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 프라임 - 인류세> 한 장면.

EBS <다큐 프라임 - 인류세> 한 장면. ⓒ EBS

 
"재난적 상황에서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인간 역시 멸종을 피할 수 없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던진다."

코로나19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바로 '인류세(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시대)' 이야기다. 최근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를 주제로 한 EBS <다큐 프라임 - 인류세>를 '2020 방송 대상' 수상작으로 발표하고 위와 같은 선정 이유를 밝혔다.

다큐는 총 3부작으로 구성됐다. 1부 '닭들의 행성'은 230억 마리에 달하는 닭들이 결국은 인류를 대표하는 화석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담았다. 2부 '플라스틱 화석'은 처음 플라스틱이 만들어지게 된 '우연'부터 플라스틱 때문에 몸살을 앓는 지구의 현주소를 재조명한다. 3부 '안드레의 바다'는 어부를 꿈꾸는 소년 안드레를 통해 오염된 바다의 현주소와 암울한 미래를 비춘다.
 
방송을 접한 이들이 깊은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건, 암울한 미래를 만드는 데 지금의 나도 일조하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이 아닐까. '치킨'이 우리 야식의 대명사가 된 지는 오래다.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앱을 통해 치킨을 주문할 것이다. 또 코로나19 확산으로 배달음식계가 호황을 맞으면서 그 과정에서 쓰이는 플라스틱은 매일 산더미처럼 어딘가에 쌓이고 있다. 그 플라스틱은 바다를 오염시키는 주범이며 혼탁해진 바다는 우리의 미래와 같이 암울하기만 하다.
  
지난 15일 <오마이뉴스>는 이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한 EBS 최평순 PD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260편의 방통위 방송대상 응모작 중 대상으로 선정된 소감부터 프로그램 제작과정, 그리고 지구와 인간의 현주소에 대한 이야기까지 들어봤다. 

최 PD는 2016년 외국 웹사이트를 통해 'Anthropocene'(인류세)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고 회상했다.
 
"보는 순간 단어 자체에서 힘이 느껴졌다. 해외에선 이미 유명했는데 우리나라에선 과학자들을 빼곤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과학계에서 관심 받는 연구 주제고, 국내에는 잘 소개되지 않은 단어니 이 용어를 잘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프로그램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수상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정말 뜻깊을 것 같다."

다큐 '인류세'는 기획부터 방송까지 2년의 시간이 소요됐고 총 10개국을 촬영했다. 긴 여정이었지만 시작 지점엔 최 PD 혼자 있었다. 그는 "메인작가, 조연출, 리서처, 촬영 감독, 음악 감독 등 한 명씩 제작 공정에 맞게 늘어났다가 줄기도 했다"라며 "평균 3~5명이 함께 작업했다"라고 소개했다.   

"우주인이 지구 방문해 이 시대 화석 찾는다면..."
 
 EBS <다큐 프라임 - 인류세> 한 장면.

EBS <다큐 프라임 - 인류세> 한 장면. ⓒ EBS


다큐는 150여 분에 걸쳐 끊임없이 인간에게 '경고'를 보낸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지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치닫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치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부 '닭들의 행성' 제목뿐 아니라 '치킨 프로젝트'라는 다소 흥미로운 소재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왜 '닭들의 행성'이란 타이틀을 붙였을까. 

"정말 닭들의 행성이라 그렇다. 인간은 78억인데,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는 닭의 수는 230억 마리다. 도축을 기준으로 삼으면 1년에 660억 마리의 닭이 죽는다. 한 번 상상해보자. 미래에 우주인이 지구를 방문해 이 시대의 화석을 찾는다면 어떤 것을 찾을까? 수로 보나 지구 전역에 퍼져 있는 분포도로 보나 닭이 가장 유력한 생물종이다. 물론 플라스틱도 만만치 않은 후보이기는 하다."

'치킨 프로젝트' 역시 맥을 같이 한다. 프로젝트의 면면을 들여다 보면 자못 심각하기까지 하다. 최 PD는 "치킨 프로젝트는 영국 레스터 대학교에서 전문가들이 모여 인류세의 관점에서 닭에 대해 전방위적 연구를 하는 것"이라며 "2008년 AI(조류인플루엔자)로 약 1000만 마리의 식용 닭이 살처분돼 대한민국 국토에 매립됐는데 조건이 맞는다면 인류세의 화석이 이 땅에서 나올 수도 있겠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2부 '플라스틱 화석'은 내용면에서 다소 충격적이다. 바다거북의 배에서 플라스틱이 나오는가 하면, 이역만리 떨어진 북태평양 해변에서 한글이 적힌 폐플라스틱이 발견된다. 다큐를 보는 내내 '정말 저렇게 심각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 PD도 촬영 현장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단다.
 
"현장에 갈 때 저도 항상 궁금하다. '심하다던데 정말 그럴까? 오늘 내 눈앞에 그 장면이 펼쳐질까?' 그렇게 반신반의하면서 가는데, 신기할 정도로 잘 펼쳐졌다. 바다거북은 충남 서천에 하루 가서 촬영하는 일정이었는데 그날 다섯 마리의 바다거북을 부검했다. 부검을 시작하니 첫 사체부터 플라스틱이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제품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플라스틱 라벨의 글씨가 선명했다. 하와이 해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먼 곳까지 왔으니 열심히 한국산 쓰레기를 찾아야 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금방 찾았다. PD 입장에서는 정말 효율적인 촬영이었다. 하지만 촬영에 쉽게 성공해도 안타까울 때가 많다. PD이기 앞서 한 명의 지구인이잖나."
  
다큐 3부 '안드레의 바다' 주 촬영지인 인도네시아 '붕인섬'의 모습도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초지도, 공터도 없이 집과 길만 있는 빽빽한 이 섬은 외부에서 공수하는 물품들 때문에 '쓰레기섬'이 돼 가고 있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스마트폰을 뒤적이는데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지역 전문가가 오지를 다녀온 이야기를 칼럼으로 기고한 것이었는데, 설명을 돕는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78억 인구가 한 군데 몰려 있는 지구의 축소판과 같았다. 그렇게 붕인섬과 만나게 됐다."
 
무심코 스칠 수 있는 단어 하나, 장면 하나가 다큐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듯했지만 어려운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붕인섬' 강진을 꼽았다.
 
"답사 기간을 포함해 한달 정도 붕인섬에 체류했는데, 당시 진도 7.0의 지진이 발생했다. 전봇대에 달린 변압기가 터져 섬에 화재가 났다. 그때 정말 식은 땀이 났다. 마을 주민들이 바닷물을 길어서 불길을 잡아 34채만 타는 정도로 끝났는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다 바다로 나가서 배 위에서 생활을 하더라. 결국 출장을 연장하면서 시간을 더 투자한 끝에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붕인섬 상황까지 담을 수 있었다." 

"지상파에서 환경 프로그램 찾기 힘든 이유는…"
 
 EBS <다큐 프라임 - 인류세> 한 장면.

EBS <다큐 프라임 - 인류세> 한 장면. ⓒ EBS


최 PD가 환경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9년 코펜하겐 유엔기후변화 협정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그는 관련 뉴스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내가 하루에 쓰는 종이컵만 대여섯 개는 되는데, 지구를 구하는 엄청난 일은 못하더라도 내 일상에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는 물음표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2009년은 우리나라에 커피 문화가 자리잡은 지 몇 년 안 된 때여서 텀블러 쓰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기였는데, 다회용컵 쓰는 사람들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텀블러에 대한 이야기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서울환경영화제에서 상영했다. 그렇게 환경 문제에 눈을 뜨게 됐고 EBS에 입사해 <하나뿐인 지구>를 연출하게 됐다."

하지만 최 PD는 일을 할수록 매번 '환경문제는 참 어렵다'고 느꼈다. 환경은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인데, 그래서 더욱 뻔하다고 생각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현재 지상파에서 정규 환경 프로그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이런 맥락과 관계가 있단다.

"고발성으로 보기 싫은 쓰레기장을 보여주고 듣기 싫은 교조적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싫을 것이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비양심적인 일부 업자면 괜찮은데 시청자 당신이라고 하면 더 싫지 않을까. 흔히 말하듯 채널이 돌아간다. 그런 게 잦아지면 해당 프로그램은 폐지된다. 제가 입사하던 시기엔 우리나라에 정규 환경 프로그램이 두 개 있었다. EBS <하나뿐인 지구>와 KBS <환경스페셜>. 그런데 지금은 둘 다 없다."
 
하지만 최 PD는 이것이 역설적으로 환경 다큐멘터리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상과 맞닿아 있는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시청자가 다큐멘터리를 잘 봤다면 실천할 부분이 생긴다"며 "<인류세>를 보고 나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는 시청자가 생겼다면 어느 부분에선 성공한 셈"이라고 강조한다.

현재 5부작 다큐멘터리 <여섯 번째 대멸종>을 준비 중인 그는 "인류세적 관점에서 제작하고 있다"며 "세상이 더 어려워진 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제작 중"이라고 의지를 보였다.

"코로나19로 인한 변화 제일 커"
 
 플라스틱 암석 촬영장에서 이야기중인 최평순 PD.

플라스틱 암석 촬영장에서 이야기중인 최평순 PD. ⓒ 최평순


'인류세'를 기획할 당시가 2017년이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지구, 환경에 대한 사회적 인식차이도 크게 변했다. 최 PD는 이것이 코로나19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2017년 기획 당시엔 '미세먼지', '플라스틱' 두 가지가 가장 이슈였다. 당시엔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만 마스크를 썼다. 지금은 상시적으로 마스크를 쓴다. 언택트로 인해 음식 배달과 택배가 늘면서 플라스틱을 비롯한 포장재 사용이 증가한 것도 문제다. 기후 변화까지 안 가더라도 코로나19로 인한 변화가 제일 크다. 다큐를 위해 인터뷰했던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우리는 점점 금성 같아지고 있'다고 말했었다. 모두가 마스크 쓰는 이 시기에 그 말을 계속 곱씹게 된다. 정말 인류세를 살고 있다."

한낱 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줄 누가 예측했을까. 그래서 다큐의 경고가 더 무섭게 다가온다. 다큐는 그동안 지구상에 5번의 멸종이 있었고, 현재 6번째 멸종이 진행중이라고 경고한다. 어쩌면 '인류세'를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대멸종의 파국을 피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최 PD의 생각이 궁금했다.  

"(대멸종에 대해) 석학들에게 많이 물어본다. 지구시스템과학자 윌 스티픈(William Steffen) 호주 국립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지구가 46억 년을 버틴 것처럼 앞으로도 긴 시간을 버틸 것이라고. 그러나 20만년 전에 출현한 인류가 지구 시스템을 안 좋게 바꾼다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최 PD는 일개 PD인 자신이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서 그 바통을 시청자들에게 넘겼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전세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어쩌면 지구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행동은 문제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방송 내용 중 다음 대목이 주는 울림이 더 큰 이유다.
 
2019년 5월 21일 인류세 워킹 그룹은 34명의 위원 중 29명의 찬성으로 원폭 투하에서 대기 핵실험 중단까지의 기간을 인류세 시작으로 보자는 안을 통과시켰다. 현재 지질학계는 인류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 <EBS 다큐프라임 '인류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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