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 스틸컷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

 
영화 <마틴 에덴>은 경계를 논한다. 잭 런던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런던이 소설에 담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자전적인 내용에다 20세기 이탈리아 이야기를 섞었다. 원작의 줄거리 틀과 문제의식을 살리면서 현대적으로 해석한 영화로, 경계에 선 인간의 고뇌와 좌초를 그렸다.

원작 소설의 배경 캘리포니아는 영화에서 나폴리로 바뀌고, 소설에서 영어로 말한 마틴 에덴은 영화에서 이탈리아어로 말한다. 시공의 변화는,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이 언급한 대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원작 소설은 <아메리카의 비극>의 시어도어 드라이저 등과 함께 특정한 시공간의 맥락을 어느 정도 감안하며 읽어야 하지만, 영화 <마틴 에덴>은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나폴리가 배경으로 제시되었다 하여도 시간·공간과 무관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계급에 속한 남녀의 사랑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이나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의 사랑이 마틴 에덴에서 반복된다. 다른 계급에 속한 남녀의 사랑은 예술작품이 다루는 오래되고 익숙한 소재이다. 잭 런던의 <마틴 에덴>과 영화 <마틴 에덴>에서 그 구도를 답습하면서 신분상승 수단으로 '글'을 제시한 것이 이채롭다.

주먹 잘 쓰고 배운 것 없는 선원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은 부유층 가문의 '엘레나'(제시카 크레시)'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소설엔 엘레나가 '루스'로 돼 있다. 영화는 소설을 말 그대로 각색하였는데, 루스가 엘레나로 바뀐 것을 비롯하여 마틴과 엘레나가 만나는 첫 장면에서 인용된 시인이 영국의 스윈번에서 프랑스 보들레르로 바뀌는 등 변용이 일어난다. 영화의 첫 장면도 소설과 다르다. 이러한 변화는 당연한 것으로, 변화를 통해서 영화로서 어떤 성취를 끌어냈느냐가 중요하겠다.

노동자 계급에 속한 마틴과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엘레나의 사랑이 중심축을 이룬 것은 영화나 소설이나 동일하다. 다만 마틴 연인의 계급이 소설의 루스일 때는 부르주아에 가깝고 영화의 엘레나일 때는 상류계급에 가깝다는 미세한 차이는 드러난다.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

 
엘레나처럼 생각하고 말하기 위해 마틴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여 홀로 공부하고 홀로 글을 쓴다. 펜 하나로 세상과 맞선 마틴의 기개는 처음에는 사랑에서 비롯하였지만 점점 각성한 지식인의 소명으로 바뀐다.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시작하는데, 그 장면의 대사가 마틴의 성취를 보여준다.

"세상은 나보다 강하다. 그 힘에 맞서 내가 가진 건 나 자신뿐이지만 다수에 짓눌리지 않는 한 나 역시 하나의 힘이며 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 만하다. 왜냐하면 감옥을 짓는 자는 자유를 쌓는 이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마틴은 소설가 런던이 그랬듯, 벼랑 끝에 몰렸다가 극적으로 작가로 성공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같아지고 싶어서, "그의 옆을 걷는 개라도 되고 싶어서" 성공한 작가가 되었지만 작가로 성공하는 길은 엘레나와 멀어지는 길임이 드러난다. 노동자 계급에 속한 남자와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여자 사이의 사랑은 남자(의 계급)가 자유를 쌓으면서 여자(의 계급)가 지은 감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위해서 작가가 되었지만 작가가 됨으로써 마틴은 사랑을 잃어버린다.

극중 마틴의 멘토인 사회주의자 러스 브리센든(칼로 세치)이 말한 '환멸'은 헤어진 연인과 조우한 끝부분에서 결정적으로 표현된다. 사랑을 위해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였고, 작가가 되는 과정에서 사랑을 잃은 마틴은, 작가로서 성공하자 사랑이 돌아온 것을 보며 "인생이 역겹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돌아온 사랑은 사랑에게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성공에게로 돌아온 것임이 너무 명백하였기 때문이다.

마틴이 예술혼을 잃어버리고 좌초하다가 끝내 자기파괴의 결말로 치달은 이유가 그러나 단지 사랑에 실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환멸이 마틴을 절망케 한 결정적 원인이긴 하였지만, 그는 경계에 선 인물로 경계 위에 서 있기도 경계를 넘기도 힘들어했다. 런던은 소설 <마틴 에덴>을 개인주의 비판으로 요약했는데, 사실 개인주의자는 경계를 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당연한 이야기로, 개인주의가 더 강할수록 어떤 영역에 속하기 더 힘들어진다.

그러나 한편으론 '마틴 에덴'으로 유형화한 인물은 개인주의자로서 경계에서 배회함으로써 작가정신을 실현하고 모종의 실존을 획득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 실존이 꼭 존재의 증명일 필요는 없고 자유의 증명으로 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철군화> 잭 런던의 문제의식
 
 <마틴 에덴> 스틸컷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

 
프롤레타리아 마틴은 부르주아가 되고 싶었을까. 사랑을 위해서 그렇게 되고 싶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그냥 그렇게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속물성과 탐욕은, 감성적 허영을 만족시켜준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자 노동자인 마틴에겐 적응하기 힘든 악덕이었다. 자본주의에 적응해가는 성공한 작가로서 자신에게도 환멸을 느끼는 마틴의 모습을, 런던의 원작 소설 발간 111년 만에 영화로 제작된 <마틴 에덴>은 보여준다.

마틴의 멘토 러스는 "곧 다가올 환멸로부터 자신(마틴)을 구할 유일한 길"은 사회주의라고 말한다. "사회주의가 필요해. 노예가 너무 많아"라는 러스의 인식은 마틴에게 전적으로 공유되지 않는다. 마틴은 "노예가 너무 많아"에는 절절히 동의하였지만 "사회주의가 필요해"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마틴은 집산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공격받으면서도 신문에 사회주의자로 소개된다. 동시에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시장주의자들로부터도 "선창에서 배운 정치경제학"이란 비아냥을 들으며 배척당한다. 이처럼 성공한 작가 마틴은 오해와 배척에 둘러싸이며, 종국엔 일생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사랑에도 배신당한다.

여담으로 영화에서 표현된 소위 자유주의자들은, 극중 마틴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반독점과 같은 규제를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요즘 말하는 신자유주의 이념 신봉자들과는 다른 듯하다.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자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또 학문 분야에 따라 매우 폭넓은 의미로 쓰이므로, 마틴을 철없는 젊은이로 조소하는 극중 엘레나의 집단을 '건전한 시장주의자'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영화에서는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대립 가운데서 마틴이 개인주의를 고수한다. <강철군화> 때문에 일반적으로 런던을 사회주의 작가로 받아들이지만, 연구자들은 런던에게 개인주의 면모 또한 강하다고 지적한다. 개인주의를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런던이 <마틴 에덴>을 쓴 만큼 소설이나 영화에서 마틴이 개인주의자로 등장한 것은 불가피했지만, 의도에도 불구하고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마틴에게 제작자의 애정과 동감이 느껴진다. 개인주의가 근대인의 숙명이기 때문일까. 현대를 사는 인간이 먼저 개인으로 존재하고 그런 이후에 개인을 넘어서게 된다는 관점에서 모두는 마틴처럼 경계인이다.

영화는 환멸로 귀결하지만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사랑의 정수를 그려내면서 어떤 식으로든 경계인인 우리의 숙명을 메타포로 소화한다. 마지막 장면은 영화와 소설이 비슷한 듯 대비를 이룬다. 소설과 달리 결말을 짓지 않고 저 너머로 헤엄쳐가는 마틴의 모습을 보여준 엔딩은 원작의 창의적 해석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멀리서 보면 멋진데 가까이서 보면 얼룩. 그림이 사기친다"라는 영화 초반부 마틴의 유화에 대한 촌평은 소설과 영화에 모두 살아 있는데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소설에선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항상 명확하고 정확한 석판화"를 보고 자라 마틴이 유화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묘사된다. 유화에 대한 마틴의 인상은 익숙한 석판화에 대한 인식과 대비되어 영화와 소설 전체의 방향을 시사한다. 영화는 이 내용을 압축해 놓아 자칫 시사를 놓치기 쉽다.

영상언어만이 할 수 있는 것

<마틴 에덴>은 잭 런던의 삶→소설→영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른바 각각의 형상화가 일어난다. 영화가 소설의 대미를 비틀었듯 단계별로 변용과 균열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균열과 변용은 간단히 발효와 부패라는 두 경로로 나눌 수 있다. 영화 <마틴 에덴>은 발효에 가깝지 싶다.

주인공이 경계에서 혼란을 겪는 모습은 영화의 영상언어를 사용하는 방법과도 연결된다. 영화 속 '사실'과 회상·기억은 영상에서 구분된다. 기억과 회상은 다큐멘터리 아카이브 영상으로 구현되었다. 여기서 실제 영상은 극중에서 상상이나 기억이 되고 픽션은 극중에서 사실로 설정된다. 마틴 삶의 전도와 호응하듯 논픽션과 픽션은 역전된다. 소설로는 불가능한 표현이어서 <마틴 에덴>의 영상적 해석의 결을 풍성하게 했다.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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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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