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 선수

이동국 선수 ⓒ 한국프로축구연맹

 
한국축구의 전설 이동국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79년생으로 만 41세, 올시즌 K리그 최고령 선수였던 이동국은 26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와 구단을 통해 올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고 발표했다.

소속팀 전북은 오는 11월 열리는 대구FC와의 2020 K리그 최종전(27라운드)과 울산 현대와의 대한축구협회 FA컵 결승전을 남겨두고 있는데 홈구장인 전주에서 열리는 결승 2차전이 이동국의 현역 마지막 무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11월 A매치 휴식기가 끝난 뒤 재개될 2020 아시아 챔피언스리그(ACL) 참가 여부에 따라 이동국의 현역 일정이 조금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이동국은 일단 대회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상태다.

이동국은 이회택-최순호-황선홍-최용수 등 한국축구의 역대 간판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선수로 꼽힌다. 1998년 포항스틸러스에 입단하여 프로생활을 시작한 이동국은 광주 상무, 성남 일화를 거쳐 2009년부터 전북현대에서 활동했다. 베르더 브레멘(독일), 미들즈브러(잉글랜드) 등 유럽 빅리그도 경험했다.

젊은 시절에는 소녀팬들을 몰고다니기도 했으며, '발리슛'은 지금도 한국축구 역대 공격수 중 최고로 꼽히는 이동국만의 트레이드 마크다. 젊은 시절엔 미디어 노출이 많지않은 선수였지만, 말년에는 한 TV 육아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녀들에게 다정하면서 책임감 강한 아빠의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호감을 얻기도 했다.

축구선수로서 이동국이 한국축구에 남긴 족적은 어마어마하다. K리그 통산 228골을 득점해 데얀(대구FC, 198골)과 김신욱(상하이 선화, 132골)을 제치고 역대 득점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총 37골(75경기)을 터뜨리며 통산 최다 득점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총 547경기에 출전해 골키퍼 김병지(은퇴, 706경기)에 이어 K리그 최다출장 역대 2위이자, 필드 플레이어로서는 가장 많은 경기에 나섰다.

우승과 개인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이동국은 전북에서만 총 7번의 K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도 두 차례(1998년 포항, 2016년 전북)을 경험했다. K리그에서 신인상(1998시즌)을 시작으로 최우수 선수상(2009·2011·2014·2015시즌)을 4번이나 수상했다. 2011시즌에는 AFC 챔피언스리그 최우수선수 및 득점왕을 받기도 했다. 이동국이 남긴 최다득점 기록이나 출전기록, MVP 수상 횟수 등은 당분간 깨기 힘든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프로 경력만 23년째인 이동국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2010년대-2020년대까지 무려 4번의 시대(Decade)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한 유일한 한국 선수이기도 하다. 전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이런 기록을 보유한 선수는 즐라탄 이브라히모치비(스웨덴), 엠레 벨로조글루(터키), 로케 산타크루즈(파라과이)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레전드'라는 수식어에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선수생활을 보낸 이동국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굴곡을 겪었다.

이동국은 1998년 프로 데뷔와 동시에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았다. 만 19세의 나이에 1998 프랑스월드컵에 깜짝 발탁돼 눈길을 끌었다. 당시 한국축구는 1무 2패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했지만 0-5 참패를 당했던 네덜란드전에서 후반 교체출장하여 주눅든 선배들을 대신하여 패기 넘치는 플레이로 스타군단 네덜란드의 골문을 위협하던 이동국의 모습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동국은 이후 '테리우스' 안정환'-앙팡 테리블' 고종수와 이른바 '신세대 트로이카'로 불리며 K리그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후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할 것 같았던 이동국의 20대 시절은 오히려 부침의 연속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황선홍-최용수-차두리 등 쟁쟁한 공격수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며 최종엔트리에 낙마했고, 절치부심하여 주전출장이 유력했던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는 본선 개막을 앞두고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또다시 출전이 좌절됐다. 이밖에도 병역비리 파동과 독일-영국 등 유럽진출에서의 연이은 실패, 2007년 아시안컵에서의 음주 파동과 국가대표 징계, 2008년 국내 복귀와 성남에서의 방출 등 이동국의 축구인생에 두고두고 남을 '흑역사'가 이어졌다. 

어느덧 한물간 선수로 잊힐 위기에 놓였던 이동국은 2009년 전북에서 '평생의 은인'이 된 최강희 감독을 만나며 재기에 성공했다.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최 감독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동국은 30대의 나이에 축구인생의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동국은 전북 입단 이후 10년 연속 두 자릿수 득점(2009-2018년) 기록을 세웠고, 2019년에도 9골, 2020년에는 4골을 기록하며 불혹의 나이까지도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했다. 전북에 머문 지난 12시즌 동안 7회의 K리그 우승과 1회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순간에 모두 함께한 선수는 오로지 이동국 뿐이다.

이처럼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동국이 끝내 극복하지 못한 '한'도 존재한다. 바로 월드컵과 유럽무대에서의 부진이다. 이동국은 월드컵 본선에 두 번 출전했으나 무득점에 그쳤다. 2014년과 2018년에도 지역예선에는 출전했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부름을 받지 못했다. 이동국의 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된 2010 남아공월드컵 우루과이전에서는 종료 직전 결정적인 득점기회를 놓쳐 물회오리슛이라는 오명을 안기도 했다. 이동국과 비슷하게 월드컵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지만 마지막 무대인 한일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명예회복에 성공한 선배 공격수 황선홍과는 대조되는 장면이다.

유럽무대 도전도 기대에 비하여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도 아쉽다. 아직 어렸던 독일 브레멘 임대 시절은 준비가 부족했다해도, 미들즈브러에서 여러 번 기회를 얻고도 '골 못 넣는 공격수'라는 오명을 안았던 것은 이동국의 한계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월드컵 본선과 유럽리그에서의 부진은 이동국에게 '아시아용 공격수', '큰 경기에 약한 선수'라는 선입견이 굳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K리그에서의 족적은 이동국에게 훨씬 못 미치지만 대표팀과 유럽 리그에서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남겨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후배 박주영(FC서울)과 자주 비교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편적인 사례가 이동국의 축구인생 전체를 평가절하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애초에 '정통 스트라이커'로서 세계적인 수준에서도 통할 정도의 선수는 한국에서 과거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어렵다. 20대 초반에는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클럽팀은 물론이고 A대표팀과 연령대별 대표팀까지 넘나들며 혹사 논란에 휩싸일 정도로 태극마크를 위하여 헌신했던 선수가 이동국이었다.

이동국은 무려 20년간 태극마크를 달고 A매치 105경기에 출장하여 33골을 넣을만큼 국가대표로서도 손꼽히는 업적을 남긴 선수다. 한국축구 역대 14명밖에 없는 센츄리클럽 가입자이자 역대 최다득점 4위 기록이다. 또한 황선홍-박주영-손흥민과 함께 한국축구에 단 4명뿐인 'A매치 전대륙 득점자'이기도 하다. 톱클래스의 기량과 꾸준한 자기관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기록이다.

젊은날의 이동국은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최고의 선수로 부활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장수하기까지 했다. '게으른 천재' '어슬렁거리는 공격수'라는 오명을 딛고 나이를 먹어서 K리그 도움왕에 오르거나 향상된 연계플레이 능력을 보여주는 등, 나이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단지 축구를 넘어 어떤 종목의 스포츠 선수들에게든 귀감이 될 만한 장면이다.

누가 뭐라해도 이동국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대한 커리어를 구축했고, 한국축구에 많은 기여를 남긴 선수다. 한국축구가 대형 공격수 기근에 시달리는 현 시대, '정통 스트라이커의 마지막 세대'로서 이동국의 장수가 남긴 발자취는 시간이 흐를 수록 두고두고 깊은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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