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살인자다(I am a killer)>에는 살인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살인을 저질렀거나 살인행위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죄명은 1급살인(살인의도가 재판에서 입증된 살인범죄). 이 살인범들은 미국에 사형제도가 재도입된 때(1976년) 이후에 살인했기에, 대번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종신형)으로 감형된 살인자들이 다큐멘터리에 출연할 수 있었다. 

시즌1, 2, 총 20편, 한 편당 러닝타임 50분 안팎으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천일야화'만큼은 아니겠지만, 다 보려면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꽤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저 사람은 어쩌다가 살인자가 되었는가.
 
세상에 좋은 폭력은 없다

살인자들은 인생의 초반, 어린 시절에 폭력을 당한 경험이나 폭력당하는 사람을 무력하게 지켜봤던 경험을, 거의 예외없이, 공통으로 갖고 있다. 폭력 피해자가 모두 그렇진 않겠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폭력 및 현재의 폭력을 잊기 위해 대부분 마약에 입문했다. 마약에 중독된 이후에는 절도나 강도 같은 범죄로 이어진다. 폭력-마약-범죄-살인.

살인자들은 살인을 지속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서 공통되게 번번이 '쉬운' 선택을 했다. 살인자들은 살인을 막 시도한 순간, 살인행위를 계속할 수도 있었지만 멈출 수도 있었다고 스스로 진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인을 멈추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살인자들은 이렇게 덧붙인다. "왜 그때 멈추지 못했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심지어 어떤 살인자는 "악마의 목소리를 따라" 살인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기까지 했다(시즌1, 4화).   
 
스크린샷3 살인 당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살인자.

▲ 스크린샷3 살인 당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살인자. ⓒ netflex


 
스크린샷4 악마에게 핑계를 대고 있는 살인자.

▲ 스크린샷4 악마에게 핑계를 대고 있는 살인자. ⓒ netflix


 
 
내가 믿는 것이 진실이다?

재판받을 때 피해자 유가족들을 향하여 다소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인 살인자가 있었는데(유가족 증언), 살인자는 자기가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살인자는 경찰에서 신문받을 때 "사람을 맨손으로 한 번 죽여보고 싶었어요"라고 최초진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주자, 그때 경솔했었다며 유감스러워 한다(시즌2, 1화).
     
스크린샷1 살인사건 직후 자신의 진술내용 녹음 파일을 듣고 있는 살인자.

▲ 스크린샷1 살인사건 직후 자신의 진술내용 녹음 파일을 듣고 있는 살인자. ⓒ netflix


 
스크린샷2 사건 직후 자신의 진술내용을 들은 후 해명하는 살인자.

▲ 스크린샷2 사건 직후 자신의 진술내용을 들은 후 해명하는 살인자. ⓒ netflix



흥미롭게도, <나는 살인자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살인의 동기, 의도'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이미 1급살인범으로 형을 살고 있음에도, 살인의도가 없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 왜 자신의 의도에 대하여 제대로 언급하지 않(못하)는 것일까? 그들은 살인의도가 없었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정당방위의 살인이었다고 명확히 입증하지도 못한다. 남들이 듣기엔 모순이지만 당사자들에겐 진실이다.
 
교도소는 왜 있는 걸까?

한 살인자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아 평화를 얻었고, 교소도 안에서 목사로 활동한다. 영화 <밀양>의 현실판이다. 한편 또 다른 살인자는, 피해자 가족들 중 어떤 이가 분노와 우울에 잠겨있다가 이를 극복해 마침내 검사가 되어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교도소 바깥에서도 자기 삶을 저렇게 완전히 바꾸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교도소 안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담담히 주장한다.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그의 의견은 옳다. 어떤 장소에 있건 사람은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교도소라는 곳이 본질적으로 태생 자체가 사람들을 교도하여 변화시키고자 만들어진 장소 아니던가.
 
사형제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교도소가 있음에도 사형제도를 존치시키는 취지는, '살인은 살인으로 다스린다'에 근거해 있다. 그렇지만 사형제도는 미국에서 한동안 없다가 1976년에 재도입되었다. 없을 수도 있는 제도라는 점이다. <나는 살인자다>는 오프닝 타이틀을 통해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살인을 저지른 시점이 1976년 이전이냐, 이후냐, 그것이 범죄자들의 운명을 갈랐다.

가정폭력범을 살해한 살인자, 변태성욕자를 살해한 살인자, 아동성폭행자를 살해한 살인자,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이를 살해한 살인자, 혹은 그냥 운이 좋지 않았던 무고하고 선량한 타인을 살해한 살인자.

1976년 이후 미국 법정은 그 살인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 선고가 그리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사고가 우리에겐 사실 익숙하다. 받은 만큼 되돌려주기는 비단 살인사건에서만 작동하는 논리가 아니다. 광범위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응대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성찰적 물음: 살인자는 어쩌다가 살인자가 되었는가?

다큐멘터리 <나는 살인자다>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내레이션으로 처리했었을 법한 내용은 까만 바탕에 하얀 글자로 화면에 새겨져 제시된다. 살인사건 재연장면은 절제되어 있다. 쓸데없이 자극적이지 않다. 

<나는 살인자다>는 살인자의 진술과 주변인물들의 진술이 엇갈리거나 충돌할 경우, 그 진술을 상대방에게 들려주어 반박할 수 있게 해준다. 한 사람을 두 번 이상 찾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살인자다>는, 그 엇갈리고 상반되는 두 진술 앞에 시청자들을 세운다. 시청자들은 판단의 자리에 초대된다. 어느 쪽이 정의인가?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가? 쉬울 것 같은가? 직접 관람하면 알게 되겠지만, 뜻밖에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다큐멘터리 <나는 살인자다>는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에 대한 자기성찰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는 듯하다. 정의, 진실을 판단하는 동안 시청자들은 나 자신에게 정의, 진실을 적용해보게 되는 것이다. 정의와 진실에 비추어 단행하는 자기성찰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걸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살인자들이 삶의 어느 순간에 거의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그 자기성찰의 길, 제대로 된 현실파악의 현장에 우리는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우리 아니 내가 살인자가 아니라면("I am not a killer!") 말이다. 살인자인 저 사람과 나(우리)의 작지만 큰 차이는 바로 그 "자기성찰의 시의적절함"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다큐멘터리 넷플릭스 나는 살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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