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사망 50주기다. 스물두 살 젊은 청년의 죽음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고, 이후 노동환경의 변화를 이끌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은 인간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노동과 모진 연대를 이어오고 있다. 영화 속 '노동'의 얼굴들 또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크린 속 '노동'의 현실을 통해 '기계'가 아닌 '인간'이고 싶었던 한 젊은 청년의 소망을 반추해 보고자 한다.[편집자말]
몇 년 전, 나는 내가 일하던 직장의 '폐업' 과정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변두리 동네의 작은 보습학원이었던 그곳에서 나는 중학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2년 남짓 국어 과목을 가르쳤다. 규모는 작았지만, 학부모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고 덕분에 차근차근 아이들 수를 늘려가며 자리를 잡아가던 곳이었다.

그러나 근방에 대형 학원이 들어서면서부터 경영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원장님은 강사들 월급과 월세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결국, 몇 달에 걸쳐 고심한 끝에 폐업을 결정하게 되었다.
 
폐업을 앞두고, 마지막 수업을 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머리가 제법 굵어 눈치가 빠삭한 아이들이 평소와 달리 내 농담에도 크게 웃질 못하고 쭈뼛거리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자꾸만 울컥해서 말을 제대로 잇기가 어려웠다. 돌이켜보면 그때만 해도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마지막'에 참 서툴렀고, 그것이 오랫동안 부끄러웠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포스터 벤 스틸러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고, 2013년에 개봉했다가 2017년에 재개봉했다.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포스터 벤 스틸러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고, 2013년에 개봉했다가 2017년에 재개봉했다. ⓒ 글뫼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16년간 몸담았던 잡지사의 폐간을 앞두고, 폐간호를 장식할 표지의 사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월터(벤 스틸러)의 모험을 그린 영화다.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될 위기에 처한 와중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에 목숨을 거는 월터를 보며, 나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마지막 수업을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는 우리에게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로 친숙한 배우 벤 스틸러가 메가폰을 잡고, 주인공 월터 역까지 직접 맡아 열연을 펼치며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서는 2013년에 개봉했다.
 
시사 잡지사 라이프지에서 무려 16년째 필름 인화 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월터는 어릴 적에는 그 누구보다 명랑하고 모험심 넘치던 소년이었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꿈많던 시절과는 작별하고 그저 집과 회사만을 부지런히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반복적인 일상에 찌든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난 월터.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배짱도, 낭만도, 야망도 없는, 소심한 월터에게 유일한 낙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상상' 뿐이다. 월터는 상상 속에서만큼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며 용감무쌍하게 악당을 무찌르고,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물론 현실로 돌아오면, 아무 때고 멍하게 상념에 잠기는 괴짜로 찍혀서 회사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일쑤지만.
 
그러던 어느 날, 라이프지가 인터넷 매거진으로서 변화를 꾀하게 되면서 필름 인화 담당자인 월터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숀 펜)은 라이프지의 폐간을 안타까워하며 그동안 자신의 사진 인화를 담당해온 월터에게 라이프지의 모토를 새긴 지갑을 선물한다.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숀은 월터에게, 자신의 필름 통 안에서 25번 사진을 찾아 폐간호의 마지막 표지에 실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25번 사진이 자신의 필생의 역작이며 그 안에 '삶의 정수'를 담았다는 숀의 편지를 읽고 월터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숀이 말한 25번 사진은 테두리만 남은 채 하얗게 비워져 있을 뿐이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극중 장면 '삶의 정수'를 담았다는 25번 사진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월터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극중 장면 '삶의 정수'를 담았다는 25번 사진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월터 ⓒ 글뫼

 
전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돌며 사진을 찍는 숀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 고심하던 월터는 회사의 재무팀에서 일하는 셰릴(크리스틴 위그)의 도움을 받아 숀의 주소를 알아내고자 하지만 여의치 않다. 게다가 자꾸만 표지로 쓸 사진의 행방을 캐묻는 상사 때문에 월터의 시름은 더 깊어져만 간다. 

그러다 우연히 필름 통 속 다른 사진에서 숀의 행방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는 월터. 그린란드에 위치한 항구와 배 이름의 일부가 찍힌 사진을 앞에 놓고 고민하던 월터는, 셰릴의 응원에 힘입어 난생처음 집을 떠나 그린란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로 결심한다.
 
회사 밖 낯선 세계에 첫발을 디딘 월터 앞에는 그가 늘 상상만으로 꿈꾸어 오던, 위험천만하고 스릴 넘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숀이 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배에 오르기 위해 무턱대고 헬기에서 뛰어내렸다가 바다에 빠지고, 거기서 맞닥뜨린 상어와 한바탕 몸싸움을 벌이며, 화산이 분출되기 직전의 들판을 무작정 달리기도 하는 월터. 이제 월터의 상상은 그야말로 하나둘 현실이 되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25번 사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포스터 원제는 'The secret life walter mitty'다.

▲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포스터 원제는 'The secret life walter mitty'다. ⓒ 글뫼

 
이 영화의 백미는 월터가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25번 사진에 있다. 그 모든 노력에도 결국 해고를 당한 월터가 작은 신문 가게의 가판대 위에 놓인 라이프지의 마지막 표지를 보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코끝이 찡한 감동을 선사하다.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삶의 정수'를 담았다고 호언장담한 25번 사진 안에는 다름 아닌 월터 자신이 찍혀있기 때문이다. 과연 사진 속 월터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영화는 오랜 세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월터에게,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최선을 다한 그간의 삶이 하나의 커다란 '모험'이었음 일깨워준다. 진짜 '아름다운 마지막'이란 결국 새로운 시작점에 맞닿아 있다는 묵직한 주제를 코믹하게, 또 따뜻하게 풀어낸 영화이기에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충족하고픈 영화팬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한다.
 
우리는 누구나 일을 하다 보면 때때로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내가 과연 이 일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혹은 내가 나의 일을 정말 제대로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나의 '일'을 통해 의미 있는 단 하나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닐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고 난 뒤, 문득 영화 속 라이프지의 모토처럼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기'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늘 같은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하게 삶을 다져가는 것도 충분히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속 월터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숀이 말한 '삶의 정수' 일런지도 모른다.
월터의 상상 25번 사진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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