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망친 여자>포스터

영화 <도망친 여자>포스터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콘텐츠판다

 
홍상수 감독이 살아 있는 거장 중 하나로 불리는 이유는 치부의 영역까지 망설임이 없다는 점이다. 다음 작품에서는 얼마나 더 많이, 깊이, 자기를 구겨 넣을지 기대된다. 겉과 속이 다름을 철저히 숨기는 위선적인 인간보다 지질해 보일지 몰라도 속마음 숨기지 않음의 미학이 있다.

따라서 자기비판, 반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홍상수 영화를 봐라'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홍상수 영화에는 인간 실격과 아이러니가 있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부끄러움, 반성, 분노, 욕망, 블랙코미디는 여전히 인간의 내면을 파고든다. 이번 작품도 일상을 공통분모로 그 순간 자체를 중요하게 만드는 무드가 잘 담겨 있다. 세 파트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성장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세 군데를 돌며 알아차린 것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콘텐츠판다

 
영화 <도망친 여자>는 결혼하고 5년 동안 한 시도 떨어져 본 적 없는 남편이 출장 간 사이 감희(김민희)가 세 명의 친구를 만나는 에피소드다. 두 번의 약속된 만남과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말과 진실, 관계를 탐구한다.

감희는 도시 근교의 빌라에서 영순(서영화)과 만난다. 남편 없이 처음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다. 고기를 굽고 막걸리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다. 영순은 남편과 이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사 왔고 작은 텃밭을 일굴 집을 샀다. 마음 맞는 룸메이트 영지(이은미)와 비로소 안정된 삶을 찾은 듯 보인다.

다음날, 서울 한복판에 사는 수영(송선미)을 만난다. 수영은 인왕산이 보이는 동네에 전세 살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다. 언젠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실현했다며 내심 뿌듯해한다. 최근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술집에서 마음이 통하는 건축가도 만나 들떠 있다. 아내와 별거 중인 남자지만 개의치 않는다. 내가 좋으면 된다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편이다.

그날 오후. 영화를 보러 간 극장에서 뜻하지 않게 소원해진 친구 우진(김새벽)을 만나다. 감희는 우진과 불편한 사이처럼 보인다. 감희가 사귀던 정 선생(권해효)이 우진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우진이 내내 껄끄러운 마음이었다며 진심으로 사과한다. 결혼에 회의적인 우진의 말이 감희의 마음을 흔든 걸까. 감희는 사과를 깎아 대접하는 우진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여전히 작고 초라한 남성들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콘텐츠판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대부분 지질하다. 또다시 남성의 권위와 위선을 들추며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감희가 만나는 남자들은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여성들과 관계 맺고 싶어 하지만 늘 밀려나고 우울해하며 패배의 쓴맛을 본다. 문제를 안고 여성들의 집에 끊임없이 찾아오고 떼를 쓴다. 대부분 프레임에서 뒷모습으로만 존재하거나 아예 프레임 밖으로 얼굴이 잘린 채 등장하기도 한다.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절대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영화 속 여성들은 대체로 단호하다.

그 백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듯 보이나 개인적인 부조리와 모순 사이에서 퇴색한 중년 남성 정 선생이다. 정 선생의 이중적 태도는 아내 우진이 들려주는 대사로 유추할 수 있다. 카메라 앞에서 피상적인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처럼 보인다는 걱정과 비난을 동시에 늘어놓는다. 그런 남편이 보기 싫어 TV도 강연도 보지 않는단다. 사귈 때는 몰랐는데 결혼해서야 알게 되는 진실처럼 들린다.

영화 속 여성들은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안락한 공간으로 초대해 식사와 수다를 즐긴다. 심지어 틀어졌던 관계까지도 회복하는 모양새다. 스스럼없이 행동하고 도와주며 연대한다. 하지만 남성들은 어딘가 나사 풀린 사람 같거나, 이해심이 없다.

심지어 등장하지 않는 감희의 남편까지도 비슷하게 묘사된다.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남편이 만들어 낸 결혼생활의 틀이다. 관객은 남편이 출장 간 건지, 별거 중인 건지, 도망쳐 집을 나온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지만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남자 없는 여자들, 맞서는 여성들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콘텐츠판다

 
두 번의 필연과 한 번의 우연이 있고 나서 감희는 급격히 고무된다. 영순은 3층에 올라가지 못하게 한다. 영순과 잠결에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포기하고 떠나온다. 두 번째로 찾아간 수영네 집에서는 입맛이 맞지 않더라도 수영이 만들어 준 음식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찾은 극장에는 자기 의지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다양성 영화관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음식물을 섭취하고, 건물 지하에서 북 콘서트를 준비한다는 정 선생을 마주치자 불만을 쏟아내다 먼저 자리를 피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던 것처럼 정 선생을 만나 좋았던 기억까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비로소 감희는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극장을 떠났다가 되돌아와 다시 영화를 본다.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이 시간을 온전히 어떻게 쓸지는 나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듯 영화에 빠져든다.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의 내용을 안다면 메시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망친 여자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번 작품은 유독 여성으로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남자 없이 굳건한 여성들은 세상의 중심이라 착각하는 오만한 존재들을 사이에서 선택권을 획득한다. 끊을 수 없는 고리란 없고 도망칠 수 없는 관계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도망친 여자>는 영화 뮤즈이자 연인 김민희와 함께 한 7번째 영화다.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된다. 보이지 않지만 복잡한 관계의 얽힘처럼, 명확하지는 않지만 늘 어떤 의미에서든 유의미함을 보여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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