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1월에 방송된 <무한도전-토토가>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가수는 역대 단일 앨범 최다 판매에 빛나는 김건모였다. 김건모는 <잠 못 드는 밤 비를 내리고>를 시작으로 <사랑이 떠나가네>, <잘못된 만남>같은 명곡들을 차례로 불렀다. 하지만 3주에 걸쳐 이어진 긴 공연 시간 때문인지 그의 무대는 '코메인이벤트'로 나왔던 엄정화의 무대가 남긴 아우라를 넘지 못했다(물론 김건모의 공연이 나빴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지누션의 공연에서 깜짝 출연하며 <말해줘>의 와이퍼춤을 선보였던 엄정화는 본인의 무대에서 <초대>와 <포이즌>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섹시디바'의 위용을 과시했다. 엄정화 무대의 유일한 아쉬움은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원조 V맨' 김종민이 무대에 함께 서지 못했다는 점뿐이었다.

인상적인 부분은 1집 <눈동자>부터 2008년에 발표한 미니앨범 <D.I.S.C.O>까지 수 많은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는 엄정화가 <토토가>에서 4집에 있는 2곡을 선곡했다는 점이다(물론 현장에서는 더 많은 곡을 불렀을 수도 있다). 무수히 많은 히트곡을 가진 엄정화가 '토토가' 같은 큰 무대에서 한 앨범에 있는 노래 두 곡을 선정한 것은 그만큼 엄정화의 4집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명반이었다는 뜻이다.
 
 엄정화 4집은 90년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올스타전' 같은 앨범이다.

엄정화 4집은 90년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올스타전' 같은 앨범이다. ⓒ RIAK

 
가수와 배우 넘나드는 최고의 여성 엔터테이터

MBC 합창단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끼를 발휘해온 엄정화는 1992년 최민수, 심혜진 주연의 영화 <결혼이야기>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며 정식 데뷔했다. 그리고 1993년에 시인 출신 유하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었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주인공으로 전격 캐스팅됐다(엄정화는 2002년 유하 감독의 차기작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도 출연했다).

비록 영화는 흥행과 비평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지만 신선한 매력의 신인배우 엄정화는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엄정화는 영화의 OST이자 고 신해철이 직접 만든 <눈동자>를 타이틀곡으로 한 정규 1집을 발표했다(신해철은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음악감독이었는데 이 OST 앨범에 수록된 <코메리칸 블루스>는 1995년 국악이 가미된 형식으로 편곡돼 넥스트의 정규 3집에도 수록됐다).

사실 당시 <눈동자>는 차트를 점령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진 못했다. 하지만 엄정화는 강수지와 하수빈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청순가련형' 가수들이 득세를 이루던 여성 솔로 가수 시장에서 몽환적이고 섹시한 이미지를 앞세우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엄정화는 영화 <마누라 죽이기>, 드라마 <폴리스>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영역을 넓히다가 1995년 12월 2집 앨범을 발표했다.

엄정화는 2집에서 슬픈 가사와 경쾌한 리듬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댄스곡 <슬픈 기대>와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게 됐다는 내용의 아련한 발라드곡 <하늘만 허락한 사랑>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만능 엔터테이너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그리고 엄정화는 1997년 3집 <배반의 장미>를 통해 드디어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3집은 오랜 기간 엄정화와 환상의 콤비를 자랑한 작곡가 주영훈과 처음 작업을 함께 하기 시작한 앨범이었다.

당시 <배반의 장미>는 SBS <TV가요 20>에서 3주 연속 1위, MBC <인기가요 BEST50>과 KBS <가요톱텐>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엄정화를 명실상부한 최고의 여가수로 만들었다. 하지만 <배반의 장미>와 <삼자대면>, <후애> 등이 들어있는 3집 앨범은 1년 후 엄정화 최고의 명반 <Invitation>이 나오기 위한 예고편에 불과했다.

국내 최고의 뮤지션들이 집합한 엄정화 4집

1998년 7월에 발매된 엄정화의 4집 앨범에서는 국내 최고의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했다. 당시 최고의 작곡가로 떠오르던 주영훈을 필두로 훗날 국내 굴지의 기획사 수장이 되는 JYP 박진영, DEUX의 이현도, 솔리드의 정재윤, 베이시스의 정재형, 노이즈의 천성일, 최고의 작사가 박주연, <다 줄거야>를 만든 조규만, 만능 엔터테이너 김민종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찰 만큼 그 시절 최고 뮤지션들의 이름이 엄정화 4집에 이름을 올렸다.

타이틀곡은 <배반의 장미>를 히트시켰던 주영훈이 만든 <포이즌>. 유부남을 사랑하는 여자가 끝내 그 남자를 포기하겠다는, 지금 들으면 매우 위험한 가사의 곡이지만 엄정화는 이 우울한 내용의 노래를 매우 경쾌하게 소화했다. 통칭 'V맨'으로 불리며 엄정화의 댄서로 많은 인기를 얻었던 김종민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여성팬들을 몰고 다니던 백댄서였다(사실 지금도 여성팬들을 몰고 다니는 백댄서는 결코 흔하지 않다).

겨울에 스키장에서 많이 울려 퍼지던 솔리드 정재윤의 곡 <숨은 그림 찾기>는 '섹시 아이콘' 엄정화가 데뷔 후 처음으로 '깜찍 발랄한 컨셉트'를 선보였던 곡이다. 훗날 <페스티벌>이나 <D.I.S.C.O>같은 곡이 나오기도 했지만 '최초'라는 점에서 팬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노래다. 분위기 있는 뮤지션 시절의 정재형이 만든 <선인장>과 박주연이 가사를 쓴 <널 모를게>는 배우를 겸엽하는 엄정화의 풍부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엄정화 4집의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포이즌>과 <초대>가 순위 프로그램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저평가 받았다는 점이다. 엄정화의 활동 시기에 김현정이나 핑클 같은 걸출한 신인이 나오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김민종과 젝스키스의 신보도 엄정화의 독주를 막은 큰 원인이었다. 물론 4집에 수록된 엄정화의 명곡들은 세월이 흘러도 엄정화의 대표곡으로 오랜 기간 사랑을 받았다.

환불원정대 통해 트라우마 극복한 '레전드 디바'

엄정화는 이후에도 5집 <몰라>, <페스티벌>, 6집 <Escape>, <틈>, 7집 <다 가라> 등을 통해 최고의 솔로 여가수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혔다. 그렇게 가수 활동에 전념하던 엄정화는 유하 감독의 신작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통해 2003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수상하며 노래와 연기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2008년에는 과거 지누션의 <말해줘> 피처링을 통해 인연을 맺었던 YG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고 미니앨범 <D.I.S.C.O>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서는 빅뱅의 T.O.P과 지드래곤(빅뱅), 2NE1 데뷔 전의 CL 등 YG 소속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엄정화는 <D.I.S.C.O>를 끝으로 8년 동안 앨범을 발표하지 못했고 2017년 9년 만에 발표한 10집 앨범에서도 과거와 같은 시원스런 가창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놀면 뭐하니-환불원정대>를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엄정화는 공백기간 동안 갑상샘암 수술을 받으면서 왼쪽 성대 마비 증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재석을 비롯한 멤버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트레이닝을 받아 환불원정대의 노래 <Don't Touch Me> 녹음과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 '레전드 디바' 엄정화는 데뷔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음악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엄정화는 환불원정대 활동을 통해 아직 가수로서도 충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엄정화는 환불원정대 활동을 통해 아직 가수로서도 충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 MBC 화면 캡처

 
엄정화 응답하라 1990년대 환불원정대 토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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