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꺼내보면 살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옛날 사진들이 있다. 하루하루 허겁지겁 살아내다 이사를 앞두거나 짐 정리를 하게 되었을 때, 문득 펼쳐보게 된 옛 사진첩은 몇 십 년 전의 과거로 삽시간에 나를 데려간다.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며 물끄러미 회상에 젖어있노라면,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구나 싶은 게 스스로를 다독이게 되기도 한다. 

딱 그런 옛 사진첩 같은 영화를 만났다. 아빠의 사업실패와 이혼으로 마음이 스산하기 그지없는 옥주네 가족과, 남편과의 불화로 마음고생하는 옥주네 고모가, 낡은 2층 양옥집의 기력이 쇠한 할아버지 곁에 모여 일상을 함께하는 내용을 담은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이다. 오래된 옛날 집에서 배어 나오는 어른들의 옛 기억과 어린 옥주와 동주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추억들이 어우러지며 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여운을 선사한다. 

그리운 과거로 회상하게 하는 첫 주인공은 어린 남매이다. 살던 반지하 빌라를 뒤로하고 아버지의 작은 봉고차를 타고 여름방학 동안 얹혀 지낼 할아버지네 집에 온 사춘기 소녀 옥주와 남동생 동주. 옥주는 철없는 동생 동주가 성가시기만 하다. 햇살 잘 드는 2층 방을 제 방으로 차지한 옥주는, 잘 곳이 없다며 누나 옆에서 같이 자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동생이 못마땅하다. 자전거를 타게 해 달라며 졸졸 따라다는 것도 귀찮다. 할아버지 생신날 조촐한 가족파티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스마트폰 생일선물을 미리 달라며 대가로 익살맞은 배다리 춤을 추는 동주가 비굴하고 얄밉다. 자신은 쌍꺼풀 수술할 비용을 아버지에게 빌려달라고 간청했는데도 단칼에 거절당했는데 말이다. 
 
    남매는 아웅다웅하지만 서로가 힘이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남매는 아웅다웅하지만 서로가 힘이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하지만 사사건건 옥신각신하던 남매라 하더라도 가족의 고난 앞에서는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되기 마련이다. 갑자기 쓰러지신 할아버지를 구급차에 모시고 어른들이 병원으로 떠난 후, 옥주와 동주는 둘만 덩그러니 남은 집에서 서로를 우두커니 마주 본다. 배고프고 처량해 보이는 동주를 위해 옥주가 라면을 끓여주며 지난 싸움에서 때린 것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우리가 언제 싸웠었나?" 하며 짐짓 넉살을 부리는 동주 덕분에 옥주도 잠시 웃는다.

홀로 불안함과 걱정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던 옥주는 역시나 잠들지 못하는 동주를 마지못한 듯 옆에서 자도록 허락해 준다. 분명 성가시고 귀찮기만 한 동생이었는데, 싸웠어도 누나를 미워하지 않는 동주가 고맙기도 하고, 또 동생이 있어 불안함과 걱정 속에 홀로 외롭지 않아 든든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남매는 서로에게 의지가 된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기로는 옥주의 아빠와 고모도 마찬가지이다. 동네 구멍가게 평상에서 아버지의 생일을 어떻게 보낼지, 아버지가 떠나신 후 낡은 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 의논을 한다. 두런두런 상의하는 오누이의 뒷모습에서, 부모라는 같은 뿌리를 가진 남매로서 삶의 무게를 나눠 짊어진 진한 핏줄애가 느껴진다. 

낡은 옛 집에서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좋은 꿈과 기억들도 오누이에게 힘이 된다. 돌아가신 엄마를 꿈에서 만나고, 옛날 아버지가 했던 엉뚱했던 장난에 대한 꿈같은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리운 것들은 꿈으로 나타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마치 진짜 추억처럼 저장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는지도 모른다. 고모와 아빠의 이런 힘나는 기억들은 옥주와 동주에게 전달되며 다시 가족의 기억으로 생명력을 이어가게 되는 것 같다. 
 
    오붓하게 식사하는 가족을 담은 할아버지의 낡은 집

오붓하게 식사하는 가족을 담은 할아버지의 낡은 집 ⓒ 그린나래미디어

 
가족들의 새로운 추억도 할아버지의 낡은 집에서 만들어진다. 집 안의 모든 창문과 현관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힌 채, 환한 거실에서 오붓하게 식사하는 가족을 담은 집의 풍경에는 사람 사는 정겨움이 듬뿍 묻어난다. 할아버지의 75세 생일을 맞아 옥주의 깜짝 선물과 동주의 익살맞은 배다리 춤으로 온 가족이 화기애애하게 보낸 시간도 분명 가족들에게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앞마당 채소들에 물을 주고 있는 할아버지를 향해 거실 소파에서 손 흔들며 "할아버지" 하고 크게 외치는 동주를 돌아보며 빙긋이 웃어주시는 할아버지 장면은 사진으로 방금 찍어낸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사는 듯이 보이지만, 우리는 그 일상에서 끊임없이 특별한 감정을 자아내는 장면을 포착해 줄기차게 기억을 만들고, 그 만든 기억을 천천히 되씹으며 향수하는 삶을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집의 주인인 할아버지야말로 오래된 기억들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장본인이다. 어느 새벽 옥주는 1층으로 내려가다가 계단 중간에서 멈칫한다. 거실 소파에 홀로 앉아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가요에 심취해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분간하기 힘든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음악과 함께 과거의 추억들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쇠약해지는 자신을 따라 조만간 영원히 잊힐지도 모르는 수많은 기억들을 마지막으로 한껏 펼쳐보며 아련하게 음미하고 있는 듯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애잔하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하면서도, 삶에 지친 아들 가족과 딸에게 별말 없이 낡은 집을 내어주시는 할아버지는 마치 그림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나무를 연상시킨다. 평생을 다 주고도 더 주고 싶어 하는 나무처럼 지친 자손들을 낡은 집에 품어줌으로써, 그들이 집에서 또다시 힘이 되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가도록 기꺼이 발판이 되어주는 것 같다. 자식이란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도 부모의 무언가를 취해 자신의 앞 길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가 싶은 생각에 서글프면서도 숙연해진다. 

낡은 집과 거의 동체 같았던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온 옥주네 식구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찌개가 짜다 싱겁게 된 사정이 오가며 또다시 일상이 시작되려는 찰나,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본 할아버지의 빈 소파가 옥주의 눈에 들어온다. 할아버지를 영영 잃게 된 옥주의 상실감이 그제야 울음으로 터지고 할아버지가 떠난 빈 소파와 안방과 마당은 가족에게 그대로 추억으로 남겨진다.

삶이란 때론 아프고 버겁지만 그 또한 언젠가는 추억으로 남겨지고, 우리는 또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아프지만 남기고 계속 가는 것, 영화의 영어 제목 'Moving on'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옥주네 가족이 품고 있는 행복하고 아픈 기억들을 함께 펼쳐 보며 담담한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내내 어느 사건 하나 구체적인 설명 없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조하게 만든 덕인지, 영화를 보고 나와 다시 마주한 나의 일상도 왠지 영화의 연속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여운을 살려 오늘은 나도 장롱 깊숙이 고이 모셔놓았던 사진첩을 꺼내 가족들과의 이런저런 기억들 속에서 좀 헤매어 볼까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글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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