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만큼 정직한 것이 없다. 몇 해 전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쳤던 이웃이 있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그는 한쪽 다리와 팔을 못 썼고, 지팡이와 발을 끌면서 아주 조금씩, 느리게 움직였다. 그가 하루에 얼마나 움직였을지는 알 수 없지만, 출근하는 아침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마주쳤다. 집요하게 매일 아침 길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던 그는 1년 반 후, 청년도 숨차하는 그 길을 지팡이 없이 걷고 있었다. 
 
록키, 밀리언 달러 베이비, 레슬러, 그리고 잉투기

권투, 레슬링, 격투기, 이런 싸우는 종목은 오로지 몸과 투지로 정정당당하게 승리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기에 아주 좋은 소재이다. 몸 밖에 가진 것 없는 청춘이 이루는 정직한 승리와 성공을 다룬 이야기는 뭉클하고 짜릿하며 성취감을 안겨준다. 1970년대 후반 희망과 승리감을 심어준 <록키>가 그렇고, 아무것도 없이 링 위에 올랐던 매기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도 몸과 투지만으로 노력하면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잉투기>의 태구는 저질 체력의 잉여로운 대한민국 청년이다. 그는 게임 아이템을 거래하러 나갔다가 젖존슨에게 기습을 당한다. 웹상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실제로 싸우는 '현피'를 당한 것이다. 처참하게 두들겨 맞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도배되고, 젖존슨은 인터넷에서 자취를 감췄다. 너무나 치욕스럽다. 갑작스럽게 당한 '현피'로 후유증까지 얻었고 태구의 비겁함과 지질함은 바닥을 모른다. 

복수심으로 젖존슨을 찾아다니는 태구는 너무 진지해서 코믹하다. 사는 게 지루한 고딩 격투기 선수 영자에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은 없어서 그녀는 태구를 돕는다. 태구는 잉투기 대회, 링 위에서 이종격투기로 붙어보자며 젖존슨을 도발하지만, 그는 잉투기 1회 챔피언이다. 그를 이기는 일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젖존슨 또한 태구 못지않은 찌질이 잉여다. 

모니터 앞에서 손가락 놀리며 키보드를 튕기며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으스대지만 현실에서는 지질하기가 끝이 없다. 잉투기를 통해 태구와 젖존슨은 비겁함을 탈출해 처음으로 정정당당한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태구도 처음으로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2020년은 노력하면 이길 수 있는 세상일까? 또, 모니터 뒤에 숨어있던 이들은 모습을 드러내 실력을 겨루는 압박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유쾌하다

<잉투기>는 정말 유쾌한 영화지만, 진지하고 심각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젖존슨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캐릭터는 의상과 단어, 말투 모두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키보드 위의 손가락, 모니터, 스크롤되는 댓글을 화면 분할로 리듬감있는 편집은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긴장감있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또한 캐릭터들의 심리와 스토리 전개에 속도를 더한다.  

빠르고 깔끔한 편집은 태구의 공포심과 위축된 심리를 제대로 전달한다. 후반부 간석오거리의 장면은 일본 영화 <동경 주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게으르게 찍고 편집한 장면이 하나도 없다. 독립영화로 분류되지만 상업 영화로 손색이 없는 퀄리티를 갖추고 있다. 어설프게 사회적이고 심각한 영화보다 대중 감각을 가진,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잘 만들기가 훨씬 어렵다. 

잉투기는 웹사이트 디씨인사이드의 격투 갤러리에서 실제 있었던 일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이제 록키처럼 우직하게 정정당당한 승부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보다 공정한 시합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 세상이다. 세상이 그런 적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잉투기>는 이 시합장을 '헬'이라 부르는 대한민국 청춘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대는 타고나는 것이고 삶은 공정하지 않다. 그래서 청춘이 싸우기를 바라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달피디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독립영화 한국영화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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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편집자, 출판사 호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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