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 ⓒ tvN

 
코로나 때문에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느라 가을이 와도 반갑게 파란 하늘을 맞으러 나갈 수가 없다.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었을,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어지럽게 날아들 강변공원이 눈에 선하지만 발걸음 하기가 조심스럽다. 게다가 명절인 추석에 가족끼리 모이는 것조차 혹시나 하는 마음에 께름칙하다.

예년 같으면 당연히 부모님 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이라도 빚으며 북적거렸을 텐데, 휴가철마다 반복되는 코로나의 급격한 재확산을 막기 위해 이번에는 각자 집에서 차분하게 명절을 보내라는 정부의 권고를 따르자니 마음 한구석이 못내 허전해지는 게 사실이다.

가을이 와도 온 것이 아니요, 추석이 와도 마음껏 즐거울 수가 없으니 거리두기로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 더욱 개운치가 않다. 이 찌뿌듯함을 날려버릴 묘책으로 요즘 유행하는 옛날 드라마 다시 보기는 어떨까? 그중에서도 올해 2020년 1월, 넷플릭스에 소개되며 다시 국내 시청자는 물론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요즘 인기몰이 중이라는 우리의 영원한 쌍문동 친구들 이야기, <응답하라 1988> 시청을 적극 권해본다. 
 
쌍문동 이웃들, 그들의 진한 인간미에 흠뻑 취하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즈음 1971년생 다섯 명의 청춘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니,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던 나의 예민함과 우울한 증상에도 확실한 효과를 보았기에 더욱 자신 있게 권해 드린다. 요즘 딱히 크게 웃을 일도, 울 일도 없어 어석거리기만 하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오랜만에 흘리는 뜨거운 눈물과 터지는 박장대소에 시원하게 씻겨나간 듯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담다디 춤과 소방차 춤을 익살스럽게 추어대는 덕선(혜리 분)과 동룡(이동휘 분)을 보며, 수술을 앞둔 여린 아들을 안심시키느라 앞에선 센 척, 강한 척하지만 정작 뒤에서는 몰래 흐느끼는 정봉이 엄마(라미란 분)를 보며, 윤수일의 <아파트> 노래에 너나없이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신이 난 쌍문동 이웃들을 보며, 나도 어느새 그들의 진한 인간미에 흠뻑 취하게 된다. 

<응답하라 1988>는 총 20회로, 한 회당 1시간 30분 정도 분량인데, 매회 심금을 울리는 에피소드들의 연속이다. 닭다리도, 계란 프라이도, 심지어 생일 케이크까지 언니와 동생에게 밀리는 둘째 딸의 서러움이 담긴 이야기, 지켜야 할 가족이 있어 무섭고 두려워도 참아내는 아빠들의 애환, 가출해도 모를 정도로 너무나 바쁜 부모에게 서운한 아들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퇴근길에 동네 포장마차에서 이웃들과 흉금 없이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동네 아저씨들이 부럽고, 삶은 고구마에 꼬막무침에 국수, 어떨 때는 함박 스테이크까지 함께 나눠먹는 이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메말랐던 가슴이 몰랑몰랑해진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드라마의 핵심 관전 포인트는 '덕선이가, 정환(류준열 분)이와 택(박보검 분)이 중 과연 누구와 사귀게 되는가'이다. 방영 당시에도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이니, '어남류'니 말들이 많았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덕선의 마음은 오락가락이라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다.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 tvN


등굣길의 만원 버스 안, 둘러싸인 남학생들에게 떠밀리지 않도록 덕선이 뒤에서 팔에 힘줄이 솟을세라 꿋꿋하게 버팀막이 되어 주는 정환이는 딱 여심 저격이다. 평상시에는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귀찮게 하는 것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표하다가 급박한 상황에서 갑자기 덕선을 들쳐 안고 뛰어가는 택이의 박력 있는 모습에도 안 설렐 수가 없다.

과연 덕선이의 선택은 츤데레 정환이인가, 반전남 택이인가? 정환과 덕선, 택이와 덕선의 표정 변화나 행동에 드러나는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쌍문동 인생 상담가 동룡이 덕선에게 한 조언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귈 것인가' 아니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사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녀들과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살짝 자녀들의 애정관도 엿볼 수 있고, 자녀들은 부모들의 소싯적 연애 경험담까지 덤으로 들을 수 있다면 추석을 함께 보내는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껏 날 세우고 살아가는 코로나 시대 필요한 조언

<응답하라 1988>의 모든 일화가 사랑스럽지만 그중에서도 따뜻한 말 한마디 편이 마음에 남는다. 걸핏하면 염병, 니미럴 등을 입에 달고 사는 덕선 아빠는, 덕선과 몸싸움을 벌여 경찰서에서 만난 노을이의 여자 친구를 집으로 데려다 저녁을 먹이는 자리에서 한소리 한다.

"참, 그라고 수경이 너도. 머리가 그게 뭐데. 아, 부모님이 물려주신 예쁜머리가 있는디 뭐 염병했다고 빨았다 넣다, 빨았다 넣다 해싸. 그라고 저, 화장도 지우고. 귀신같은 화장. 옷도 좀 학생답게 단정허니 입고, 엉? 아저씨가 일주일 후에 확인한다잉? 알았제?"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마음을 잡지 못해 거리에서 방황하던 노을이 여자 친구는 노을이 아빠의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말이 고마웠는지 다소곳이 "네" 대답하고는 웃으며 밥을 한 그릇 더 청한다. 이어서 흐르는 내레이션이 뭉클하다. 
 
말에는 가슴이 담긴다. 그리하여 말 한마디에도 체온이 있는 법이다. 이 냉랭한 악플의 세상이 그나마 살만하도록 삶의 체온을 유지시켜 주는 건, 잘난 명언도 유익한 촌철살인도 아닌 당신의 투박한 체온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이다.

어쩌면 코로나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한껏 날을 세우고 경계하며 살아가는 이 시기에 정말 필요한 조언인지도 모른다. 투박하지만 서로를 아껴주는 진심 어린 따뜻한 말 한마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응답하라 1988>를 이번에 다시 보면서 5년 전 처음 시청할 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예전엔 로맨스와 좌충우돌 학창 시절을 보내는 청춘들의 시점에 공감해 몰입했다면, 이번에는 금이야 옥이야 자녀를 길러내는 부모들의 시점에 공감하며 시청했다는 점이다.

갱년기 불면증에 시달리는 정환이 엄마는 바로 내 얘기였고, 장성해서 제 갈길 찾아 부모 품을 떠나는 자녀들 이야기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드라마 속의 청춘들처럼, 부모들처럼 나의 시간도 삶의 절정을 지나 속절없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서글퍼지지만 이미 보낸 시간들을 뒤돌아 볼 때에 부끄럽지만은 않기를 바라본다.

<응답하라 1988>이 나에게 보낸 시그널에 응답하듯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 tvN


마지막으로 <응답하라 1988>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 바로 중요한 순간마다 빼놓을 수 없는 그 시절 음악들이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으로 구슬피 시작하는 김창완의 <청춘>은 물론, 이적의 <걱정말아요 그대>는 음악이 흐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밖에도 향수에 젖게 하는 주옥같은 곡들이 많은데 이문세의 <소녀>, 동물원의 <혜화동>, 이수만의 <행복>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88년 대학가요제 대상곡 <그대에게>를 부르는 무한궤도 신해철의 앳된 모습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으니 레트로 감성에 제대로 빠질 수 있다. 당시 십 대들 사이에서 대인기였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하는 이문세의 목소리는 귀한 보너스다. 

사회적 거리두기다, 격리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우울하고 외로운 이 시기에, 가족들과 송편을 맛보며 오순도순 <응답하라 1988>을 시청해 보자. 이웃 간의 정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서로를 다독이며 빈자리를 채워주는 이 인간미 절절한 드라마야말로 사람 간의 정에 목마른 이 시기에 딱 맞춤인 드라마인 것 같다. 쌍문동 이웃들에게서 얻은 힘으로 또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다.

그러고도 여전히 마음에 촉촉함이 남걸랑 오랜만에 이쁜 엽서 하나에 큼직한 글씨로 그 옛날 동창들에게, 또는 한동안 적조했던 보고 싶은 이들에게 잘 있느냐는 안부를 전해 봄이 어떨까. <응답하라 1988>이 나에게 보낸 시그널에 응답하듯이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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