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장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장면 ⓒ KBS2


노희경 작가는 삶을 두세 배로 늘려 사는 비결이라도 있는 걸까? 그래서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이 방영됐던 당시 실은 43살이 아니라 100살은 훌쩍 넘어 있었던 게지. 그게 아니라면 연애는 한 백번쯤? 직업도 열 번 이상은 갈아타면서 온갖 인간군상을 다 경험했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진한 성찰의 내레이션들로 드라마를 가득 메울 수는 없는 일이다.
 
2008년, 그때 첫아이는 15개월이었다. 생초보 엄마였던 나는 아이의 잠버릇을 제대로 들여주지 못해서 그때까지도 아이는 종종 자다 깨 칭얼대곤 했다. 겨우겨우 '육퇴(육아 퇴근)'한 뒤 <그들이 사는 세상>에 한 발 담글라치면 야속하게도 아이가 깨 엄마를 찾았고 덕분에 거실에서 아이 방으로, 다시 거실로 엉덩이를 들썩대면서도 <그들이 사는 세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를 쓰려고 드라마를 다시 정주행해보니 '이러니 그랬지' 싶다. 작가, PD, 배우, 스태프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로 고군분투하며 드라마를 제작하는 숨 가쁜 현장 이야기가 생생히 담겼고, 그 안에서 또 각기 다른 삶의 무게를 짊어진 인생들이 얽히고설켜 삶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드라마는 사랑 이야기다. 그 '흔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결코 '흔하지 않은' 드라마. 그 흔하지 않음은 노희경 작가의 핑퐁처럼 튀어 오르는 대사와 표민수 PD의 감각적인 연출에서 나온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달리 다가오는 맛을 곱씹으며 여전히 '다시보기' 버튼을 누르는 마니아들을 만들어낸 건 내레이션 덕이기도 하다.

자칫 드라마의 텐션을 늘어트리고 지루함을 자아낼 수 있는 내레이션의 남발(?)을 오히려 기대하게 되는 희한한 드라마. 어처구니없는 인생살이지만 그럼에도 드라마보다 아름다운 세상, 몇 번을 해봐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기 때문이고, 그 성찰이 노희경 작가만의 군더더기 없고 찰진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앞통수를 맞아도 분한데 인생은 늘 뒤통수를 친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장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장면 ⓒ KBS2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일은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6회 '산다는 것' 중)
 
이십 대 초반, 엄마에게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너도 살아봐라!"였다. 속에서는 '아직 안 살아봤는데 어쩌라고. 살아본 만큼, 경험한 만큼, 그렇게 내가 직접 느끼면서 살 거야' 하는 반항심이 모락모락 끓어올랐더랬다. 아직 그 시절의 엄마 나이만큼 살지도 못했지만 이젠 알겠다. '모든 게 다 별일'이었던 치기 어린 나를 보며 엄마는 그 말이 저절로 나왔겠구나. 머리로 이해는 안 될지언정 먼저 살아본 엄마의 경험치를 믿고 무조건 따를 만큼 순종적이진 못했던 나를 엄마는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겠구나.
 
몇 년 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인생의 복병을 만났다. 지병이 있으시긴 했지만 당장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기에, 준비하지 못했던 죽음 앞에 대차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아버지를 미워했던 많은 날들이 무색하게도 다정했던 모습, 좋았던 기억만이 매일같이 반복재생되어 괴로웠던 기억. 저 내레이션 앞에 누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있을까. 앞통수를 맞아도 분한데 인생은 늘 뒤통수를 친다.
 
난관은 예상치 못한 길목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불쑥 내 앞을 막아서고,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들이 여전히 발목을 붙든다. 물론 인생은 원하는 순간에 알아서 '잠잠해져' 주지도 않는다. 그런 인생을 극중 인물 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때 처음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같은 세상의 어떤 두려운 일도 한번, 두 번 계속 반복하다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고 만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만 해도 인생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로 시간이 가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래된 애인의 배신이 그렇고, 백번 천번 봐도 초라한 부모님의 뒷모습이 그렇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웃는 준영의 모습이 그렇다.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그래서 너무나도 낯선 이 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14회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몇 가지' 중)
 
"나는 결코 인생이 만만하지 않은 것인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 화해와 갈등, 원망과 그리움, 이상과 현실, 시작과 끝, 그런 모든 반어적인 것들이 결코 정리되지 않고 결국은 한 몸으로 뒤엉켜 어지럽게 돌아가는 게 인생이란 것쯤은 나는 정말이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니, 안다고 착각했다. 어떻게 그 순간들을 견뎠는데 이제 이 정도쯤이면 인생이란 놈도 한번쯤은 잠잠해져 주겠지. 또다시 무슨 일은 없겠지. 나는 그렇게 섣부른 기대를 했나보다." (16회 '드라마처럼 살아라3' 중)
 

"그가 지키지 못해도 내가 지키면 그뿐인 것 아닌가"

이런 만만찮은 인생이 그래도 아름다운 건, 그래도 살만하다 느껴지는 건, 그 속에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준영(송혜교 분)이 헌팅장소인 바닷가 마을에 가 있던 정지오(현빈 분)를 찾아가 잠깐의 꿀같은 만남을 가지는 장면은 '그래, 사랑의 설렘은 이런 거지' 두고두고 미소짓게 한다.

멀리 보이는 지오를 향해 준영이 소리친다. "버스에서 두 시간 자고 선배 만나러 왔어. 나 또 촬영하러 가야 돼. 빨리 와. 출발 사십 분 전!" 잠깐이라도 잠을 자지 왜 왔냐, 타박하는 지오에게 준영은 다시 소리친다. "출발 삼십구 분 오십 초 전!" 웃으며 준영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지오. 그런 지오와 빨리 오라 손흔드는 준영의 모습이 교차되며 준영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순정을 강요하는 한국드라마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순정적이지 못했던 내가 싫었다. 왜 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을까. 내가 이렇게 달려오면 되는데. 뛰어오는 저 남자를 그냥 믿으면 되는데. 무엇이 두려웠을까.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이 남자에게 순정을 다짐했다. 그가 지키지 못해도 내가 지키면 그뿐인 것 아닌가." (5회 '내겐 너무도 버거운 순정' 중)
 
그러나 영원히 지속할 것만 같던 그 달콤한 사랑이 어느날 불쑥 그 차디찬 끝을 들이밀기도 하는 게 또한 인생 아니던가. 설레던 첫사랑과 헤어져 밤마다 눈물로 베겟잎을 적시던 기억. 헤어짐의 이유를 몰라 하루는 '나쁜 X'이라 욕하고 또 하루는 '내가 이 모양이니까' 자책하던 날들을 겪어본 이라면 다음 내레이션들에 공감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다. 누군 그게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초라함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짐에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들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 뿐." (11회 '그의 한계' 중)
 
'축제같은 그날'은 이미 온 게 아닐까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장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한 장면 ⓒ KBS2

 
<그들이 사는 세상>이 지니는 또 하나의 매력은 비중이 크든 작든 존재감 넘치는 인물들에 있다.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배역이 자신만의 성격과 스토리를 지니고서 생기있게 반짝인다. '미친 양언니'란 별명의 성미 급하고 앞뒤 안 가리는 뽀글머리 조감독 양수경(최다니엘 분)이 그렇고, 보이시한 말투와 옷차림으로 '김군'이라 불리는 조감독 김민희(이다인 분)가 그렇다. 거침없는 말투로 때론 싸가지 없어 보여도 살뜰히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인기작가 이서우(김여진 분)가 그렇고, 인정 많고 농담 좋아해 후배들에게 인기 많은 드라마국 CP 박현섭(김창완 분)이 그렇다.
 
모든 인물들에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고 설명할 거리가 있다. 같은 이유에서 지오와 준영 외에 다른 두 커플의 사랑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까칠하고 얄밉지만, 능력만은 출중한 PD 손규호(엄기준 분)와 천진난만하고 엉뚱한 신인 여배우 장해진(서효림 분)의 사랑은 상큼하고 애틋하다. 마음 가는 대로 사는 톱배우 윤영(배종옥 분)과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한 여자만을 바라보는 국장 김민철(김갑수 분)의 사랑은 깊고 묵직하다.
 
"어차피 비극이 판치는 세상, 어차피 아플 대로 아픈 인생, 구질스런 청춘, 그게 삶의 본질인 줄은 이미 다 아는데 드라마에서 그걸 왜 굳이 표현하겠느냐.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할 가치가 없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말하는 모든 비극이 희망을 꿈꾸는 역설인 줄 알아야 한다"는 지오의 주장은 작가의 생각이었을까.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제작현장에서 "하나 둘 셋, 큐!"를 외치는 지오와 준영의 눈에 희망이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흐르는 준영과 지오의 내레이션.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도, 지금 살고있는 이 세상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 순 없을 거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동료들과 포기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내가 사는 세상처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드는 축제 같은 그날까지." (16회 '해피엔딩의 역설' 중)
 
그러나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축제같은 그날'은 이미 온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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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째 손 맞잡고 함께 걷는 한 남자, 그리고 꽃같고 별같은 세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 런던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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