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의 공식 포스터

<윤희에게> 포스터 ⓒ (주)리틀빅픽처스

   오래전, 나는 아주 인상적인 '러브레터'를 한 통 받은 적이 있다. 글재주가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상대는 안부를 묻는 가벼운 인사말도 없이 편지지에 그저 시 한 편을 달랑 적어 보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황동규/ 즐거운 편지 중)

얼마나 꾹꾹 눌러썼는지 편지지 뒷면이 오돌도돌했다. 시는커녕 문학적 감수성과는 담을 쌓고 살던 무뚝뚝한 이십 대 청년의 그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와닿았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어쨌든 정말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사실 그 편지를 그와 헤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받아볼 수 있었다. 사는 게 바쁘기도 했지만, 전기요금이나 수도요금 따위도 죄다 자동이체를 하고 있어서 굳이 우편함을 열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만약에 내가 그의 편지를 좀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까? 물론 아직도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편지에 적혀 있던 그 한 편의 시가, 그 한 편의 사랑이 나를 아주 오랫동안 울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끝내 붙들지 못한 사랑을 향한 미련이 아니라, 찬란했던 청춘의 한 시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때문이다.
 
엄마의 가슴 아픈 첫사랑

내가 한동안 잊고 살던 그 러브레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며칠 전 영화 <윤희에게>를 보고 난 뒤다. '윤희에게'는 평범한 고등학생 새봄이 우연히 엄마 앞으로 온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그 속에 담긴 엄마의 가슴 아픈 첫사랑을 엿보게 되면서부터 시작한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는 임대형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김희애 배우가 희망도 목표도 없는 삶을 꾸역꾸역 견뎌내는 여자 윤희 역을 맡아 열연했다. 엄마의 첫사랑을 추적해 나가는 딸 새봄은 김소혜 배우가 맡아서 상큼한 매력으로 자칫 밋밋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을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극 중 윤희는 오래전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가족의 반대로 연인과 이별한 뒤, 무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슬하에 딸 새봄을 두었지만, 그녀의 삶은 어쩐지 알맹이를 잃어버린 것처럼 하루하루 무료하고 허탈하다. 결국, 윤희는 남편과 이혼한 뒤에 새봄을 혼자 맡아 키우게 된다.
 
윤희의 전남편(유재명 배우)은 윤희와의 재결합을 원하지만, 윤희는 무작정 그를 밀어내기만 할 뿐이고, 새봄은 엄마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에게조차 온전한 곁을 내어주지 않는 엄마에게 서운한 새봄. 그때, 윤희 앞으로 편지가 도착한다.
 
새봄은 편지를 읽어 나가는 동안, 엄마에게도 한때는 생을 향한 호기심과 기쁨으로 반짝거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그 시절, 엄마 곁을 지켜주던 뜨거운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또한. "윤희에게"로 시작하는 그 편지는 훗카이도에서 '쥰'으로부터 보내진 것이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윤희의 고백
 
윤희에게 극중 장면 새봄이 윤희를 '엄마' 가 아닌 '여자'로서 이해해가는 과정 또한 아름답게 그린 영화입니다.

▲ 윤희에게 극중 장면 새봄이 윤희를 '엄마' 가 아닌 '여자'로서 이해해가는 과정 또한 아름답게 그린 영화입니다. ⓒ (주)리틀빅픽처스

 
잘 지내니? 오랫동안 너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지도 모르지. 벌써 이십 년이나 지났으니까.
 
엄마의 옛 연인 '쥰'의 정체가 미치도록 궁금한 새봄은 결국 졸업기념 여행을 핑계 삼아 윤희에게 함께 훗카이도로 떠날 것을 제안한다. 윤희에게 쥰을 만나게 해주고픈 새봄은 과연 뜻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윤희와 쥰의 사랑을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진 않는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서 얼마큼 서로를 원하다가 어떤 이유로 헤어짐을 택한 것인지, 관객은 쥰에게 부치지 못한 윤희의 답장을 통해 둘 사이의 일을 짐작할 뿐이다.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린 잘못한 게 없으니까.
 
쥰과 헤어진 뒤 자신에게 남은 날을 그저 견뎌내야 할 '벌'이라고 생각했다는 윤희의 고백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윤희와 쥰은, '그녀'들의 사랑을 세상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윤희'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중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러브레터와 끝내 보내지 못한 답장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랑하기 때문에 더없이 외로운 청춘들을 위해 영화 '윤희에게'를 추천하고 싶다. 오랜 세월 그리움조차 비밀에 부쳐야 했던 그녀들의 뜨거운 시절이 지금 당신의 마음을 천천히 움직일 영화, '윤희에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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