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 A24 Films

 
전쟁 직후 폐허가 된 고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한 한국인 부부는 참 박복하다.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며 나름 돈을 모았고, 남부 아칸소에 큰 농장을 만들기로 했는데 물 공급부터 만만찮다. 

빈손과 맨몸으로 밑바닥 인생부터 시작해 성공한 한인 교포 이야기는 종종 방송가의 단골 소재가 되곤 했다. 배고픔, 인종차별 등의 어려움을 겪은 이 성공신화는 또 다른 이민 열풍을 자극했다. 이 아메리칸 드림은 1970년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 사회 구성원들 일부의 속마음이기도 했다. 

영화 <미나리>는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에서 자라온 리 아이작 정 감독의 신작이다. 그 스스로가 아칸소 출신이기도 한데 영화에 그의 자전적 정서가 짙게 깔려있다. 

다툼과 화해의 반복

이민자 부부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그리고 이들의 두 자녀(앨런 김, 노엘 케이트 조)는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집으로 이사한 뒤 새로운 가능성을 꿈꾼다. 아니 사실 그 꿈은 온전히 제이콥만의 것이기도 하다. 가족 부양의 책임감을 강하게 갖고 있는데다 자신이 계획한 일은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의 제이콥은 가난하더라도 함께 아기자기하게 살고픈 모니카의 마음과 종종 대치한다. 

뿌리 없는 삶을 살며 겪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피폐해질 법도 하지만 이 가족은 위태로운 듯 함께 정서적 교류를 이어간다. 엄한 제이콥을 무서워하면서도 따르는 아들 데이빗,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정이 있는 딸 앤의 존재는 이 가족이 인연을 이어가게끔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가족 성장 드라마로 볼 수 있지만 <미나리>는 이민자 가족 내면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서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교포 감독이 시나리오를 직접 쓴 까닭인지 문어체 같은 대사가 군데군데 걸리는데 오히려 캐릭터에 적절히 녹아들어 큰 걸림돌이 되진 않는다. 

크고 작은 다툼을 반복하던 이 가족이 전환점을 맞는 계기는 다름 아닌 모니카의 엄마(윤여정)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딸의 요청으로 한국을 떠나 온 엄마 순자는 한국전쟁을 겪은 당사자이며 동시에 괴팍하면서도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다. 

순자가 가족의 일원이 되면서 데이빗과 앤은 낯선 감정을 느끼면서 서서히 새로운 관계를 확장해 가는데 이 지점에서 영화가 품은 메시지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이민자에겐 귀하고 귀한 고국의 고춧가루, 음식, 각종 씨앗을 들고 온 순자는 이야기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며 이 가족에게 특정 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말을 들을 듯 듣지 않는 데이비드와 앤 역시 종종 불안요소가 되기도 한다. 특히 선천적으로 심장이 좋지 못해 격한 운동을 못하는 데이비드는 이 가족에겐 영화 초중반까진 아픈 가시와 같은 존재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등장인물 모두가 결함이 있고, 관계에 서툰 셈이다. 막중한 책임감을 가진 제이콥의 기대와 달리 모니카나 아이들은 다른 방향을 쳐다보기 일쑤고, 순자는 그런 그들을 품으면서도 본인 역시 강한 개성을 애써 숨기지 않고 마음껏 드러낸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이 가족은 이후 순자가 몰래 심어 놓은 미나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한다. 그렇게 물을 대고 비료를 주며 노심초사 길렀던 각종 채소와 달리 미나리는 물가 습지 근처에 씨만 뿌려놓았음에도 풍성하게 자라있다. 
 
 영화 <미나리>의 리 아이작 정 감독.

영화 <미나리>의 리 아이작 정 감독. ⓒ A24 Films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보다

"미나리는 최고야. 이렇게 뿌리기만 하고 가만히 두어도 잘 자라지. 김치에 넣어 먹을 수도 있고, 찌개를 끓일 수도 있고, 몸에도 좋고." 

마음대로 곡조를 붙인 미나리송을 흥얼거리는 순자를 데이비드는 신기하면서도 이상하게 바라본다. 자기가 상상한 할머니와는 너무 다른 할머니를 대하며 데이비드는 영화 후반부 어떤 결정적인 행동을 한다. 그간 켜켜이 쌓아온 가족 간의 정서가 데이비드의 행동을 발화점으로 해 한층 고양된다. 

<미나리>의 백미는 아무렇지 않게 영화 곳곳에 쌓아놓은 여러 상징들이 캐릭터들과 잘 어우러지며 탄탄한 구조를 이루는 데에 있다. 여기에 빛과 명도차를 이용한 촬영으로 환상적 느낌마저 주는 촬영 또한 이 영화가 품고 있는 특유의 정서적 힘을 강화한다. 

단순하고 분명한 성공신화가 아닌 3대에 걸친 어떤 교감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미나리>는 그렇고 그런 상업영화가 아닌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는 수작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2020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받으며 작품성 또한 일찌감치 인정받은 바 있다. 한국전쟁과 이민자를 소재로 한 영화 중 이 같은 보편성을 가진 영화가 있었을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놓쳐서는 안 될 작품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미나리 스티븐 연 한예리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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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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