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조 바이든은 카말라 해리스 상원의원을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해리스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동양계 흑인 여성 부통령 후보다. 116회 미 의회에서 여성 하원의원은 최초로 100명을 돌파했다. 2016년에는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정면 승부를 펼쳤으며, 낸시 펠로시와 엘리자베스 워런의 존재감도 크다. 그러나 200여 년의 미국 역사 전체에서 정치는 남성의 영역이었으며 '2등 시민'인 여성은 오랜 시간 주변부에 있었다.
 
 TV 시리즈 <미세스 아메리카>의 배경인 1970년대 워싱턴 역시 마찬가지다. 왓챠를 통해 국내 공개된 이 작품은 ERA(Equal Rights Amendment, 성평등헌법수정안)의 통과를 둘러싸고 약 10년간 펼쳐진 정치 투쟁의 지난한 과정이다. (ERA는 1923년, 1세대 페미니스트 앨리스 폴에 의해 처음 발의되었다.)

<미세스 아메리카>의 주인공 필리스 슐래플리(1924~2016)는 반공 보수주의자이며 안티 페미니스트 여성이다. 그는 트럼프의 당선을 두 달 앞두고 <트럼프의 보수주의적 정당성>이라는 저서를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진영을 대변한 셈이다.
 
여성 정치인, '안티 페미'의 기수가 되다!
 
 <미세스 아메리카>

<미세스 아메리카> ⓒ 왓챠

 
필리스 슐래플리는 래드클리프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국방 정책의 전문가다. 공화당 후보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두 차례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남성 중심의 워싱턴에서 존재감을 입증하기 위해 안티 페미니즘의 기수가 된다. 여성 정치인의 자리를 욕망하는 것과 별개로, ERA의 통과를 막기 위해 헌신한다.

필리스는 선전, 선동을 통해 노골적으로 공포를 조장한다. 그는 'Stop Taking Our Privileges(우리의 특권을 빼앗지 말라)'는 구호를 내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파괴할 것이며, 여성들은 징집될 것이고,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에게 사랑받는 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라 말한다.
 
"여성해방운동은 가짜 미끼로 우릴 유혹하죠. 행복 말이에요. 현실을 직시해요. 아가씨들. ERA는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니까요. (중략)... 남편이 수십 년간 가정을 지켜온 늙은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어리고 예쁜 여자한테 가는 걸 막아주지도 못 하죠."
 

이 작품은 필리스가 여성 혐오와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상기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필리스는 이 가치를 내면화한 인물이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여성'으로서 겪은 피해를 은폐하는 인물이다. 정적들의 비판처럼 필리스는 위선자에 가깝다. '해방의 열쇠는 가정에 있다'고 힘주어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가정 주부로 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필리스가 겪는 차별은 워싱턴이 아니라 가정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필리스의 남편인 변호사 프레드 슐래플리(존 슬래터리)는 필리스의 워싱턴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남자가 아내를 두고 워싱턴에 가는 것과 여자가 가정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것은 다르다"라고 한다. 그는 가정을 돌볼 책임을 자신보다 유능한 아내에게 의탁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이다.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 필리스는 ERA의 통과를 막는 데 성공한다. 더 나아가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국의 역사를 움직인 셈이다. 그러나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그에게 내각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 살면서 한 번도 차별받아본 적 없어요"라고 웃으며 말했던 그였으나, 이 작품은 주방에서 과일을 깎는 필리스의 공허한 표정과 함께 작품이 마무리된다.

안티 페미니스트인 필리스의 삶이 페미니즘적 인식틀 안에서 해석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페미니스트 케이트 블란쳇은 자신의 정반대 성향 인물인 그를 절륜한 연기로 부활시켰다. 진보주의자 메릴 스트립이 마거릿 대처를 연기했던 <철의 여인>이 연상되기도 한다.
 
부지런히 싸우고, 또 손을 잡는 자매들
 
이 작품에서는 상반된 '여성 연대'가 대립한다. 필리스 슐래플리가 이끄는 'STOP ERA'에서는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백인 여성들이 연합한다. 그 반대 진영에는 <미즈>의 편집장 글로리아 스타이넘(로즈 번), 베티 프리던( 트레이시 울먼 ), 벨라 앱저그(마고 마틴데일) 등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페미니즘 제 2의 물결'을 이끌었던 이들은 강력한 '자매애'를 가지고 행동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정치적 세력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같은 진영 내의 '자매'들마저 맹렬히 대립한다. 당대 운동가들을 단일화된 절대선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내부의 복잡성을 표현해냈다는 점은 <미세스 아메리카>의 성취 중 하나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자들이 있는 반면, 이상주의자들은 최초로 대선 경선에 뛰어든 흑인 여성 셜리 치점(우조 아두바)을 지지한다. 베티 프리단은 성소수자 의제를 강조하다가 여성 인권의 증진에 방해가 될 것이라 우려한다. 흑인 여성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충분히 대변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갖는다. 레즈비언, 낙태권, 흑인 페미니즘 등 자매들은 각자 무게를 두는 지점이 달라 갈등하지만, 결국 굳건한 연대 의식으로 뭉친다. 셜리 치점이 다른 남성 후보들과 함께 단상에 섰을 때, 맥거번을 지지했던 벨라조차도 감격에 찬 표정을 짓는다. 방법론을 두고 갈등하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베티 프리단에게 전화를 걸어 따뜻한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다.
 
"처음 <여성의 신비>(베티 프리단의 저서)를 읽었을 때가 생각나. 왜 여자는 인류의 운명을 공유하는 대신, 되다 만 (지금의) 삶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당신의 책이 내 삶을 바꾼거야." - 글로리아 스타이넘
 
진보적 세계관에 근거한 작품이지만 필리스와 'STOP ERA'를 단순히 악마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반여성주의자들 역시 남성중심적 세계에서 자신을 굽혀야 했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ERA 반대 운동을 위해 휴스턴으로 떠난 앨리스(사라 폴슨)의 여정을 다룬 여덟 번째 에피소드 <휴스턴>은 이 지점을 탁월하게 다루고 있다. <미세스 아메리카>는 어떤 지점을 집중하고, 배제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이 작품이 집중한 것은 부지런히 욕망하고 투쟁하는 여성들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사회적 진보도, 그리고 '백래시(Backlash)'도 여성의 몫이다.

필리스 슐래플리의 활약으로, 당시 들끓었던 여성 운동은 예전과 같은 파괴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다. 혁명을 꿈꾸던 이 작품 속 운동가들의 대부분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거나,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역사는 1970년대에 단절된 채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미투 운동(#MeToo)에 힘입어 2020년 초, 버지니아 주의회에서 ERA가 통과되었다. ERA의 효력 발생에 필요한 38개 주의 비준이 모두 이뤄진 것이다. 여성들의 투쟁은, 지금도 돌고 돌아 우리의 시대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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