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한국영화기획실모임 야유회. 윗줄 왼쪽 첫번째 안동규 대표, 네번째 이춘연 대표, 여섯번째 김미희 대표, 일곱번째 권영락 대표. 아랫줄 오른쪽 끝 심재명 대표 등등

1989년 한국영화기획실모임 야유회. 윗줄 왼쪽 첫번째 안동규 대표, 네번째 이춘연 대표, 여섯번째 김미희 대표, 일곱번째 권영락 대표. 아랫줄 오른쪽 끝 심재명 대표 등등 ⓒ 명필름 제공

 
1991년 <어머니 당신의 아들> 이후, 장편 극영화를 제작하던 재야 영화운동의 역량은 점차 충무로로 옮겨온다. 민중영화 제작 경험이 새로운 영화를 추구하던 충무로의 흐름과 맞닿으며 한데 섞인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충무로 밖에서 재야 영화운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움직임도 진행됐다. 그러나 큰 틀에서 영화운동의 주력은 충무로라는 제도권을 중심으로 확장된다.
 
1990년대의 변화는 1985년 영화법 개정으로 영화운동의 입지를 넓히는 발판으로 작용했던 독립프로덕션을 확대한 것이었다. 1992년부터 영화운동 출신들이 설립한 영화사는 1년에 한 편만 제작할 수 있는 독립프로덕션의 한계를 벗어나 본격적인 충무로의 세대교체를 이끌었고, 1995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 기운을 불어넣는 데 일조한다.
 
이 바탕에 있었던 게 기획영화의 성공이었다. 이춘연(제작자. 작고)이 이끌던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은 뒷받침이 됐다.
 
1980년대 후반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출발은 기존 충무로영화와는 다른 형태의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은 것이었다. 이를 확장한 기획영화의 성공은 소재의 다양성을 추구하며 한국영화에 힘을 불어넣었다. 대학에서 영화운동을 펼쳤던 이들에게 충무로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됐다.
 
1980년대 중반부터 영화기획자로 활약했던 이춘연은 넓은 포용력을 발휘하며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후배들을 아울렀다. 1991년 공식 단체로 출범 전까지 삼삼오오 친목형태로 모이던 한국기획실모임은 영화운동의 충무로 전진기지였다.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영화사 기획실에 있던 이들이 독립해 나와 하나둘 영화사를 설립한 것은 주로 연출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영화운동의 변화였다. 좋은 작품이 나오는 데 프로듀서의 역량이 중요해지면서, 충무로에서 계속 영역을 넓혀 나가던 영화운동 전선이 제작 분야로 확장된 것이었다.
 
1993년 1월 유인택(예술의 전당 대표)이 설립한 '기획시대'는 1988년 신씨네에 이어 영화운동 출신이 만든 1990년대 첫 영화사였다. 신촌의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 시절 <오! 꿈의 나라> 상영이 계기가 돼 영화로 옮겨온 유인택은 모가드코리아, 판시네마, 신씨네를 거치며 경험을 쌓은 뒤 독립을 선택한다. '신씨네'에서 신철과 함께한 <결혼이야기>, 강우석 감독과 함께 기획한 <미스터 맘마> 등을 성공시키는 수완을 발휘한 것이 영화사를 만든 바탕이 됐다.
 
유인택의 뒤를 이어 1993년 4월에는 경희대 '그림자놀이'를 만들어 대학 영화운동을 이끌었던 안동규(제작자)가 '영화세상'을 설립해 두 영화사가 한 건물에 자리 잡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이춘연과 함께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을 이끌던 충무로의 젊은 기획자로, 기획 역량을 쌓은 뒤 제작에 뛰어든 것이었다. 이들 영화사는 기존독립프로덕션이 아닌 5천만 원의 자본금으로 설립한 주식회사였기에 연중 제작 편수 제한을 받지 않았다.
 
프로듀서 시스템의 등장
 
19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토대가 된 프로듀서 시스템은 영화운동과 기획영화가 결합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제작자들이 제작비를 끌어와 영화제작의 전반적인 것을 총괄하던 구조에서 프로듀서 영역이 차츰 구체화 된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1992년 6월 6일 자 기사에서 "<그대 안의 블루>의 심재명·안동규, <결혼이야기> 신철 등이 작품구상에서 시나리오 완성, 제작 진행에서 영화홍보까지를 맡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할리우드식으로 부르자면 프로듀서(제작자)가 되겠지만 당시 자본과 제작 기획 등이 분리되지 않은 영화계에서 제작자는 영화의 자본을 대는 사람을 가리킨다며 사소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직함이다"라고 덧붙였다.
 
한겨레신문은 또한 "이들 젊은 전문기획자의 출현은 영화시장 개방과 영상매체의 다변화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도약하려면 한국영화는 기획능력을 보강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과 맞물린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처음 프로듀서 영역을 개척한 것은 1970년대 독일문화원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했던 '신씨네'의 신철(제작자.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다. 1988년 설립한 영화사 '신씨네'는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 제작비를 지원했고,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영화운동 출신들을 품어내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언경과 함께 영화공간1895에서 활동했던 이하영(프로듀서. 전 시네마서비스 배급이사)이 처음 들어간 영화사도 '신씨네'였다.
 
1992년 7월 개봉한 신씨네가 제작한 <결혼 이야기>는 프로듀서란 이름을 엔딩크레딧에 처음 올린 영화였다. 당시 신철의 부인 오정완(제작자)이 프로듀서였다. 프로듀서 시스템이 구체화 되던 시기는 신철이 기획해 1989년 김유진(감독)이 연출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였다. 이때 신철은 투자자를 끌어오고 영화의 전 과정을 이끌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제작자는 감독에게 제작비를 주는 영화사 사장이었다.
 
 1995년 은행나무침대 제작 기자회견에 참석한 오정완(제작자), 강제규(감독),  신철(신씨네 대표)

1995년 은행나무침대 제작 기자회견에 참석한 오정완(제작자), 강제규(감독), 신철(신씨네 대표)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프로듀서 시스템은 일찍부터 영화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자발적으로 영화를 공부했던 영화운동 출신들은 프로듀서 시스템에서 두각을 나타낸 분야였다. 제작현장과는 다르게 여성의 접근 문턱이 낮았던 데다, 영화제작의 전반을 총괄한다는 점에서 기획력과 창의성이 요구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1990년대 초반 외국영화와의 경쟁에 자신 없어 하며 위기의식이 높았던 한국영화 상황에서 프로듀서 시스템은 이를 반전시킨 중요한 활로로 작용했다. 한국영화 뉴웨이브 흐름을 이어 나가면서 할리우드 영화에 밀렸던 한국영화가 르네상스의 시대를 여는 데 원동력이 된 것이다.
 
1990년대 한국영화는 1985년 영화법 개정으로 인해 20개 영화사의 독점구조가 깨진 이후 제작사가 늘어나며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영화계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외영화, 특히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영화가 직접 배급되면서 위기의식이 커졌다. 외국영화와 비교할 때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매우 약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부터 한국영화보다는 수입한 외국영화 흥행으로 수익을 내고 있었던 기존 충무로 영화사들 입장에서 늘어난 제작사와 미국영화 직배 구조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변화된 환경에 자신감이 약하다 보니 충무로 자본을 쥐락펴락했던 영화사들은 발을 빼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 위기 상황을 돌파하는 선봉장 역할을 한 것이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의 신철·오정완, 안동규, 유인택 등이었다.
 
'황기성사단' 사무실 구석을 빌려 출발한 '신씨네'는 1989년 황기성사단이 제작하고 강우석 감독이 연출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성공을 통해 프로듀서의 역할을 각인시킨다. 영화운동 출신들이 만든 새로운 영화사들은 바로 신씨네 신철이 주도로 구축된 프로듀서 시스템을 바탕에 둔 것이었다.
 
기획시대와 영화세상
 
 유인택 대표 기획시대 사무실을 찾은 정지영 감독과 임안자 평론가.

유인택 대표 기획시대 사무실을 찾은 정지영 감독과 임안자 평론가.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임안자)


유인택의 '기획시대'는 첫 작품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2기 김정진 감독의 <우연한 여행>을 제작한다. 한지승(감독), 김명곤(배우, 전 문화체육부 장관), 장산곶매에서 <파업전야> 시나리오를 썼던 공수창(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영화였다. 김정진(감독)은 "당시 이미 여러 편의 영화를 연출한 상태였는데, 유인택 대표의 제안을 받고 맡게 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만든 작품이 <너에게 나를 보낸다>였다. 감독은 유인택과 대학 시절 마당극, 탈춤운동 등을 함께 했던 장선우였다. 1990년 개봉한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제작사가 유인택이 기획부장을 맡고 있던 '모가드코리아'였다. 유인택은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영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때 '모가드코리아'를 소개해 준 것이 장선우였다"고 말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배우 문성근, 정선경, 여균동 출연에 민족영화연구소에서 활동했던 구성주(감독)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1994년 대종상영화제 각색상(장선우, 구성주), 신인여우상(정선경)을 수상했고, 1994 청룡영화상 감독상(장선우), 신인남우상(여균동), 신인여우상(정선경), 남우주연상(문성근) 등 주요 부문을 휩쓸면서 탄력을 받게 된다.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님의 자제였던 문성근(배우.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이사장)은 주로 영화운동 출신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서울영화집단 출신 황규덕(감독)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에 첫 출연 이후 박광수(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과 <베를린 리포트>, 장선우(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 오석근(감독)의 <백한번째 프로포즈> 등이 초기 작품이었다.
 
안동규의 '영화세상'은 1994년 장길수(감독)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창립작품으로 내놓는다. 장길수(감독)는 1970년대 김호선·이장호·하길종 감독 등이 주도한 '영상시대'에서 활동했고 1980년 후반 한국영화 주목받은 감독으로 박광수·장선우와 함께 한국영화 뉴웨이브 시대를 선도하고 있었다. 안동규는 "당시 장길수 감독이 영화 원작에 관심을 많이 나타내 연출을 맡긴 것이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작품은 정지영 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였다. 안동규는 "당시 원작자인 안정효 작가와 친해 정지영 감독과 자주 오가는 과정에서 안정효 작가가 함께 해보라고 권유해서 만들어진 영화였다"고 회상했다. 정지영 감독은 앞서 1992년 대일필름이 안정효 작가의 또 다른 소설 '하얀전쟁'을 영화로 제작할 때 연출을 맡기도 했다. 안동규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원작의 영화화에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았던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로 정지영 감독은 1994년 청룡영화상 대상과 1995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청룡영화상 촬영상과 백상영화예술 대상, 작품상, 인기상(독고영재) 등 상복이 이어졌고, 제작자인 안동규는 1995년 대종상 기획상을 수상하게 된다.
 
안동규는 이후 외대 영화 서클 '울림'을 만든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 김태균(감독)의 데뷔작 <박봉곤 가출사건>(1996)과 김의석이 연출한 <북경반점>(1999)도 제작한다. 안동규는 김의석의 한국아카데미 졸업작품인 <창수의 취업시대>에 출연한 인연이 있었는데, 김의석은 "당시 배우가 안 와서 급하게 안동규에게 부탁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의석 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창수의 전성시대>에 출연한 안동규 영화세상 대표(오른쪽)

김의석 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창수의 전성시대>에 출연한 안동규 영화세상 대표(오른쪽) ⓒ 김의석


민족영화연구소에서 활동했던 김준종(프로듀서. 전 평창영화제 사무국장)이 유인택의 뒤를 이어 모가드코리아 기획실에 입사할 수 있도록 소개해 준 것도 안동규였다.
 
김준종은 "민족영화연구소 대표였던 이효인이 대학에서 함께 영화서클 활동을 했던 안동규에게 충무로 활동을 연결해 달라고 부탁한 덕분에 모가드코리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며 여기서 제작부로 참여한 첫 영화가 대학 선배였던 신씨네 신철 대표가 기획한 <베를린 리포트>였다"고 말했다. 이어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때 본격적으로 프로듀서 역할을 맡았고, 안동규 대표와 김태균 감독, 나까지 세 명이 제작 전반을 책임졌다"고 덧붙였다.
 
신철이나 안동규, 김의석 등은 문화원 세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80년대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니며 친분을 다졌고, 1984년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 16mm 단편영화발표회'도 함께했다. 신철의 첫 기획영화인 <결혼이야기>가 김의석(감독)의 감독 데뷔작이 된 것도 이런 계기가 작용했다.
 
김의석(감독)은 "임권택 감독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등에서 연출부 조감독 등으로 역량을 쌓다가 생계를 위해 학교 선배의 광고회사에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철에게 연출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신철 대표가 새로운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도 싶었던 생각이 작용한 결과"라며 "광고회사 대표였던 선배가 '영화를 해야 하지 않겠냐'며 양해해줬다"고 덧붙였다.
 
"대학 때 짱돌 많이 던졌다"  

차승재(제작자. 동국대 영상대학원 교수)가 프로듀서로 데뷔한 곳도 신씨네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뒤 동대문에서 의류가게를 운영했던 차승재는 외대 영화서클 '울림' 출신 김태균 감독 등 친구들이 '영화공장 서울'을 만들었을 때 영화제작을 지원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영화공장 서울'에서 뭉쳤던 젊은 영화인들은 1980년 5월 광주학살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치하의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만큼 굳이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기본적으로 군사독재 체제에 대한 반감 등 사회적 비판의식이 있었다. 차승재 역시 "학생운동권은 아니었으나 대학 시절 시위에 참여해 짱돌을 여러 번 던졌다"고 회상했다.
 
 차승재(제작자)

차승재(제작자)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영화공장 서울'을 통해 영화제작의 전반에 대해 눈여겨본 차승재는 1991년 세경영화사가 '터미네이터2'를 수입해 개봉하던 제작실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시작한다. 자신에게 맞는 제대로 된 옷을 입게 된 것이다.
 
1992년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장현수 감독의 <걸어서 저 하늘까지> 제작에 참여했고, '신씨네'로 옮겨가서는 제작실장을 맡아 <미스터 맘마>를 담당했다.
 
프로듀서를 맡은 첫 작품은 오석근(감독. 전 영진위원장)의 <101번째 프로포즈>였다. 김지석과 함께 부산 영화운동을 이끌었던 오석근은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 졸업 이후 영화공장 서울 창립작품 <네 멋대로 해라>를 연출 이후, 이명세 감독 연출부로 활동하고 있었다"며 "영화공장 서울 대표였던 김태균(감독)이 이명세 감독 제작실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고 회상했다.
 
오석근은 "당시 일본 드라마 "'백한번째 프로포즈'를 신씨네 제작부장으로 있던 차승재에게 보여주고, 이를 차승재가 다시 신씨네 신철 대표에게 보여준 것이 제작에 들어간 배경이고, 차승재가 프로듀서로 데뷔하는 작품이 되면서 연출을 의뢰받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차승재는 1995년대 우노필름을 설립한 후 제작자로서 만드는 영화마다 흥행하며 한국영화의 힘 있는 제작자로 부상한다. 제작한 영화 8편 중 7편이 흥행할 정도로 작품을 보는 안목이 특별했다.
 
우노필름의 첫 작품이 김상진 감독이 연출한 <돈을 갖고 튀어라>였다. 원동연(리얼라이즈픽쳐스)이 시나리오를 쓴 첫 영화였다.
 
원동연은 대학 졸업 후 모래와 자갈을 취급하던 부친의 골재 사업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처음 시나리오를 쓴 것이었다. 내용이 재밌자 광고계통에 있던 선배가 강우석 감독의 조감독으로 있던 사촌동생에게 전했고, 창립작품을 준비하던 차승재의 손에 들어가면서 우노필름의 첫 영화로 인연을 맺는다.
 
영화 일을 하기 전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했던 차승재와 잠실에서 부친을 도와 골재상으로 모래와 자갈을 팔았던 원동연이 손을 잡은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했다. 시나리오 원작자인 원동연을 직접 찾아가 만나고 온 차승재는 주변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사람 말 엄청 많더라."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가 터진 시기였다. 최고 권력자의 숨겨둔 돈을 소재로 한 <돈을 갖고 튀어라>는 흥행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차승재는 "원작 시나리오를 박기용(감독)과 김만곤(작고)이 각색했다"고 말했다.
 
명필름의 출발
 
1990년대 초반 영화운동을 해온 젊은 기획자나 감독의 작품이 주목받은 것은, 사회변화에 따른 흐름을 영화에 잘 접목한 덕분이기도 했다. 1987년 이후 검열과 통제가 다소 약해진 틈을 활용했고, 뻔한 내용이 아닌 새로운 소재에 예술적 감각이 더해진 것이었다. 여기에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내면서 한국영화는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대표적 제작사로 입지를 구축한 명필름도 이 시기에 설립된다. 명필름은 합동영화사와 극동필름을 거친 심재명이 1992년 설립한 명기획이 출발점이었다. 장산곶매 활동을 정리한 이은은 함께했던 장윤현(감독), 오창환 등과 함께 세 사람의 이름 앞글자를 딴 '장이오 프로덕션'을 만들어 새로운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93년 3월 31일 발행 <영화저널>에 나온 이은과 오창환

1993년 3월 31일 발행 <영화저널>에 나온 이은과 오창환 ⓒ 권영락 제공

 
결혼 이후에도 각각 따로 영화 일을 하던 이은과 심재명은 1995년 명필름을 통해 두 사람의 역량을 하나로 합친다. 창립작품은 <코르셋>이었다. 정병각(감독. 전 충남영상위원장)의 첫 연출작이었다.
 
1983년 고려대 돌빛 창립회원으로 대학 영화운동에 참여했던 정병각은 1980년대 후반 영화계의 각종 투쟁의 전면에서 나선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 장선우 감독의 <서울황제> 연출부와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해 3기로 졸업했고, 이후 장길수 감독 <밤의 열기 속으로> 조감독을 거쳤다. 1988년 미국영화직배반대 투쟁에 앞장서는 과정에서 한국영화조감독협의회 부회장를 맡기도 했다.
 
민족예술인총연합회 민족영화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초대 사무국장이었던 정병각은 "대학 때 제대로 못 한 학생운동의 아쉬움을 영화계에 들어와 제대로 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정병각은 조감독 활동 이후 정식 감독 데뷔가 늦은 편이었다. 김유진 감독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조감독을 거쳐 1990년 장선우 감독 <화엄경> 프리 프로덕션에만 참여한 뒤 하차해 감독 데뷔를 준비했으나, 유인택의 '기획시대'에서 기획을 담당하는 피디를 맡기도 했다.
 
정병각은 "기획시대에서는 당시 어린이 영화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는 것이었는데, 감독 데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명필름 이은 대표가 시나리오 모니터를 요청한 것이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시나리오가 좋다"고 말하자 이은 대표에게 연출 제안이 온 것이었다
 
 <코르셋>으로 데뷔한 정병각 감독

<코르셋>으로 데뷔한 정병각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명필름 창립작품 <코르셋>. 정병각(감독)이 연출했다.

명필름 창립작품 <코르셋>. 정병각(감독)이 연출했다. ⓒ 명필름

 
<코르셋>은 그렇게 데뷔작이 됐다. 코르셋을 벗어던지자는 여성해방 주제를 담은 영화로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면서 명필름 첫발에 힘을 실었다. 정병각은 "실제 작품 제작에 들어가서는 경험 많은 심재명 대표가 시나리오 수정과 제작 방향을 주도했다'면서 "명필름은 두 번째 작품인 <접속> 제작도 준비하는 중이었다"고 말했다.
 
<접속>은 장윤현(감독)의 데뷔작이었다. 한양대 영화서클 소나기 출신으로 단편영화 <인재를 위하여>를 연출했고 장산곶매에서 활동했던 장윤현이 충무로에 첫발을 디딘 작품이었다. 한석규와 전도연이 주연으로 당시 PC통신을 통한 채팅을 소재로 한 영화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아내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명필름은 영화운동 출신 감독 지망생들을 끌어주며 충무로에 안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들과 함께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로 이어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선도한다. 영화제작소 청년이 청년필름으로 발전해 첫 작품으로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를 손을 맞잡아 준 것은 영화운동 동지들의 연대였다.
 
명필름 영화들은 작품성과 연출력을 바탕으로 시대적 흐름에 더해 남북문제와 노동문제 등을 품었고, 정치 사회적인 이슈를 잘 녹여내며 메시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늘 화제가 되며 많은 영화가 흥행으로 이어졌다.
 
이은(명필름 대표)이 대학 시절 영화운동으로 사회변혁을 이루고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묵묵히 실현해낸 것이고, 여기에 심재명(명필름 대표)의 뛰어난 기획 역량이 더해지며 빛을 발한 것이었다. 한국 영화운동의 역사를 품은 상징적인 영화사로 자리 잡는다.
 
영화는 재밌었야 한다
 
1990년대 소재와 표현의 폭을 넓힌 새로운 한국영화의 잇따른 등장은 기존 충무로영화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1980년 이후 축적된 영화운동이 이뤄낸 중요한 성과물이었다. 당시 한국영화를 보는 인식은 젊은 영화인들 대부분이 비슷했다. <투캅스>를 통해 흥행감독으로, 이후 영향력 있는 제작자로 부상한 강우석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제작된 <달콤한 신부들>로 데뷔한 강우석은 신철이 기획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연출했고, 이 과정에서 만난 황기성사단 상무 이춘연(제작자. 작고)과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며 한국영화를 한 단계 성장시킨다.
 
강우석(감독)은 이춘연에 대해 "내가 집안에서 형이 있지만, 밖에 나오면 진짜 형 같은 분이었다"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흥행했을 때 직원이 강우석이었지만 이춘연 대표가 선배였기에 마치 그 회사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했다"고 회상했다.
 
 <투캅스>에 카메오로 출연한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투캅스>에 카메오로 출연한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 시네마서비스

 
강우석은 "당시 한국영화가 외국영화에 밀리는 가장 큰 문제점은 재미로 인식했다"며 "그래서 다른 어떤 것보다 재미있는 영화를 추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이춘연과 신철이 '관객이 원하는 영화'와 '관객이 보고 싶은 영화'에 초점을 맞춰 영화를 기획한 것과 비슷했다.
 
예나 지금이나 재미를 위해 사회에 대한 풍자와 해학은 기본이었다. 강우석이 연출한 <투캅스>는 부패한 공권력(경찰)을 소재로 재미에 방점을 찍은 영화였다. 경찰의 비리와 위선 문제를 다루면서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웃음으로 시대상을 담으며 1990년대 대표 흥행작이 된 것이다. 만일 1980년 권위적인 군사독재 시절 같았다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였다.
 
강우석 프로덕션 창립작품으로 제작된 <투캅스>에는 영화운동 주역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권영락(제작자. 시네락픽쳐스 대표)이 제작을 담당하는 이사로 총괄 프로듀서 역할을 맡았고, 얄라셩 대표를 지낸 김인수(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가 제작실장으로 현장 프로듀서를 담당했다.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카메오로 출연했다.
 
권영락은 서울예대 조교 시절 각 대학의 영화운동을 지원한 데 이어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시작이었던 <칠수와 만수>, 그리고 <투캅스> 등 충무로에서의 활동 폭이 상당히 넓었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운동 후배들을 보듬었고,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충무로 변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다.

서울대 알랴성과 서울영화집단 활동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던 김인수(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가 1987년 군에서 제대 후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프로듀서로 자리를 굳힌 곳이 강우석 프로덕션이었다.

하지만 충무로의 첫 현장은 1987년 변장호 감독 <감자>의 촬영을 맡은 정일성 촬영감독의 촬영부였다. 김인수는 얄라셩 활동 당시 만든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1982년 청소년영화제(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촬영상을 받은 경력이 있었다.
 
김인수는 충무로 활동 초기에 대해 "당시 촬영 막바지라 2~3회 차 현장에 참여하고 끝났으나 촬영 퍼스트였던 구교환 기사가 임권택 감독 <연산일기> 구중모 촬영감독의 세컨드 카메라를 맡아 거의 모든 현장에 출동하고 있을 때여서, 그 현장에서 촬영부 막내로 발바닥 땀나게 뛰어다녔다"고 회상했다.
 
 서울대 얄라셩 회장을 역임한 김인수(제작자. 부산영상위원장)

서울대 얄라셩 회장을 역임한 김인수(제작자. 부산영상위원장)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촬영 쪽에 있던 김인수의 방향이 전환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1992년 후리기획에서 제작한 SBS 시츄에이션 드라마 <제3극장> 13부작에서 총괄 프로듀서로 현장 진행을 하면서 제작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1993년 강우석 프로덕션을 시작으로, 1995년 8월 강우석 프로덕션에 김의석(감독)과 김성홍(감독)이 합류하면서 시네마서비스로 이름을 바꾼 이후로 제작과 투자를 맡게 된다. 1997년 개봉된 <넘버3>의 기획과 제작을 담당했는데, 김인수 직전 '얄라셩' 회장를 지낸 송능한(감독)의 데뷔작이었다.
 
제약에 굴하지 않고 투쟁
 
1990년대 한국영화 흐름에서 볼 수 있듯, 영화운동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견인했던 중요한 요인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영화인들은 통제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심리적 제약이 있었다.
 
1950년대 충무로에 들어온 정진우 감독은 "우리 때는 시나리오부터 검열하고, 작품을 완성해도 잘려나가기 일쑤였다"며 중앙정보부가 장면을 잘못 이해해 북한을 미화했다고 나를 끌고 가 고문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호선 감독은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경찰에 대드는 장면이 삭제됐는데, 공권력에 반항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당시 사회 분위기를 전했다.
 
오랜 기간 억압된 독재체제 속에 길들어진 한국영화는 1980년대 군사독재가 벗기기 영화에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면서 여성을 상품화한 영화들만 양산해 저질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구조 안에 있었던 정지영(감독)의 영화가 6월항쟁의 영향을 받아 내면에 숨겨왔던 사회비판 시선을 강하게 드러낸 것은 이례적이면서 획기적이었다.
 
반면 영화운동은 이런 제약에 맞서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었다. 영화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군사독재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소재 제한을 뚫고 민중의 삶을 그린 영화가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계기였다. 수많은 투쟁 속에서 영화의 힘이 살아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온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부담을 갖는 민감한 소재도 어떤 식으로든 다뤄보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6월항쟁 이후 1988년 미국영화직배반대 투쟁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쌓인 투쟁력은 통제와 검열에 대한 저항의식을 강하게 만든다. 민주화 바람의 영향으로 투쟁역량이 커지는 시점에서 표현의 자유 확장을 위한 시도들이 잇따랐다.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영화인들의 단결된 목소리들이 공개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개봉하던 1991년 봄, 노태우 군사독재의 공안 통치에 반발하다 강경대 열사가 백골단의 폭행으로 사망하며 민중 투쟁이 격화됐던 때, 당시 영화인들은 성명을 발표해 노태우 정권을 규탄한다.
 
1991년 5월 17일 정지영, 박철수, 박광수, 장선우, 이미례, 문성근, 김진희, 이용관, 양윤모 등 감독 배우 평론가들이 포함된 영화인 129명은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제목으로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이들은 "노태우 정권의 강압과 물리력에 의한 통치를 중단하고 수감 중인 민주인사를 석방하는 등 민주개혁 조처 없이는 지금의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며 "사회 경제정의 실현과 민주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고 밝혔다.
 
긴 시간 권력에 굴종한 영화계였으나, 1987년 6월항쟁 직전 전두환 호헌유지에 반발해 첫 시국성명을 낸 이후 영화운동 전선이 확대되면서 달라진 충무로의 단면이었다.
 
 2013년 부산영화제 기자회견 당시 채수진 전문위원(오른쪽에서 세번째)

2013년 부산영화제 기자회견 당시 채수진 전문위원(오른쪽에서 세번째) ⓒ 부산영화제

 
1991년 공안통치에 반발하며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학생 중에는 졸업 후 영화계에 들어와 KT&G 상상마당 영화사업부를 이끌었던 채수진(프로듀서. 전 부산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전문위원)이 있었다.
 
당시 대학 1학년으로 대한극장 앞 시위에 참여했던 채수진은 5월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 열사가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압사 사고를 당하던 순간 그 무리에 섞여 있다가 부상을 당한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은 1991년 5월 26일 자 기사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 진압에 건너편 진양상가 골목으로 달아나는 과정에서 시위대 50명과 함께 쓰러졌고, 채수진이 경찰이 던진 사과탄 파편에 어깨 부위가 2cm 가량 찢어지고 오른쪽 목에 찰과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보도했다.
 
채수진은 1998년 부산영화제 초창기 부산프로모션플랜(PPP)이 시작할 때 함께했고, 백두대간 <아름다운 시절>을 비롯해 오퍼스픽쳐스, 아이필름, KT&G 상상마당 등을 거치며 독립예술영화 기획과 제작을 담당했다.
 
충무로 사랑방 '노동인'
 
영화운동이 일으킨 변화의 바람은 오랜 시간 굳어져 있던 충무로 구조에도 균열을 낸다. 일제 강점기부터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도제식이 흔들린 것은 대표적이었다. 기존에는 감독이 되려면 10년 이상 연출부와 조감독으로 일해야 했던 구조가 고착돼 있었다.
 
하지만 대학 연극영화과와 한국영화아카데미, 해외 유학 등을 통해 체계적 영화수업을 받고 배출된 신예들이 등장하면서 도제식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1990년대 중반에 나타난 신인 감독들은 1985년 이후 대거 생겨난 각 대학 영화서클(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등 일정한 영상체험을 공유한 세대들이었다. 한마디로 감각이 달랐다.
 
이들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때 대학을 다녔기에 충무로의 검열반대 등 영화법 개정 투쟁에도 적극적이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강했고, 영상에 대한 이해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1988년 영화법 개정과 미국영화직배반대 투쟁 과정에서 결성된 조감독협의회는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고, 도제식과 노동 착취 등 충무로 고질적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당시 조감독협의회 부회장이었던 정병각은 "1988년 조감독협의회가 만들어진 이후 감독 연출료에 포함돼 있던 조감독 인건비를 별도 계약으로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고,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는 감독 연출료에 연출부의 인건비까지 포함돼 있어 아래로 내려갈수록 받는 돈이 현저히 줄어드는 구조였다. 이정향(감독. <집으로>)은 "연출부 식대 등도 조감독이 감당해야 했기에 받는 돈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조감독협의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결국 조감독에 대한 별도 계약이 성립됐고, 이는 2000년대 이후 표준계약서와 영화인 처우 문제 개선 등으로 이어진 초석이었다.
 
 권칠인 감독

권칠인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충무로의 처우가 열악한 때였지만 영화현장에 발을 디딘 젊은 영화인들을 보듬고 챙겨주는 곳도 존재했다. 당시 활동했던 영화인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노동인'이었다.
 
1988년 충무로 대한극장 별관에 있었던 노동인은 노효정(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2기), 정동환(감독, 서울예대 영화과), 권칠인(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2기. 전 인천영상위원장) 3인의 사무실 공간이었다. 이들 세 명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붙인 것이다. 권칠인의 한국영화아카데미 동기 노효정과 박철수 감독 연출부에 있었던 동료 정동환이 영화작업을 위해 얻어 놓은 사무실이 충무로의 사랑방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정향은 노동인에 대해 "대한극장 우측 골목 안쪽의 우측 낡은 건물의 2층인가 3층의 좁은 방 한 칸으로, 1955년생부터 1970년생까지 충무로에서 감독의 꿈을 품었던 이들은 이곳이 마음의 고향 같은 사랑방이었다"며 "세 명의 가난한 조감독들이 어떻게 월세를 내며 운영했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라고 말했다. 또 "정보가 필요하거나 조언을 구하고자 할 때는 콜센터 같은 곳이었고, 끈끈한 의리와 동지애도 있었다"면서 "지금의 젊은 영화인들은 결코 상상하지 못하는 인간미가 넘치는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정향에 따르면 노동인은 충무로 소식과 각종 정보를 알 수 있는 쉼터와도 같았다. 늘 사람이 있었고, 학연이나 지연 등을 가리지 않았다. "데뷔 전 시절을 떠올리면 이곳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으로, 거쳐 가지 않은 영화인들이 드물 정도였다"고 추억을 되새겼다.
 
이정향은 또한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다소 막막한 기분이었는데, 노동인을 통해 격려와 위로를 받으면서 큰 힘을 얻었다"며 "돈 없고 미래가 막막했으나 오직 꿈 하나로 먹고살던 영화인들에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피디들도 많이 왔고 간만에 계약금을 받으면 노동인에서 술을 샀고, 몇 달간 준비하던 작품이 돈 한 푼 못 받고 엎어져도, 여기 와서 술을 얻어먹었다며 항상 누군가는 술을 샀고, 항상 얻어먹던 곳"이라고 덧붙였다.
 
이정향은 "가장 많이 챙겨줬던 분들이 한국영화아카데미 3기로 들어왔다가 조감독을 맡아야 할 영화가 있어 중퇴한 이민용(감독)과 권칠인 감독의 부인(그 당시엔 애인)이었다"고 말했다.
 
권칠인(감독. 전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후 화천공사 기획실을 거쳐 1987년 박철수 감독의 <안개기둥> 조감독으로 충무로 활동을 시작해 1994년 김형준(제작자)이 설립한 한맥엔터테인먼트 창립작 <사랑하기 좋은날>로 데뷔했다.
 
정병각(감독)은 "1990년대 후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이후 권칠인이 활약이 돋보였고, 2005년 한국영화감독조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헌신이 컸다"고 말했다.
 
권칠인이 데뷔한 1994년은 30대 중반의 나이든 신인 감독들이 주목받던 시기였다. 홍기선·문원립과 함께 서울대 얄라셩의 출발이었던 김동빈(감독)도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를 첫 연출작으로 내놓았고, 여균동(감독) 역시 <세상 밖으로>를 통해 데뷔한다. 당시 이들은 대학과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교육을 받았고, 임권택, 박철수, 박광수 감독 같은 유명 감독의 조감독으로 현장 경험을 쌓은 공통점이 있었다.
 
충무로 도제식 존중한 김홍준
 
 2019년 11월 30일 서울독립영화제<서울 7000> <국풍>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왼쪽부터 김인수, 김정희, 황주호, 김홍준. 유운성

2019년 11월 30일 서울독립영화제<서울 7000> <국풍>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왼쪽부터 김인수, 김정희, 황주호, 김홍준. 유운성 ⓒ 성하훈

  
얄라셩 출신 김홍준(감독)도 1994년 <장미빛 인생>을 통해 감독으로 첫 발을 내딛는다. 1976년 대학 2학년 때 8mm 영화 <서울 7000>을 만들어 서울의 풍경을 담았을 만큼 일찍부터 영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박광수·황규덕 등에 비해 늦은 데뷔였다.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을 거쳐 198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김홍준은 1989년 귀국해 들어와 임권택 감독 <개벽> 연출부 막내로 영화현장에 발을 내딛게 된다. 김홍준이 처음 맡은 일은 소품 담당 연출 조수였다. 서울대 출신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인재가 충무로 도제식 밑바닥을 자청한 것은 특별했다. 대학 영화서클 활동과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영화를 선보이던 젊은 감독들의 흐름과는 다른 것이었다.
 
김홍준은 "한국상업영화를 하려면 좋든 싫든 충무로 시스템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기존 충무로 시스템에 대한 존중이었던 셈이다.
 
김홍준이 1992년 구회영이란 필명으로 출판한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가지 것들>은 영화 해설서로 당시 영화 관객들에게 꽤 인기 있었던 서적이기도 했다. 미국 템플대에 유학하면서 학교 극장에 틀어박혀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본 마니아로서 이론적 바탕으로 쓴 책이었는데, 영화입문에 도움이 되는 책으로 평가받았다.
 
한겨레신문 1993년 6월 9일 자 김선주 칼럼은 고급인력들이 영화 등 대중문화에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임권택 감독이 사석에서 김홍준에 대해 "쟤가 내 선생이다"라고 했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1993년 9월 10일 자 기사에 따르면 임권택은 "어려운 미국 유학 가서 박사 학위를 눈앞에 둔 때에, 영화가 하고 싶어 모든 것을 던질 정도라면 우리가 기대할 만한 사람 아닌가"라고 김홍준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장미빛 인생>은 가리봉동 만화방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과 성격이 다른 인물들을 통해 당시 사회를 묘사한 영화였다. 여성영화집단 바리터 출신으로 1993년 첫 여성영화제인 '스핑크스 수수께끼-페미니즘 필름 페스티벌'를 개최했던 김영(프로듀서)이 연출부(스크립터)로 참여한 첫 작품이기도 했다. 김영은 "<장미빛 인생>을 시작으로 <박하사탕> 때도 공동조감독을 맡아 후반 작업을 주도했다"고 말했다.
 
김홍준은 "박승배 촬영감독(<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조동익 음악감독(<넘버3> 등)에게 많은 것을 빚진 영화였다"고 회상했다.
 
<장밋빛 인생>은 1994년 12월 프랑스 영화진흥공사가 후원하는 '조르주 사둘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고, 주연배우로 출연했던 최명길은 낭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화제가 됐다. 1987년 이후 임권택 감독, 신승수 감독, 장길수 감독 등의 영화가 베니스. 몬트리올, 모스크바국제영화제 등에서 잇따라 수상한 가운데, 신인 감독이 이뤄낸 주목받는 성과였다.
 
 <장미빛 인생>의 한 장면

<장미빛 인생>의 한 장면 ⓒ 태흥영화사

 
이 시기 임순례(감독)도 단편영화 <우중산책>으로 충무로에 이름을 알린다. 1983부터 프랑스문화원을 다니며 영화에 심취했던 임순례는 문화원 세대였는데, 뒤늦게 첫 연출작을 만든 것이었다.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가 영화에 대한 갈증으로 1988년 파리 8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4년 뒤인 1992년 귀국해 이듬해 충무로에 발을 딛는다.

임순례는 여성영화인모임에서 펴낸 <영화하는 여자들>에 나온 인터뷰에서 "임권택 감독 연출부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기회가 안 된 상황에서, 여균동 감독의 제안을 받고 1993년 제작에 들어간 <세상 밖으로> 스크립터로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촬영이 끝난 후 이 스태프들과 함께 만든 영화가 <우중산책>이었다. 당시 삼성영상사업단에 주최했던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대상과 비평가상 수상으로 재능을 인정받는다. 충무로 도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여성 감독의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영화비평의 고급화
 
1990년대 영화운동 출신들이 충무로의 제작, 프로듀서, 감독 등을 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은 평론 분야였다. 1979년~1980년으로 이어지는 시기 문화원에서 영화를 보던 세대는 동인지 <프레임>을 발행해 영화 비평에 나섰고, <열린영화>와 <영화언어>, <민족영화> 등의 발행에도 이 흐름이 이어진 것이었다. 비평 활동과 이론적인 연구를 통해 영화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중심에는 이용관, 전양준, 이정국 등이 있었다. 1979년 동서영화연구회 시절부터 영화 학습을 지도했던 전양준은 대학 영화운동이 활성화되던 1985년 <열린영화>에 게재한 '작은영화는 지금'이라는 글에서 '작은영화의 개념은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라며, 당시 단편영화의 제작 기조와 질적 수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연결될 필요성을 강조했다.
 
1990년 계간지 <민족영화> 2호 대담에서는 비제도권 영화로 불렸던 재야 민중영화제에 대해 "기득권자들의 사회적 통제와 억압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비제도권 영화가 생성되었다며, 제도권 영화는 그러한 압력에 종속됐다며 비제도권 영화의 역할이 증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전양준은 "기존 충무로의 제도권 영화에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도, "모든 일은 사람이 하기에 현재 젊은 영화인들의 작업에 기대를 걸고 있다"며 작은 희망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들의 활약은 충무로의 비평 판도에 신선한 자극이 된다. 당시 충무로에는 상업자본에 종속된 글들이 이어지면서 영화평에 대한 관객의 불신을 조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에 나오는 영화평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정진우 감독은 "당시 영화기자들 중에 내 돈을 안 받은 사람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며 "촌지를 얼마를 주느냐에 따라 기사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몇몇 기자들은 필요할 때 용돈 받듯 돈을 받아가면서도 기사를 안 써줬다"고 덧붙였다.
 
 영화비평 계간지 <영화언어>

영화비평 계간지 <영화언어> ⓒ 전양준 제공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이 주축이 돼 1988년 창간된 계간지 <영화언어>는 한국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 연구결과를 발표해 주목받는다. 정재형(동국대 교수)이 쓴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를 분석한 글과,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이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과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글은 평론의 수준과 깊이를 보여줬다.
 
한겨레신문은 1990년 5월 4일 자 기사에서 이들의 평론에 대해 "개인적 감상 소감을 기초한 인상 비평이 주류를 이뤘던 기존 영화평론과는 크게 구분되는 비평방식을 채택했다"며 "리얼리즘 이론에 입각해 인물과 상황의 전형성과 작품의 진실성을 평가의 척도로 사용하고, 영화의 구조를 엄밀하게 분석해 들어가거나 구체적인 영화요소들의 의미를 캐묻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당시 <영화언어> 필진으로 참여한 평론가들은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외에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강한섭(서울예대 교수. 전 영진위원장), 김소영(한예종 교수), 변재란(서울국제여성영화제 조직위원장), 정재형(동국대 교수), 주명진(서울영화집단 활동) 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1980년대 문화원과 대학영화운동, 서울영화집단, 바리터 등 영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1990년대 들어 학계와 평론계로 옮겨오면서 충무로 활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들이 펴낸 책은 영화운동의 발전에 좋은 자양분을 제공한다. 이용관의 <전위 영화의 이해>, 이용관 김지석이 함께 쓴 <할리우드>, 이효인의 <한국영화역사강의> 등 당시 젊은 평론가들이 쓴 책은 주로 외국영화 서적 번역이 중심이던 환경에 변화를 가져온다. 전양준은 영화 입문서 <레디고>, 비평서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 <닫힌 현실 열린 영화> 감독론을 다룬 <가치의 전복자들> 등 다양하면서도 가장 많은 책을 저술했다.
 
영화운동의 성장 과정에서 평론의 역할에 대해 김인수(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는 "제작과 비평이 잘 조화를 이뤘던 것이 영화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다"며 "1980년대 초반부터 크고 작은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어내면 이론을 담당했던 쪽에서 다양한 형식을 통해 비평했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진보적 영화운동이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영화마당 우리와 영화공간1895, 바리터 등에서 활동하다 비평으로 방향을 정했던 권은선(영화평론가. 중부대 교수)은 "김소영(한예종 교수)의 영향을 받은 게 영화평론가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며 "전양준이 발행하던 <영화언어>를 보면서 비평에 대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마당 우리나 영화공간1895는 이론 공부를 한 곳이었다면, 바리터는 만드는 쪽이었다"고 덧붙였다.
 
1990년대 중반 이들 젊은 평론가들이 나선 비평강좌는 많은 관심을 받았다. 권은선은 "1996년 민예총에서 주관한 문예아카데미 영화비평교실 담임이 김소영(한예종 교수)이었고 이용관 등이 강사였다"며 "김소희(전 씨네21 기자), 백문임(연세대 교수). 이정하(단국대 교수) 등이 같이 공부했고, 영화비평교실 간사는 이순진(영화사 연구자)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민예총 문예아카데미는 조한기(전 청와대 비서관)가 설립을 주도한 것이었다.
 
충무로 구체제와 영화운동의 충돌
 
 이용관 부산영화제 이사장

이용관 부산영화제 이사장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다양한 이론으로 무장한 젊은 평론가들의 등장은 충무로 구체제에 개혁의 거센 파도가 밀려온 것과 같았다. 기존 질서를 비판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된 것이다. 1996년 34회 대종상 심사 논란은 젊은 평론가들의 존재감이 드러나며 충무로 기득권 세력이 도전을 받는 순간이었다.
 
당시 대종상 집행위원이었던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은 개봉도 안 한 영화 <애니깽>의 대종상 최우수상 및 감독상 수상에 전면에 나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투명성과 공정성을 보장받기 위해 대종상 영화재단 설립 및 심사 과정 등에 대한 백서 발간을 요구했고, 여기에 강한섭, 이충직, 주진숙, 변재란, 김경욱, 이정하, 김혜준 등이 동조하면서 논란이 확대됐다.

이용관은 "1994년 <만무방>이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기획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했을 때도 문제가 있어 비판을 했다"며, "당시에도 외부의 입김이 작용한 수상으로 알고 있는데, 1996년 또다시 비슷한 일이 되풀이 돼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춘연(시네2000 대표. 작고)은 "당시 곽정환(합동영화사. 서울극장 대표)이 찾아와 '이용관이 네 대학 후배 아니냐?'고 묻고는,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며 "대종상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불편함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이어 "이용관이 그때는 대학 후배라는 것만 알았지 직접 만난 적이 없었는데, 부산영화제 시작되는 과정에서 때 처음 만나게 됐다"고 덧붙였다.
 
1996년 대종상 논란은 기득권을 갖고 있던 충무로 구체제와 실력을 바탕으로 개혁을 강조하던 영화운동 진영 간의 본격적인 충돌이었다. 충무로 헤게모니를 놓고 신구세대가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 이후 영화운동 진영이 충무로를 장악하게 되는 과정의 서막이었다.
 
한국영화 원로 정진우 감독은 1996년 대종상 논란의 이면을 이렇게 설명했다.
 
"권력 실세로 있었던 사람의 영향이 작용해 정보기관 쪽에서 제작비로 10억 정도를 대겠다면서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시나리오를 공모했으나 심사 과정에서 당시 영화계 실력자들이 입김이 강하다 보니 내 시나리오도 떨어졌다.
 
문제는 <애니깽> 촬영과정에서 사고도 있었던 데다, 주연배우가 영화가 완성되기 전 지병으로 타계하면서 영화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을 아는 충무로 실세들은 돈을 댄 정보기관을 고려해서 상을 준 건데, 이용관이 난리를 치니 곽정환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때부터 대종상 추락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도 대종상 문제 때문에 당시 충무로 실세들과 한동안 소원한 관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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