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참여한 프로그램의 시청률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시청률이라는 것은 표본가구의 샘플만을 조사한 수치이기 때문에 실제 전국에 있는 시청자들의 의중을 모두 반영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방송 관계자들이 시청률에 집착하는 이유는 시청률이 제작비 책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광고단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현재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1 채널을 제외한 지상파와 종편, 케이블의 모든 채널에서는 프로그램 시작 전후에 상업 광고가 붙는다. 특히 소비를 주도하는 20세부터 49세 시청자들의 시청률을 따로 계산한 '2049 시청률'은 기업과 광고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청률 지표로 꼽힌다.

하지만 경쟁이 워낙 치열해 지면서 프로그램 앞뒤로 달리는 광고만으로는 광고주와 기업을 완벽히 만족시키지 못한다. 기업들은 인기 프로그램의 안으로 직접 들어가 자연스럽게 제품을 노출하면서 자신들의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더 친근하게 알리고 싶어한다. 이제는 소비자들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된 간접광고, 즉 PPL이 방송가에서 점점 활발해지고 있는 이유다.

강하게 규제됐던 드라마의 상품 노출
 
 대한항공의 비행기와 로고는 <파일럿> 타이틀 화면에서 노을과 함께 멋지게 노출됐다.

대한항공의 비행기와 로고는 <파일럿> 타이틀 화면에서 노을과 함께 멋지게 노출됐다. ⓒ MBC 화면 캡처

 
심리학 용어 중에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말이 있다. 상대가 쉽게 인지하기 힘든 무의식적인 자극을 통해 인간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가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957년 미국 뉴저지에서는 영화 필름 중간중간에 육안으로 발견할 수 없는 1/3000초의 시간마다 "콜라를 마셔", "배고프면 팝콘을 먹어"라는 메시지를 넣어 내보냈는데 실제로 영화 상영 후 그 극장에서는 콜라와 팝콘의 매출이 상승했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이처럼 인기 프로그램에서 대중들의 호감도가 높은 출연자들이 특정 제품을 사용한다면 알게 모르게 상품의 호감도를 높일 수 있다. 방송 전후로 직접 제품을 광고하는 것을 넘어 프로그램 안으로 직접 침투(?)해 제품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으니 PPL은 기업들에게 탐나는 광고전략이 아닐 수 없다. 광고규제가 심했던 70,80년대까지 방송에서 상업성을 드러내는 걸 철저히 금지했던 국내 방송에서는 90년대 초반부터 PPL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수종과 한석규, 채시라, 김혜수, 이재룡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던 MBC 월화드라마 <파일럿>(1993)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항공사인 대한항공에서 드라마 제작에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이 때문에 작품 내에서 항공사 명칭과 마크가 그대로 사용됐다. 심지어 한진그룹 산하의 한국항공 대학교가 초반 드라마 속에서 꽤 비중 있게 등장했고 당시 대한항공 사장이었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파일럿>에 특별 출연했다.

그렇다고 언제나 노골적인 PPL이 드라마에서 용인된 것은 아니다. 1995년 SBS에서 현대자동차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는 주인공 강동준(이병헌 분)이 설립하는 자동차 회사를 '한국자동차'로 변형시켰고 대문자 H모양의 현대자동차 엠블렘 역시 소문자 h로 변화를 줬다(물론 드라마 속에서 현대자동차가 워낙 많이 등장해 어지간한 시청자들은 <아스팔트 사나이>가 현대자동차의 지원을 받은 드라마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지난 1999년 여성 기업가 민국희(김혜수 분)가 순수 국내 기술로 땅콩과자를 개발하는 과정을 그린 MBC월화드라마 <국희>는 크라운제과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이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크라운제과의 '산도'라는 제품명을 사용할 수 없었던 <국희> 측에서는 과자 이름을 '동그라미'로 바꿔 드라마를 제작했다. 다만 크라운 제과에서는 드라마 방영에 맞춰 '국희 땅콩샌드'와 '국희 쵸코샌드'를 동시에 출시해 2020년 현재까지도 판매하고 있다.

2010년 방송법 시행 후 활짝 열린 PPL 전성시대
 
 <스토브리그>에서 곱창은 어지간한 단역배우들보다 원샷이 많이 잡혔다.

<스토브리그>에서 곱창은 어지간한 단역배우들보다 원샷이 많이 잡혔다. ⓒ SBS 화면 캡처

 
사실 2000년대까지 방송가에서 간접광고는 일종의 '필요악'이었다. 방송국이나 외주 제작사들의 프로그램 제작 환경을 고려하면 PPL을 어느 정도 허용해야 하지만 당시 법적으로 이를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까지 규제할지 기준이 마땅치 않았다. 이 때문에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듀스, 현진영 같은 90년대 인기가수들은 의류 브랜드 상표가 크게 새겨져 있는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2010년 방송법이 시행되면서 음성적으로 자행되던 간접광고를 양성화해 방송사들이 정식으로 기업들로부터 PPL을 받아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그때부터 거의 모든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는 타이틀 화면이 끝나갈 무렵 '이 프로그램은 가상광고(간접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는 자막이 뜨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한국 방송가에 본격적인 PPL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크릿가든>(2010)의 마지막 회에서는 길라임(하지원 분)이 액션스쿨 이종수 감독(이필립 분)으로부터 하지원의 차기작인 영화 < 7광구 >의 시나리오를 건네 받는다. <상속자들>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온갖 알바를 해야 하는 차은상(박신혜 분)이 특정 카페에서만 일을 하는데,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 카페에서 발생한다. <집밥 백선생>에서 백종원을 비롯한 출연자들이 사용하는 각종 양념들과 식자재들은 대부분 tvN 방송국의 모기업에서 출시하는 제품들이었다. 

대중들도 원활한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서는 PPL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실제로 과도한 PPL 사용을 좋아하는 대중은 거의 없다. 최근 TV프로그램에서는 과도한 PPL 사용으로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떨어트리고 더 나아가 시청자들의 불쾌감을 유발시키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곤 한다.

이는 2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던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카우트 팀장과 유망주 선수가 떡볶이 건배를 통해 도원결의(?)를 하기도 했고, 선수들의 회식은 언제나 곱창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위트 있게 PPL 상품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놀면 뭐하니?>의 노골적인 PPL은 의외로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놀면 뭐하니?>의 노골적인 PPL은 의외로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 MBC 화면 캡처

 
물론 방송 제작진들이 무조건 PPL을 감추면서 시청자들과 '숨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PPL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시청자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최근 점점 늘어나고 있는 위트 있는 PPL 드러내기는 오히려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한다. 이런 'PPL의 양성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프로그램은 역시 MBC의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다.

지난 4월에 방송된 <놀면 뭐하니?> '부캐의 세계' 특집에서는 김치냉장고 PPL을 노출하기 위해 유재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김치가 싱싱한 이유에 대한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7월에 방송된 '싹쓰리' 특집에서는 이효리가 음료수를 마시는 장면에서 "수분도 채우고 M/V 제작비도 채우고"라는 노골적인 자막을 달기도 했다. 이는 돈을 좋아하고 세속적인 린다G의 캐릭터와 맞아 떨어지며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지난 5일 방송에서 2주 연속 시청률 5%를 돌파한 <백파더: 요리를 멈추지 마!>에서도 노골적인 PPL은 이어졌다. 백종원과 양세형은 싱크대와 연결된 듀얼 정수기를 홍보하기 위해 이미 세척한 청양고추를 상황극을 통해 다시 한번 세척하며 정수기의 기능을 소개했다. 백종원은 이 밖에도 시청자들에게 선물로 주는 협찬 상품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마이 리틀 텔레비전> 이후 5년 만에 복귀한 MBC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프로그램의 성격마저 바꿔 버리는 과도한 PPL은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작년 12월부터 지난 2월까지 방송된 <라끼남>이 스타감독 나영석PD의 연출과 강호동이라는 최고의 예능인이 출연하고도 특정 브랜드 라면 홍보방송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라끼남>은 이런 비판과 더불어 지난 6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특정 제품에 대한 과도한 광고를 이유로 법정제재에 해당하는 '경고'를 받았다. 

김은숙 작가의 최신작 <더킹 : 영원의 군주> 역시 '스토리 있는 홈쇼핑'이라는 비판 속에 드라마에 몰입하기 힘들 정도로 과도한 PPL로 시청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여러 부정적인 여론과는 별개로 PPL은 방송국과 제작사에는 제작비 충당을, 기업에는 제품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둘의 이런 이해관계가 깨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PPL은 계속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방송국과 제작사, 그리고 기업이 PPL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고 시청자들의 너그러운 이해가 더해진다면 PPL은 새로운 형식으로 광고를 소비하는 또 다른 문화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힐 것이다.
 
PPL 간접광고 파일럿 스토브리그 놀면 뭐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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