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서재에 꽃을 들인다. 물을 갈아주고 가지를 치고 정성을 다해 돌봐도 언젠가는 잎이 지고 줄기가 시든다. 서운하지만 인력으론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에 선을 다하자고.

대상은 그대론데 마음이 먼저 시들 때도 있다. 마트에서 사온 대용량 과자에 더는 손이 가지 않는 것도 그런 경우다. 분명히 처음은 그렇지 않았다. 시식코너에서 처음 맛을 보았을 땐 꼭 마음에 들었으니까. 질리는 것도 사람 마음대론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 모든 건 변한다. 오늘 핀 꽃은 언젠가 시들고 변덕스런 입맛도 장담하기 어렵다. 때로는 냉동고에 꽁꽁 얼려둔 먹거리처럼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있었으면 싶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삶이며 세상이다. 가만히 과자를 씹으며 병에 꽂힌 꽃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마침내 변하고 말겠지만, 그것도 그대로 나쁘진 않다고.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포스터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포스터 ⓒ (주)프레인글로벌

 
불행에서도 의미를, 이별에서도 아름다움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한국에서 유독 유명한 일본영화다. 영화팬 가운데 이 영화를 모르는 이가 드물고, 일본영화를 좋아한다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모든 영화가 그와 같은 애정과 관심을 받기는 어려우니, 특별하다고 해도 좋겠다.

'무엇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본다. 영화에 담긴 많은 감정과 생각 가운데 오늘의 한국인에게 어색하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 모두가 문제가 되지 않았을 만큼 영화는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을 받았다. 모든 현상엔 원인이 있는 법이니, 틀림없이 이유가 있다.

영화는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와 쿠미코(이케와키 치즈루 분)의 연애담이다. 만나고 헤어지기까지를 다뤘으니 즐거운 영화라 보기는 어렵겠으나 온전히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다. 바로 이점이 이 영화의 특별함이다.

어떤 영화는 사랑을 삶의 종착역인 듯, 행복을 인생의 목표인 듯이 다룬다. 하지만 어떤 인간은 불행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이별에서도 아름다움을 이룬다. 츠네오와 쿠미코의 이야기도 그런 종류의 것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 컷.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와 함께 호랑이를 보러 온 쿠미코(이케와키 치즈루 분). 둘의 시작점을 상징하는 호랑이는 영화 제목에도 그대로 쓰였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 컷.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와 함께 호랑이를 보러 온 쿠미코(이케와키 치즈루 분). 둘의 시작점을 상징하는 호랑이는 영화 제목에도 그대로 쓰였다. ⓒ (주)프레인글로벌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구름을 보여줬다

대학생 츠네오는 우연한 계기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쿠미코를 알고 가까워진다. 처음엔 호기심이었고 나중엔 동정이었을 관계 속에서 츠네오는 쿠미코를 여자로 느끼기 시작한다. 쿠미코 역시 다가오는 츠네오가 싫지 않다.

쿠미코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낸다. 할머니(신야 에이코 분)가 장애가 있는 손녀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는 어두운 새벽, 할머니가 미는 유모차에 실려 바깥바람을 쐬는 게 쿠미코가 바깥 세상과 만나는 전부다.

그런 쿠미코에게 츠네오는 세상을 보여준다. 바깥소식을 가져오고 말동무가 되어주고 나중엔 아예 함께 외출도 한다. 한낮의 햇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지나치는 자동차와 곧게 선 가로수가 모두 새롭다. 들판에 누운 쿠미코는 하늘을 보며 말한다.

"저 구름도 가져가고 싶어."

츠네오와 쿠미코는 2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연인으로 지낸다. 그리고 마치 예정됐던 것처럼 담담히 이별을 맞는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 컷. 쿠미코(이케와키 치즈루 분)가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에게 연근조림을 건네는 장면. 쿠미코에게 풋풋하게 싹튼 감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 컷. 쿠미코(이케와키 치즈루 분)가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에게 연근조림을 건네는 장면. 쿠미코에게 풋풋하게 싹튼 감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 (주)프레인글로벌

 
사랑이 지고 새 마음은 피겠지만

이 영화의 멋은 사랑이 지고 새 마음이 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점에 있다. 어느날 쿠미코가 버리려 내어놓은 유모차를 보고서 이웃집에 사는 아이가 "버릴거냐"고 묻는다. 츠네오에게 말해 고치지 왜 버리냐는 것이다. 쿠미코는 아이에게 "못 고친다고 하더라" 하고 답한다.

영화가 말 없는 아이의 표정을 담담하게 잡아낼 때, 관객은 깨닫는다. 쿠미코를 향한 츠네오의 마음이 시들어 떨어지고 있음을. 쿠미코의 유모차에 스케이트보드를 연결하던 츠네오의 모습을 이 아이는 기억한다. 더는 유모차를 고치려 하지 않는 츠네오에게서 아이는 무엇을 느꼈을까.

시들어 떨어지는 게 잘못은 아니다. 세상 모든 건 변하고, 저마다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기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며 애정이라고 다르지 않다. 물고기모텔에서 세상에서 제일 야한 밤을 보내고 곯아떨어진 츠네오 곁에서 쿠미코는 이렇게 읊조린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언제고 츠네오가 곁을 떠날 수 있단 걸 알면서도 쿠미코는 최선을 다한다. 그의 곁에서 세상을 보고 겪으며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다시 길 잃은 조개껍질 신세가 되어 깊은 해저에 홀로 놓일 줄 알면서도 억지로 헤어짐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속 여인 '조제'처럼 열심히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 컷. 쿠미코와 헤어진 뒤 복받치는 감정에 오열하는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 영화는 그의 오열을 차도 너머에서 거리를 두고 잡아낸다. 그 감정마저도 씻겨질 것임을 중립적 시선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 컷. 쿠미코와 헤어진 뒤 복받치는 감정에 오열하는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 분). 영화는 그의 오열을 차도 너머에서 거리를 두고 잡아낸다. 그 감정마저도 씻겨질 것임을 중립적 시선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 (주)프레인글로벌

 
호랑이부터 물고기까지 조제가 됐다

영화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란 제목이 붙은 이유는 분명하다. 처음 츠네오와 보았던 '호랑이'와 이별을 예감하게 했던 '물고기' 모텔에서의 시간 사이에서 쿠미코는 열심히 사랑했으니까. 조제가 그랬듯.

영화의 결말에서 쿠미코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가 고등어를 사와서는 가만히 굽는다. 츠네오를 만나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특별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이란 감정은 영원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남긴 흔적을 갖고 삶을 지속한다.

그리고 어떤 이별은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든다. 쿠미코가 그러했듯.

아니라도 괜찮다. 주저앉아 울어버린 츠네오에게도 다시 살아갈 삶이 있음을 관객 모두가 안다. 사랑이 피고 다시 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마음이 자리 잡는 건 그렇게도 자연스럽다.

영원할 줄 알았던 무엇을 잃는다면 조금은 덜 행복해지겠지만,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다는 게 이 영화의 결말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렇게 삶을 긍정해낸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주)프레인글로벌 이누도 잇신 이케와키 치즈루 김성호의 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