그 결과 김현식은 1991년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시상식에서 <만남>의 노사연, <당신>의 김정수를 제치고 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김현식의 아들 김완제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대상을 대리 수상해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했다.

바뀐 음색마저 장점으로 승화시킨 천재 보컬리스트
  
 김현식의 30주기가 된 올해 후배 가수들은 김현식의 명곡들을 다시 부르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김현식의 30주기가 된 올해 후배 가수들은 김현식의 명곡들을 다시 부르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 (주)슈퍼맨씨엔엠


 
1996년에는 김현식이 병상에서 즉흥으로 녹음한 노래들 중 미발표된 노래들로 구성된 7집 앨범이 발매됐고, 2002년에도 통기타 반주로 녹음한 미발표 곡들을 모은 스페셜 앨범이 발매됐다. 그만큼 사후에도 김현식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김현식의 타계 10주년이던 2000년에는 임재범, 이승환, 신승훈, 윤종신, 김민종, 김경호 등 쟁쟁한 후배 가수들이 참여한 헌정 앨범이 발매됐다. 김현식을 음악적 멘토로 생각하는 김장훈은 2010년 20주기 헌정 앨범 'letter to 김현식'을 발표했다(김장훈은 그 앨범을 자신의 생애 최고 앨범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올해도 김현식의 30주기를 맞아 후배 가수들이 김현식의 노래들을 다시 부르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김현식은 가수 활동을 하면서 두 번이나 대마초 혐의로 구속됐고 살면서 얻은 이런 저런 고통을 술과 담배로 해결하며 미성이던 음색도 허스키하게 변했다. 하지만 김현식은 자신의 바뀐 음색마저 장점으로 승화시켜 노래에 담아내던 천재적인 보컬리스트였다.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자신에게 남은 모든 힘을 쥐어 짜서 노래에 쏟아내고 세상을 떠난 '가객(歌客)' 김현식. 11월만 되면 유난히 더 생각나는 가수 김현식이 이제는 아픔 없는 곳에서 하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부르며 편안히 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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