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 (주)이수C&E

 
어떤 영화를 보고 나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기력해진다. 가슴이 졸아들고,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숨이 멎을 듯하다. 그러기를 몇 차례 넘겨야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나온다. <태양의 소녀들>은 그런 영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어려운 영화. 정말 저런 일이 21세기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2018년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어느 가족>과 심사위원상의 <가버나움>과 더불어 화제를 뿌린 영화 <태양의 소녀들>. 영화는 2014년 8월 31일 이슬람국가(IS)가 감행한 신자르 지역의 야지디족 급습사건에 기초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려지는 사건과 장소 그리고 인물은 에바 허슨 감독의 상상력에 의지하고 있다.
 
우리에게 야지디족은 너무나 생소하다. 이라크에 50만,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카프카스와 도이칠란트, 조지아 등지에 모두 70만에 이르는 야지디족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이라크 북부 신자르 지역에 가장 많은 30만 정도가 거주한다. 야지디족은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요소를 혼합한 일신교를 신봉한다.
 
여성들의 영화
 
<태양의 소녀들>은 여성영화다. 출연진은 물론 감독과 각본, 편집도 여성이 주역이다. 그들 중심에 프랑스 종군기자 마틸드와 야지디 전사 바하르가 있다. 마틸드는 전쟁을 전문적으로 기록하는 사진기자로 20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남편을 잃고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딸 이리스의 엄마. 전쟁의 상흔은 그녀의 왼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아들 헤민을 도둑맞은 여성 바하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기 전에는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던 전직 변호사 바하르. 이들의 상실과 연대를 발판으로 <태양의 소녀들>은 진행된다. 여기 보태지는 여성이 바하르의 대학은사 달리아 사이드 교수다. 죽음을 무릅쓰고 동족을 구해내는 강인한 여성.
 
영화는 야지디 여성들이 왜 '태양의 소녀들'이라는 이름으로 총을 들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대량학살과 인신매매는 물론이고, 7000여 명에 이르는 여성들의 강간과 그들의 도주와 판매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 것이다. 그런 무차별적인 폭력을 영화는 긴장된 시선으로 따라간다. 긴 여운을 남기는 '기록영화'의 흔적이 여기서 발원한다.
 
마틸드와 바하르는 서로의 참혹한 상실을 교감하면서 여성의 유대로 맺어진다. 목숨 걸고 총을 잡은 바하르와 총 대신 사진기로 그녀들을 기록하는 마틸드는 공동운명체임을 여러 번 확인한다. 동족을 학살하고 여성의 생명과 자식들을 유린(蹂躪)한 철천지원수를 죽이는 바하르. 시대와 사건의 증인이 되어 진실을 알리려는 마틸드.
 
나약한 남성과 강인한 여성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 (주)이수C&E

 
우리는 크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생명을 구해낸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을 기억한다. <태양의 소녀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학살과 인신매매로 부모와 형제자매, 아들과 딸을 잃은 그들은 바싹 말라버린 눈물샘의 소유자들이다. '천사'가 아니라, '전사'인 그들은 남성들보다 훨씬 강하고 단호하다.
 
바하르가 야지디족 지렉 장군을 찾는다. 그녀는 이슬람국가가 점령한 마을을 공격해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자 한다. 지렉 장군은 바하르의 제안을 일거에 거절한다.
 
"연합군의 공습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라. 기다림도 전쟁이다!"
 
아군 사상자가 늘어날까 봐, 아군 화력이 적보다 약하고, 곳곳의 암초를 피하고자 지렉은 기다림을 선택한다. 바하르는 그런 지렉을 자꾸만 다그친다. 그녀에게 기다림이란 비겁한 지연술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렉 앞에 무릎 꿇고 간절하고 확실하게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바하르. 유약한 남성 지렉을 설복하는 바하르.
 
여자에게 죽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이슬람국가 병사들의 믿음을 제대로 확인해주는 바하르. "네 놈도 죽여줄까?" 하는 바하르의 거친 목소리에 상대 전화기는 묵묵부답이다. 극단주의자들마저 두려워하는 여성 전사 '태양의 소녀들'.
 
여성 전사들의 춤과 노래
 
객석의 들쭉날쭉한 호흡을 풀어주는 기제는 그들의 춤과 노래다. 11월의 냉기가 뼛속을 사무치는 야심한 시각. 그들은 화톳불을 피우고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며 노래한다. 동료의식과 투쟁의지를 고취하고,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이는 춤과 노래. 너와 나의 어깨동무가 우리 모두를 해방의 날로 인도할 것이라는 무언의 다짐과 약속.
 
"우리가 흘린 피는 모유가 되고,
우리의 죽음에서 새 생명이 솟아오를 것이다.
새로운 날이 밝을 것이니. 여성과 생명, 자유를 위해."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구절은 '여성과 생명, 자유'였다. 전쟁의 참화에 무방비상태로 내던져지는 일차적인 대상이 여성과 아이들이다. 멀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가까이는 6.25 한국전쟁이 그것을 입증한다. 야지디의 여성 전사들은 여성을 가장 먼저 외친다. 피해자 여성에서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여성이 되겠다고 소리친다.
 
야지디족의 가부장적인 전통에 얽매여 살아야 했던 유약한 운명을 던져버리고, 자유롭고 당당하며 용감한 여성으로 재탄생하는 장면이다. 지아비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에서 독립적인 여성의 지위를 첫머리에 내세우는 바하르와 동료 전사들. 그래서 영화가 더욱 장렬하고 강인하며, 우리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진실을 찾아서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 (주)이수C&E

 
여성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얻어질 여성과 생명과 자유의 새로운 시대를 노래하는 전사들. 그들의 표정과 죽음으로 점철된 전투와 포연 자욱한 전장을 빼곡하게 담아내는 마틸드. 철부지 소녀부터 중년의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총을 잡은 야지디 여성들. 이슬람국가의 성노예 포로에서 목숨 걸고 탈출하여 전사가 된 여성들의 이야기.
 
마틸드는 그런 여성들의 삶과 투쟁과 죽음을 세계 곳곳에 알리고자 한다. 그녀와 바하르의 대화에서 우리는 끔찍한 진실에 눈뜨게 된다.
 
"그놈들은 나처럼 나이 먹은 여자는 금방 싫증 내요. 아홉 살, 열 살 먹은 어린애들을 좋아해요. 그런 애들이 이라크와 터키로 팔려나갑니다."
 
마틸드는 자신이 전하는 진실에 눈감은 세계를 담담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있어요. 그들은 돈으로 약속과 꿈을 사죠. 그래도 나는 진실을 알리고 싶어요. 총을 잡는 거나, 사진기를 드는 거나, 같다고 생각해요."
 
<태양의 소녀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여성과 생명과 자유를 억압하는 극단적인 사상과 종교와 무기를 버려라. 모든 사람이 종교와 인종,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 평등하고 우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기원하는 영화. 그런 세상은 여성이 총을 잡지 않고도,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남성과 더불어 생명과 자유를 가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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