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양의 소녀들> 포스터

영화 <태양의 소녀들> 포스터 ⓒ (주)이수C&E

 
"그런 건 그립지 않아" 하고 바하르(골쉬프테 파라하니 분)가 답한다. 흙먼지 흩날리는 이라크 삭막한 고산지대에서 소총 한 자루를 어깨에 매고 선 바하르는 야지디족 여성부대를 이끄는 대장이다. 야지디 민병대가 속한 쿠르드 부대는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을을 점령한 IS(이슬람국가)와 대치중이다.

바하르는 몇 년 전만 해도 부러울 게 없었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일했다. 남편을 존경했고 아이를 사랑했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행복한 줄 알았다.

프랑스 종군기자 마틸드(엠마누엘 베르코 분)가 "변호사로 일할 때가 그립냐"고 물었을 때 바하르는 남편의 미소를, 아이의 눈망울에 비친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그런 건 그립지 않아"하고 답했다. 정말로 그리운 것들이 있었으니까.

행복했을 것이다. 북적거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보낸 그날 저녁은 얼마나 완벽했던가. 아버지는 다정했고 아이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빵을 구워 돌아온 바하르는 하나를 집어 조카의 입에 물려주고는 바구니를 가족들 가운데 놓았다. 그녀는 악기를 집어 들고 오빠와 함께 연주했다. 멋진 저녁이었다.

다음날인가. 한 무리 검은 옷의 사내들이 바하르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아버지와 오빠와 남편은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총에 맞아 쓰러졌다.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로 끌려갔다.

바하르가 소총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언덕 너머를 노려보기까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자리했다. 바하르는 시간을 가로질러 잊히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런 건 그립지 않아" 하고.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바하르(골쉬프테 파라하니 분)가 이끄는 여성부대원들.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바하르(골쉬프테 파라하니 분)가 이끄는 여성부대원들. ⓒ (주)이수C&E

 
한때는 소녀였던 태양의 전사들

<태양의 소녀들>은 쿠르드족 여성부대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쿠르드족은 2013년 이후 시리아와 이라크 등지에서 벌어진 IS의 잔혹한 학살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무장이라곤 구식 칼라슈니코프 소총 정도가 전부였지만 시리아 북부 산악지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IS의 진격을 저지했고 제 터전을 그 손에 넘겨주지 않았다. 이들의 20% 가량이 여성이었다고 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직접 총을 잡는 전투원이었다.

이들에 비하자면 훨씬 나은 무기로 무장한 이라크군은 IS가 몰려온다는 소식만큼이나 빠르게 후퇴를 거듭했다. 영화 내내 이라크 국기가 보이지 않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단 한 번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쿠르디스탄의 깃발, 노란 태양이 중앙에 새겨진 삼색기 앞에서 바하르와 여성 동지들은 웃고 먹으며 노래하다 잠든다. 쿠르드의 위대한 태양이 한때는 소녀였던 전사들을 비춘다.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야지디족 여성부대를 이끄는 바하르(골쉬프테 파라하니 분)의 뒤를 프랑스인 종군기자 마틸드(엠마누엘 베르코 분)가 따르는 장면.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야지디족 여성부대를 이끄는 바하르(골쉬프테 파라하니 분)의 뒤를 프랑스인 종군기자 마틸드(엠마누엘 베르코 분)가 따르는 장면. ⓒ (주)이수C&E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전쟁을 담았다

아내였고 엄마였으며 변호사였던 바하르는 IS에 납치돼 성 노예로 전락한다. 그 희망 없던 어느 날 바하르는 우연히 TV에서 옛 은사를 본다. IS에 납치된 여성들을 구하는 활동을 하는 은사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말한다. "내 전화번호를 알려드릴게요. 24시간 언제든 받을게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연락하세요." 바하르는 그 긴 전화번호를 단숨에 외워버린다.

여자에게 죽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믿는 IS대원에게 "네 동생은 여자에게 죽었다"고 굳이 알리던 바하르에게서 이제껏 그녀가 부딪쳐왔을, 또 마주하게 될 크고 높은 장벽을 본다. 절망과 포기를 강요하는 그 장벽 앞에서 바하르는 오늘도 "전진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을까.

바하르가 IS에 빼앗긴 마을을 되찾는 과정을 종군기자 마틸드가 곁에서 지켜본다. 소총을 매고 전진하는 여성들의 뒤를 카메라를 쥔 채 따르는 마틸드. 그녀가 벌벌 떠는 손가락으로 죽음 앞에 선 여성들을 찍는다.

동료 종군기자들이 마지막 헬리콥터를 타고 전장을 벗어날 때 "아직 할 일이 있다"며 남기를 선택하던 그녀의 표정에선 흔히 상상하는 결연한 결기 따위는 오간데 없다. 공포, 두려움, 절망감, 슬픔 따위가 범벅된 그 표정을 갖고서 그녀는 전장으로 향한다.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쿠르드 내 소수민족인 야지디족 여성들로 구성된 민병대를 이끄는 바하르(골쉬프테 파라하니 분).

영화 <태양의 소녀들> 스틸 컷. 쿠르드 내 소수민족인 야지디족 여성들로 구성된 민병대를 이끄는 바하르(골쉬프테 파라하니 분). ⓒ (주)이수C&E

 
도널드 트럼프, 당신은 대체

<태양의 소녀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어떤 전쟁영화보다 처절하다. 가져본 적 없는 나라와 영토와 존엄을 위한 싸움이며, 빼앗긴 가족과 희망과 평화를 향한 싸움이다.

이들이 치른 전쟁으로부터 5년여가 흐른 오늘, 쿠르드족이 처한 현실은 영화를 더욱 처절하게 만든다.

지난해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터키는 기다렸다는 듯 쿠르드족을 짓밟았다. 무너진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미군의 동맹군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쿠르드족은 적들 가운데 그대로 버려졌다. 쿠르드는 그들이 피 흘려 지켜낸 땅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지역에선 최근까지도 테러가 지속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철수를 결정한 요인은 오로지 '돈'이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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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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