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당신의 아들> 한 장면

<어머니, 당신의 아들> 한 장면 ⓒ 영화제작소 청년

 
1987년 6월항쟁 이후부터 1990년대 초반으로 이어진 시기는 충무로 안과 밖에서 군사독재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던 때였다. 충무로 안에서는 미국영화 직배반대투쟁이 전개됐고, 충무로 밖에서는 민중영화를 지향하는 재야 영화운동이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장산곶매'의 3부작이었던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는 군사독재의 탄압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투쟁으로 맞서며 영화 '운동'의 지평을 연 민중영화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여기에 한 작품을 더 추가한다면 대학 영화운동 역량이 결집된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 대학가 통일운동을 담아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1987년 6월항쟁까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중 운동진영의 기조는 반제 반파쇼 투쟁이었다. 1987년 12월 대선에서 민주진영의 분열로 군부독재가 연장됐으나 1988년 4월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면서 대선 패배에 따른 상실감이 다소 회복된다. 물론 민의를 무시하고 1990년 보수정당이 야합한 3당 합당은 이런 흐름을 다시 뒤바꿔 놓게 된다.
 
이 시기 부상한 것이 통일운동이었다. 1988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김중기(배우)가 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면서 처음 불을 지폈다. 자주·민주·통일이 남한 사회변혁운동의 기조가 된 것이다. 학생운동 진영은 통일선봉대를 조직해 판문점을 목표로 전국을 순회했고, 이를 막아서는 공권력과 곳곳에서 충돌했다. 대학 영화운동은 통일선봉대의 활동을 영상으로 담았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것이 장편 극영화제작이었다.
 
비록 남북학생회담이 성사되지 못했지만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비밀리에 선발된 임수경(전 국회의원)의 방북 성공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학생운동과 민중운동단체들이 해마다 8월 15일에 맞춰 범민족대회를 개최했고, 이는 민간차원의 통일 논의를 활동화 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이런 시대적 흐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고조되던 통일운동과 분단 조국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시대적 고뇌와 결의를 영화로 담아낸 것이었다.
 
등록금을 제작비로
 
 민족영화연구소 활동 당시 왼쪽부터 이수정(감독), 민병진(감독),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구성주(감독. 작고), 이상인(감독)

민족영화연구소 활동 당시 왼쪽부터 이수정(감독), 민병진(감독),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구성주(감독. 작고), 이상인(감독) ⓒ 이수정 제공

  
 민족영화연구소 활동 당시 이상인(오른쪽). 이수정 감독(가운데)

민족영화연구소 활동 당시 이상인(오른쪽). 이수정 감독(가운데) ⓒ 이수정 제공

 
출발은 이상인(감독)이 주도해 결성한 '영화제작소 청년'이었다. 이상인은 1988년 민족영화연구소 활동을 시작했는데, 1985년 대학 입학 전후로 매주 주말 프랑스 단편이나 학생 제작 단편을 상영했던 프랑스문화원 '토요단편'을 오가며 영화에 빠져들었던 문화원 세대였다.
 
1986년에는 신촌의 문화공간 '우리마당' 대표 김기종(문화운동가)이 만든 '영화마당우리'에서 활동하게 된다. 군대에서 보직이 '비디오병'이었을 만큼 영상에 관심이 많았고, 작은영화워크숍 초반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8년 이효인의 민족영화연구소(민영연) 활동 때는 주로 시위현장을 촬영했으며, 김영식(사회사진연구소), 이창원과 함께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깡순이, 슈어프로덕츠 노동자>와 정치 다큐 <5공이 6공인데>를 감독하기도 했다.
 
이상인은 "이론보다는 제작현장에 관심이 많았다"며 "1990년 민족영화연구소 해소 이후 청년들이 주도하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뜻을 실현하기 위해 1990년 6월 대학생 중심의 영화단체를 만든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대학 초기에는 찾아다니며 영화를 보고, 영화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진 순수 영화마니아였다"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이 약했다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등으로 6월항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회상했다.
 
'영화제작소 청년'은 4개 대학 (한양대, 경희대, 서울대, 서울예전)에서 대학영화운동과 영상제작을 위해 대학생 14명이 모여 만든 집단이었다. 민영연에서 활동한 김응수(감독)과 남궁균(시나리오작가), 김인수(감독), 김용균(감독), 이선미(프로듀서), 김경실(전'스크린편집장), 최순열(사진작가), 이영식, 정진아, 최문희, 조현일, 심원준, 김용근 등이 참여했다.
 
이들 중 김응수는 서울대 총학생회 홍보부장을 하며 학생운동을 했고, 김인수는 경희대 '그림자놀이' 회장과 대학영화연합 2대 의장을 역임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영화제작소 청년의 첫 작품으로 기획됐다.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와 80년대 학생운동사를 결합하는 아이디어로 출발했다. 이상인은 초기 신영호, 김을란과 시나리오를 구상하다가 최종적으로 김응수와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제작비는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이 등록금과 독립영화인들의 모금으로 마련했다. 한양대 프락치 사건을 소재로 한 이상인의 16mm 단편영화 <친구여, 이제는 내가 말할 때>가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도 도움이 됐다. <친구여, 이제는 내가 말할 때>는 1990년 10월 한국창작단편영화제(현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작품상인 동백대상과 연출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단은 "사회성 영화가 범하기 쉬운 소재주의적 급진적 오류에서 탈피, 진보적인 내용을 담은 완성도 높은 영화"라고 평가했다. 심사위원 중에는 전양준(전 부산영화제집행위원장)과 김지석(전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작고), 김사겸(감독)이 포함돼 있었다.
 
이상인에 따르면 이때 받은 상금이 300만 원~50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제 수상에 이어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상영됐고, 상영료로 30만~40만 원 정도 들어오던 게 쌈짓돈 역할을 하게 된다.
 
영화의 소재가 된 '한양대 프락치 사건'은 1989년 10월 경찰의 프락치라고 양심선언을 한 10대 청년이 이를 번복한 사건이었다. 학생들의 폭행으로 허위자백을 한 것이라며 고소장을 제출해 총학생회 간부 등에게 구속영장과 수배조치가 내려졌다. 10대 청년은 "절도 사건으로 연행돼 경찰에서 조사를 받다 프락치 활동을 요구받았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으나, 하루 만에 강제 폭행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말을 뒤집었다. 당시 군사독재는 이를 학생운동 탄압의 도구로 활용했다.
 
촬영 들어가면서 수배 생활 시작
 
 <어머니, 당신의 아들>

<어머니, 당신의 아들> ⓒ 이상인 제공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시장통에서 장사하는 어머니와 학생운동을 하던 아들의 이야기로 대학가 통일운동의 내면을 그려낸 작품이었다. 1988년 5월 명동성당에서 투신한 고 조성만 통일열사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여러 민주열사의 이야기가 혼합됐다.
 
실제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한양대 공대생 최로사를 배우로 캐스팅했고, <오! 꿈의 나라> 주연이었던 홍정욱 배우와 <파업전야>에 출연했던 엄경환 배우 등이 배역을 맡았다. 어머니역은 고 김지영 배우가 맡았는데, 영화 상영 이후 경찰서에 불려 다니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음악은 윤민석(민중가요 작곡가)이 담당했다. 당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서 활동하던 김조광수(감독)는 총학생회 간부 역할로 깜짝 등장했다. 대학영화운동 초기 학내에서 영화제를 개최하며 기획력이 좋았던 외국어대 '울림' 출신 장기철(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제작과정에서는 1980년 중반 이후 구축된 영화운동의 역량을 잘 활용했다. 여성영화집단 바리터에서 활동하고 있던 변영주(감독)에게 촬영 카메라를 빌렸고, 카메라 이외의 촬영 기자재는 낭희섭의 독립영화협의회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우여곡절이 있었던 편집 등의 후반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공안기관의 주시를 받고 있었다. 제작비 마련을 위해 시나리오를 일부 대학 총학생회에 돌렸는데, 이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현 국가정보원)에도 들어간 것이었다.
 
이상인은 "당시 경찰에게 연락이 와서 만났다"며 "형사가 '너는 운동권도 아니고 성적 장학금도 받고 하는데, 왜 그런 걸 만들려고 하냐. 하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기억했다. 또 "경찰은 이미 아버지가 군무원인 것 등 가족들에 대해서도 다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면서 "결국, 촬영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수배 생활이 시작됐다"고 덧붙였다.
 
영화제작소 청년은 구성원이 대부분 대학 1~2학년으로 구성돼 현장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이상인은 "촬영감독은 처음에는 이시명(감독, <2009 로스트메모리즈>)을 고려했으나 학생운동을 다룬 내용에 부담을 느껴 김용균(감독)이 담당했고, 16mm 제작 경험이 부족했던 제작진은 카메라의 초점이 맞지 않아 1주일 촬영 분량을 다시 찍는 등의 소동도 겪어야 했다"고 말했다.
 
촬영은 1990년 10월~12월까지 60회차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상인은 계속 수배자였고, 경찰이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하고, 친형이 연행되는 등 압박을 받으면서 남은 사람은 남궁균(기획/배급)과 이선미(편집)뿐이었다. 편집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이때 도움을 준 것이 김대현(감독)의 '영화제작소 현실'과 '장산곶매'였다.
 
김대현(감독)은 "1988년 여름 낭희섭이 조교를 맡았던 작은영화워크숍을 수료했는데, 이때 강사가 전양준과 이상인 등이었다"며 "1990년 3월 우리마당 영화분과에서 활동하다 민병진, 이장서(조감독. 작고) 등과 '영화제작소 현실'을 만들었고, 이 장소를 '영화제작소 청년'이 이용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대현에 따르면 '영화제작소 현실'은 당시 5명 정도가 모여서 활동했고 사무실은 홍대 입구 쪽에 있었다. 의문사 대학생에 대한 단편 극영화 <서울길> 등을 제작했으나 외부로 알려진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 당신의 아들> 편집이 끝난 이후에 안기부(현 국정원)에 노출되면서 1주일 이상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인은 "영화제작소 현실이 공간 전체를 쓰게 해 줬다"면서 "공간이 노출된 이후 수배 과정에서 장산곶매 대표였던 강헌(음악평론가. 경기문화재단 대표)과 이은(제작자. 명필름 대표)을 만나 도움을 요청해, 봉천동인가 신림동 쪽 사무실에서 편집을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당시 상영 방해와 탄압은 시사회가 예정됐던 이언경의 '영화공간1895'에도 가해졌다. 1991년 4월 9일 영화평론가를 위한 시사회가 열릴 예정이던 영화공간1895에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등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시사회 20분을 남겨 놓고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5벌의 필름이 압수당했고. 이를 항의하던 이진욱과 이하영(프로듀서)이 연행되기도 했다.
 
이상인은 "인근 다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전경버스 2대가 와 있었다"며 "한겨레신문 안정숙 기자와 통화하게 됐는데, '영화공간 1895로 오지 말고 피신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봉고차를 이용해 연세대학교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후 여러 대학을 옮겨 다니며 상영투쟁과 수배생활을 이어간다.
 
이상인은 당시 시사회 공간을 빌려줬던 이언경(감독. 작고)에 대해 고마움을 나타냈다. "영화마당우리에서 활동하면서 알게 됐는데, 학생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고, 당시 분위기에서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관없다'면서, 영화공간1895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줘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덕분에 러쉬필름(편집되지 않은 촬영 원본)으로 먼저 시사회를 하고, 기자시사회도 준비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화공간1895는 김응수(감독)가 영화를 공부한 곳이기도 했다. 김응수는 "20대 때 영화공간 1895에서 이탈리아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를 빌렸는데, 몇 번이나 복사돼 얼굴이 안 보일 정도였고 그걸 보고 영화를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때 그런 활동을 한다는 것은 지금 영상자료원 만드는 것만큼 도움 되는 일로 이언경은 특이한 분이었고, 선구자였다"면서 "거기서 많이 배웠다"고 덧붙였다.
 
이적표현물이 된 영화
 
상영을 위해 준비했던 촬영 프린트가 모두 압수당하면서 다시 막막한 상황이 됐다.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처음에는 영화법으로 수배됐으나 영화가 완성됐을 때는 국가보안법으로 바뀌어 있었다.
 
남은 제작비도 없는 상황에서 이상인은 민중운동 단체와 영화단체 등을 불러 모아 도움을 요청한다. 영화를 보고 가능성이 있으면 돈을 내고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네가(원본)필름을 갖고 있었기에 단체 활동가들을 불러 러쉬필름 시사회를 열었고, 이를 통해 프린트(상영용 필름) 비용이 마련됐다. 이상인은 "김동원(감독) 형을 비롯해 여러 단체 분들이 미리 돈을 준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이 영화제작 과정을 잘 알지 못했던 듯 현상소를 막지 않으면서 프린트 제작은 순조롭게 이뤄진다. 상영은 남아 있던 남궁균(기획/배급)과 이선미(편집)가 각 대학 총학생회에 연락해 배급을 진행하면서 풀리기 시작한다.
 
이상인은 "16mm 단편 <친구여, 이제는 내가 말할 때>를 만들 때 시위장면을 촬영하다 경찰에 잡혀간 적이 있는데, 필름을 내놓으라고 해서 촬영 안 된 필름을 주고 촬영된 필름은 수업에 필요한 거라고 주지 않았더니, 형사가 '이거 맡기면 사진이 나오는 거냐?'라고 물었을 정도였다"며 당시 "경찰이나 안기부 모두 영화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필름 작업을 해서 영사기에 튼다는 게 전문적인 작업이다 보니 현상소에 압박 전화 한 통도 간 게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이상인 감독

<어머니, 당신의 아들> 이상인 감독 ⓒ 이상인 제공

 
이상인은 당시 상영에 들어가면서 펴낸 <어머니, 당신의 아들> 자료집에서 제작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영화운동의 새세대 주역을 자처하며, 청년학생운동의 예술적 형상화를 첫 기획으로 작품을 시작한 지 10개월이 지났다. 창립 당시 대부분의 구성원이 학생으로 조직되었던 '청년'은 이제 많은 일꾼을 군대로, 학교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 또한 이제는 대학을 나와 사회인으로 신분이 바뀌어진 입장이 되었다. 무엇이 우리들로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등록금을 출자해 가며 영화에 매달리게 했던 것일까?
 
작업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왜?라는 문제를 생각해 본다. 어느 선배의 비판대로 운동에 대한 확실한 사상과 방법론을 틀어쥐지 못한채 대중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조급한 성과주의의 망령 때문이었을까? 아니며, 영화창작에 대한 순수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분명하게 느끼는 점은 우리들은 격변의 80년대 상황 속에서 학생운동이 대중화되는 시기, 즉 중반부터 후반까지 대학에서 활동하였던 세대라는 점과 민족민주 운동의 선봉 역할을 해온 청년학생운동을 영상화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 단계 독립영화운동이 대중으로부터 검증받는 실천적인 창작방법을 획득해야 한다는 인식의 공유 속에 작업에 임하였다는 점이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의 제반 작업 과정을 점검해 볼 때 의욕 과잉에 의한 무리한 설정과 경험 부족의 제작방식으로 매 단계의 작업에 있어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계획은 4개월 이상 지연되게 되었다. 한 스탭의 말처럼 영화작업에 있어 범할 수 있는 오류는 다 범해보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행히 작업의 공개화로 시나리오 과정에서 세 차례의 수정본을 낼 수 있었고, 러쉬필름 시사회를 통하여 객관적인 안목을 갖게 된 점은 다행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번 작업의 소중한 경험은 다음 작업의 튼튼한 소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연출작업에 있어 특별히 주안점을 두었던 사항은 첫째, 현재 청년학생의 대중화된 투쟁 정서에 80년대의 치열한 투쟁 과정을 하나의 축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역사적 사건을 고증한다는 측면보다는 현재적 상황에서 과거의 사건을 연상할 수 있게끔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둘째, 어머니의 의식변화 과정을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조국의 현실에 대한 큰 사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짧은 시간에 보여주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단편적인 에피소드의 연결로 묘사된 후반부의 과정은 다소 설득력이 부족하였던 것 같다.
 
수년 전 민가협의 의문사 유가족 농성을 취재할 때,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이 땅의 진실을 파헤쳐 달라던 한 어머니의 뜨거운 손길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우리들의 조그마한 한 편의 영화가 이분들의 울분을 풀어드렸다고, 또한 처절히 투쟁했던 선배 열사들의 삶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렵고 힘겨웠던 이번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과제를 안게 되었다. 전문적인 창작집단으로서의 청년의 위상설정,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전망의 수립. 안으로는 구성원의 역할 강화, 조직창작방법론의 수립 등,,, 진정한 의미의 청년은 이제부터 시작할 것이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상영과 사수 투쟁

<어머니, 당신의 아들> 상영과 사수 투쟁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그러나 상영은 제작과정의 어려움 이상으로 더욱 힘들었다. 공안통치를 자행하고 있던 노태우 군사독재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규정했다. 당시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강경대 열사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사망하자, 항의하는 시위와 대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군사독재는 영화를 북한의 선전물로 덧칠하면서 이념 공세를 펴려고 했던 것이었다. 뭐든 마음에 안 들면 '빨갱이'를 강조하던 수구세력의 전형적인 행태였다. 앞서 <파업전야>에 자행했던 영화 탄압의 연장선이었기에, 상영 자체가 거센 투쟁이었다. 노태우 군사독재는 어떻게든 상영을 막기 위해 발악하는 수준이었다.
 
이상인은 "5월 8일 어버이날 부모님 손 잡고 보는 영화로 만든 건데, 극심한 탄압에 당황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당시 '입체영화'로 평가받기도 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3D영화'로 영화 속 등장하는 시위장면이 눈앞에서 구현됐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도중 이를 막기 위해 경찰이 학내로 투입되는 순간, 영화 속 시위를 하다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의 모습은 실제상황이 됐다.
 
상영을 막기 위해 경찰이 학교로 치고 들어오면 사수대들이 이에 맞섰고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다. 1991년 외대 상영 때는 경찰 1천여 명이 포크레인을 동원해 철제 교문을 무너뜨리고 진입해 상영을 막기도 했다. 학생들의 저항에 경찰이 철수하면 중단됐던 영화가 다시 상영됐으나, 경찰의 침탈은 다시 이어졌고, 상영은 중단과 재상영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수십만이 봤는데도 끝까지 본 사람이 얼마 안 되는, 특이한 영화가 됐다.
 
당시 상영 방해는 무분별하게 자행한 공권력의 만용이었다. 재상영을 막기 위해 실내 상영장소에 사과탄이나 최루탄을 터뜨린 야만적인 행태도 있었다. 영화 상영을 막기 위한 충돌은 <파업전야>와 비슷했으나, 탄압의 강도는 더 셌다. <파업전야>와 마찬가지로 헬기가 동원했고 상영 사수에 나선 대학생이 경찰의 직격탄에 실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파업전야> 때 상영을 막지 못했던 것을 만회하려는 태도로 비칠 정도였다.
 
노태우 군사독재는 영화를 이적표현물로 규정한 것도 모자란 듯 이상인(감독, 한양대 교수)에게 다른 국가보안법 조항을 적용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북한의 자금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으로 의심하며 수사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공안당국이 의심과는 다르게 북한 자금은 전혀 들어온 것이 없었다. 영화제작소 청년에 참여한 학생들이 집에서 받은 등록금을 제작비로 내놓고 휴학했고, 김동원(감독)이 300만 원과 영화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십시일반 지원해 준 정도였다.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당시 제작비를 50만 원 정도 빌려줬고, 이후 영화가 잘 돼 돌려받았다"고 말했다. 이상인은 "영화마당우리 김기종 대표도 당시 돈을 빌려줬다"며 "영화가 흥행에 모두 갚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공안기관 "김일성 교시로 불순단체가 제작"
 
 <어머니, 당신의 아들>에 대한 공안기관의 영화감정서

<어머니, 당신의 아들>에 대한 공안기관의 영화감정서 ⓒ 이상인 제공

 
영화 상영이 시작된 이후 이상인은 1991년 6월 구속된다. 정작 적용된 법은 국가보안법이 아닌 영화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 상영으로 홍기선(감독)과 이용배(계원예술대학교수)가 불구속 기소로 벌금형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구속은 이례적이었다.

이상인은 1991년 9월 3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석방되지만 16mm 영화에 영화법을 적용한 것 자체가 진보 영화운동을 억누르려는 군사독재의 만행이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91년 문화정책 안에서 대학가의 소형영화 서클 활동을 지원하고 활성화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첫 소형영화 관련 사업이 필름 압수로 나타난 것은 역설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상인은 "당시 공안기관은 1991년 봄의 분신 정국을 북한과 연계된 것처럼 몰았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안기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자료를 봤는데, 거기에는 "전남대학교에서 분신한 박승희 열사 일기장에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봤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박승희 열사는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숨진 강경대 열사 타살과 군사독재의 공안통치를 온몸으로 항의한 것이었다.
 
이를 빌미로 공안기관은 <어머니, 당신의 아들>에 나오는 분신 장면을 트집 잡아 북한과 관계있는 것처럼 엮기 위해 애쓴다. 당시 한 신문사 기자에 의해 입수된 '서울 대공전술연구소' 명의의 영화감정서는 이 영화를 '김일성 교시에 의해 '전대협'등 불순단체가 제작한 영화로, 현 체제 전복 투쟁을 선동한 친북 이적 선전 영화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상인은 "이적성 논란 속에 <어머니, 당신의 아들> 이적성 공개감정 공청회에서 이정국(감독),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여성민우회 등이 '국가보안법 적용은 억지'라고 비판한 것이 재판 과정에서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상인의 단편 <친구여, 이제는 내가 말할 때>을 수상작으로 선정해 <어머니, 당신의 아들> 제작에 기여(!)했던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위기 상황에서도 도움을 준 것이었다.
 
이상인은 최후 진술을 통해 국가보안법으로 영화를 옭아매려 했던 공안당국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사상의 자유와 예술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저는 현재 엄청난 탄압의 근거가 되었던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 제작 배포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닌, 영화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영화를 관람한 많은 대중들에 의하여 내용이 갖는 사실성이 획득되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영화 상영 탄압과 저의 구속은 해를 거듭하여 발전하는 민족영화운동에 대한 탄압에 기인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올해 들어 당국은 영화제작소 청년에 대한 탄압뿐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출판, 학문 등 전 분야에 걸쳐 문학예술운동을 탄압하고 사상의 자유를 저지해 왔습니다.
 
저는 현행 영화법은 일제와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영화예술 말살과 대중 우민화 정책을 위하여 제정된 법으로서 탄압의 빌미가 되고 있는 사전심의제도와 제작신고제도는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 되는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어떠한 의도이건 간에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하여 창작되는 시, 노래, 그림, 영화에 가해지는 탄압은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를 다른 누구에 의해서도 아닌 그것의 주인인 대중들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말하고 싶습니다."
 
 2019년 서울독립영화제 <어머니, 당신의 아들> 상영에 참석한 김조광수(감독), 이상인(감독), 최로사(배우), 윤민석(작곡가), 김용균(감독)

2019년 서울독립영화제 <어머니, 당신의 아들> 상영에 참석한 김조광수(감독), 이상인(감독), 최로사(배우), 윤민석(작곡가), 김용균(감독) ⓒ 성하훈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1979년 서울대 얄라셩의 태동을 시작으로 1985년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영화 써클(동아리)이 만들어진 이후 축적된 대학영화운동 역량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미가 큰 작품이다.
 
특히 당시 대학가에서 펼쳐지던 통일운동을 사실적으로 담아내 변혁운동 영화로써 소재의 폭을 넓혔고 주로 단편영화의 틀 안에 있던 대학영화의 범위를 장편으로 확장시켰다. '장산곶매'가 5월 광주와 노동해방, 교육문제 등 주로 민중민주(PD) 노선이 지향하던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민족해방(NL) 노선이 다분한 영화기도 했다.
 
전문배우에 더해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대학생이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고, 영화에 나오는 시위장면에는 학내에서 시위를 한 학생들에게 협조를 요청해 이들이 당시 시위대와 경찰 체포조였던 백골단 복장으로 등장한 것도 특징이다. 이상인은 "출연에 응해준 학생들에게 출연료를 대신해 술을 사줬다"고 회상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지난 2019년 11월 30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30년 만에 재상영이 이뤄졌다. 영화 상영 후에는 당시 영화의 주역들이 나와 제작과정에서 어려움과 후일담을 나눴다. 사회를 맡은 김조광수(감독)은 "영화를 만든 사람조차도 끊김 없이 보는 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이상인은 "영화가 만들어진 후 처음으로 관객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는 자리"였다며 "영화 촬영이 끝나고는 도망 다니는 신세였기에 공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최로사 배우도 촬영 때 이후 30년 만에 처음 본 것이었다"고 말했다.
 
통일영화 탄압 속 진행된 남북 영화교류
 
 1990년 뉴욕에서 열린 남북영화제

1990년 뉴욕에서 열린 남북영화제 ⓒ KBS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던 1990년 10월, 남북 간의 영화교류가 처음 시작된 것은 공교로운 지점이다.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대학영화는 심한 탄압을 당했으나, 남북 간의 영화교류가 첫 물꼬를 튼 것은 역설적인 모습이었다.
 
남북 영화교류는 1990년대 후반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 영화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주도하게 되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첫 영화인들 간의 교류로 성사된 것은 1990년 10월 뉴욕 남북영화제였다.
 
여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작용했다. 1970년대 한국영화의 대표적 제작자였던 주동진의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주동진은 평양 출생으로 1945년 해방과 함께 월남한 후 1964년 연방영화사를 설립했다. 1966년 남정임이 주연한 <유정>을 제작하는 등 1970년대 중반까지 10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었고, 1973년에는 영화업자협회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영화계 실세는 신상옥 감독이었다. 주동진이 영화업자협회 대표를 차지하자 신상옥 감독을 지지하는 영화사들이 별도로 제작자 단체를 만들어 갈등이 생겼다. 결국 당시 문공부가 개입해 25개 영화사를 12개로 강제 통폐합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신상옥 감독에 도전할 정도의 제작자였으나, 이를 넘어서지는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제작자였던 주동진은 1976년 이후 한국영화에서 사라진다. 한국영상자료원의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주동진'에 따르면 '1976년 부사장이던 최춘지에게 사업을 물려준 후 갑작스럽게 미국으로의 이민을 택했다"면서 "이민을 택한 원인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양영화사 시절부터 함께 했던 양춘은 주동진의 형 때문이라 증언한 바 있다"고 전하고 있다.
 
양춘에 따르면 주동진의 큰 형 주동인은 1953년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장과 1964년 조선작가동맹 상무위원을 역임한 북한 영화계의 거물이었다. 당시 정보기관들은 그의 형 때문에 주동진을 지속적으로 감시했고, 주동진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이민을 택했다는 것이다.
 
 전조명 촬영감독, 남정임 배우, 주동진 제작자

전조명 촬영감독, 남정임 배우, 주동진 제작자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이에 대해 정진우 감독은 당시 상황에 대해 "1976년 주동진이 갑자기 장충동 집에서 만나자고 갔더니, 앞으로도 영화사를 최춘지 이사가 맡게 됐다며 계속 도움을 달라고 했다"며, 바로 다음 날 새벽 가족들과 함께 바로 미국으로 떠난 것이었다"고 말했다.
 
정진우 감독에 따르면 주동진의 야반도주하듯 갑작스런 이민은 가족사 때문이었다. 영화 촬영을 위해 하와이에 갔다가 이복 누나를 만나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주동진은 1966년 김진규, 김희라, 남정임 주연의 <하와이 연정> 제작을 위해 한국영화 최초로 하와이 호눌룰루에서 현지 촬영을 진행했다. 이때 하와이에 거주하며 친북인사로 활동하고 있던 이복누이를 만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복형인 주동운이 북한 영화계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정 감독은 "주동진이 이후 누이와 지속적 연락을 하던 게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의해 포착했고, 조사를 위해 출두하라는 연락이 오자 급하게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던 이은봉(전 영진필름 대표)을 통해 주동진에게 큰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주동진이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가면 언제 세상 구경할지 모르고, 살기 위해 떠난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정 감독은 또한 주동진이 배우 남정임을 발탁한 배경에 대해서도 "주동진의 어머니와 남정임 어머니가 평양에서 친한 언니 동생 사이였던 것이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1976년 이후 사라진 주동진의 이름이 다시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90년이었다. 뉴욕 남북영화제 집행위원장를 맡아 남북 교류의 가교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주동진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영화교류를 통해 조국통일을 앞당길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남북영화제 남한 측 대표단은 강대선(단장), 곽정환, 강대진, 윤일봉, 신성일, 태현실, 장미희, 소설가 홍국태 등이었고, 북한 측 대표단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부총장 엄길선 감독을 단장으로 부단장 주동운, 인민배우 홍영희, 오미란, 조경순, 조선국가영화문헌고 총지배인 박순태, 조선대외영화합작사장 박찬성, 평양예술교류협회 지도원 이명수가 참가했다. 이들은 4일 동안 남북의 영화를 보며 교류의 시간을 갖는다.
 
정진우 감독이 주동진을 다시 만난 것은 1994년 12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촬영을 위해 뉴욕에 갔을 때였다. 정 감독은 "거의 20년 만의 만남이었다"며 "당시 북한의 김일성이 등장하는 재료 필름이 필요한 상태였는데, 주동진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고,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직원을 소개해줬다" 말했다. "이후 연락이 와서 김일성의 모습이 담긴 필름을 받았다면서, 당시 주동진이 사례를 하라고 해서 5천 달러를 줬다"고 회상했다.

영화운동단체에서 영화제작사로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로 이어진 재야 영화운동의 절정을 상징하는 작품인 한편으로 마지막 장편 극영화였다. 재야 영화운동이 이후 충무로 활동에 주안점을 두면서 무대를 옮겨 갔기 때문이다. 영화운동 출신들이 설립한 새로운 영화사들이 생겨나던 시기였다.
 
영화제작소 청년은 <어머니, 당신의 아들> 이후 창작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다 마침내 충무로의 영화사로 발전하게 된다. 한국 영화운동에서 사회변혁의 도구로서 영화를 목적으로 했던 단체가 영화제작사로 성장한 유일한 사례였다.
 
 영화제작소 청년 MT. 왼쪽 첫번째 최순열(사진작가) 두번째 정지우(감독). 네번째 오정훈(감독), 다섯번째 이상인 감독, 오른쪽 끝 장기수(감독)

영화제작소 청년 MT. 왼쪽 첫번째 최순열(사진작가) 두번째 정지우(감독). 네번째 오정훈(감독), 다섯번째 이상인 감독, 오른쪽 끝 장기수(감독) ⓒ 이상인 제공

 
<어머니, 당신의 아들> 탄압으로 와해된 형태로 소수만 남았던 영화제작소 청년은 정지우(감독)가 새로 합류하면서 유지된다. 이상인은 출소 후 뿔뿔이 흩어졌던 영화제작소 청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유학으로 방향을 정했고, 1993년 말쯤에 정지우(감독)가 영화제작소 청년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이상인은 "영화법 위반에 따른 2년간의 집행유예 기간으로 영화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는데, 미국에서 상영을 했던 주선했던 분이 제안해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라며 "극심한 탄압과 함께 사건이 커지다 보니 부담을 느끼면서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남자들의 경우 군에 입대하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직 재건을 위해 학습 모임을 꾸리게 되는데 이때 합류한 사람이 정지우(감독), 오정훈(감독, 대전시청자미디어센터장), 정윤철(감독) 등이었다. 영화공간1895처럼 비디오를 복사하고 세미나와 스터디를 하던 시기였다. 이상인은 "정지우가 학생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책임감이 강해 대표를 맡아 달라고 했고, 이후 영화운동 단체들을 돌면서 인사를 시키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영화제작소 청년이 새롭게 정비되면서 합류한 것이 학생운동을 했던 김조광수(감독)였다.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83학번인 김조광수는 대학 입학 후 선배를 통해 5월 광주항쟁 비디오를 본 이후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인문대 학생회장과 당시 학생운동 조직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중앙집행국에서 활동하던 골수 운동권이었다.
 
1989년 8월 11일에는 한양대 교내에서 당시 전대협 임종석 의장(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임수경 평양축전 전대협대표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하다가 학내에 진입한 경찰들에게 연행됐다. 3일 뒤인 14일 20여 차례에 걸쳐 교내 과격시위를 주도했다며 집시법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돼 재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형을 받고 풀려난다.
 
김조광수는 "1992년 졸업할 때까지 10년 동안 학생운동을 했다"며 "전대협을 발전적으로 확장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중앙집행국에서 활동하다 1993년 1기 한총련 출범식 이후 학생운동을 정리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1990년~1992년까지 3년간 졸업앨범에 등장한다"며 "영화 <여고괴담>이 내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김조광수는 <어머니, 당신의 아들>에서 단역으로 나오는데, 이때는 총학생회 간부로 잠시 카메오로 등장한 것이고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활동하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뭘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1993년 정지우가 "창작자들이 있지만 기획자가 필요하다. 영화를 가르쳐 줄 테니 같이하자"고 제안해 영화로 방향을 정한 것이었다.
 
1993년은 새로 들어온 정지우(감독)를 중심으로 영화제작소 청년이 재정비에 들어간 시기였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제작에 함께했던 이선미(프로듀서)와 이경희(프로듀서), 장희선(감독), 장기수, 이철민 등이 합류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 초반에 카메라를 잡았던 김용균(감독)도 군 제대 후 1994년에 가세했고, 임필성(감독. <마당 뺑덕> <페르소나>)과 박찬옥(감독. <파주> <질투는 나의 힘>)도 들어왔다.
 
당시 김조광수가 맡은 일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등에서 상영하는 옴니버스 영화 <스무살 젊은이에게>(정지우, 이철민, 장기수 감독) 제작을 기획하고 배급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1년 정도 활동하다가 건강이 안 좋아서 그만두고 쉬었다"며 "1996년 12월 동숭씨네마텍에서 '동네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1주일간 상영한 작은 영화제(영화제작소 청년 기획전)를 기획하며 다시 합류하게 됐다"고 말했다.
 
변혁운동 수단 대신 영화를 통한 사회참여

이상인의 유학 후 영화제작소 청년은 정지우가 단편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1996년 서울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생강>(정지우 감독)과 1997년 서울단편영화제 우수상을 수상한 <그랜드 파더>(김용균 감독)가 대표적 작품이었다.

자립을 위한 수익사업도 적극적으로 나서 결혼식 비디오, 각종 집회현장 촬영, 국회의원 홍보물 제작까지 돈 되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촬영 장비 등을 구입했다.
 
변화가 생긴 것은 1997년 11월이었다. 장편영화 제작을 위한 팀을 새로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청년필름'으로 발전한 것이다. 충무로에 진출할 기회가 생기면 영화제작소 청년의 작품을 만들기로 했던 김조광수, 이선미, 신창길, 곽신애(제작자, <기생충>) 등이 정지우, 김용균, 심현우 등과 결합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에 실린 청년필름 기사

동아일보에 실린 청년필름 기사 ⓒ 김조광수 제공

 
1999년 11월 5일 동아일보는 청년필름에 대해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연출한 이상인 감독과 '장산곶매'의 이은 감독 등 운동권 출신 감독들이 개별적으로 충무로에 데뷔한 것과 달리 집단적으로 진출한 첫 사례"라며 "이들은 93년 영화를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여기는 대신 '영화를 통한 사회참여'로 시각을 바꿨다"고 소개했다.
 
이 기사에서 정지우는 "영화가 수단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과 사람들에게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김조광수는 "당시에 영화를 정치적 수단으로 집중하는 것은 협소하다고 생각, 운동의 수단으로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상인은 영화제작소 청년에 합류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활동한 것에 대해 "귀국 후 다시 합류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초기와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고 말했다.
 
또 "내가 활동할 때는 시위 촬영을 하며 연행돼 맞기도 했는데 그런 흐름과는 달랐고, 애초에 생각했던 운동 방향이 아니었다"며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애쓰면서 유지한 것이었고, 책임이 있는 나는 어려울 때 지키지 않고 떠난 셈이 된 것이어서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 제작을 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청년필름의 첫 작품은 정지우가 연출한 <해피엔드>였다. 단편영화와는 다르게 충무로 상업영화는 투자를 받고 배우를 선정해 출연시키는 것이 만만치 않았는데, 이때 손을 잡아준 것이 명필름이었다. 프로덕션과 마케팅의 전체적인 실무 운영만큼은 청년필름에게 맡겨달라는 제안을 수락한 것이었다. 영화운동단체가 영화사로서 제대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김조광수는 "당시에는 동아리 같은 느낌이었다"며 "1999년 <해피엔드>를 만들 때도 청년필름 이름으로 정식 사업자 등록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2000년 1월에 회사등록을 하게 되는데, 나이가 제일 많은 데다 선배다 보니 대표라는 자리를 맡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마당우리 워크숍. 최낙용(앞)과 정윤철(뒤)

영화마당우리 워크숍. 최낙용(앞)과 정윤철(뒤) ⓒ 최낙용 제공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활동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상인의 스터디 모임에 참여했던 정윤철(감독)도 1990년대 대학영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영화운동에도 참여했기 때문이다.
 
정윤철은 김조광수(감독)이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있을 당시 총학생회 산하 애국한양 팀에서 활동했고, 주로 시위장면을 촬영해 영상으로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당시 애국한양 팀에서 있었던 김명준(다큐멘터리 감독. <우리학교>)은 "4년간 데모만 했던 시기"로 회상했다. 이상인은 당시 애국한양 팀 고문을 맡고 있었다.
 
정윤철은 "대학 입학 전인 1990년 1월부터 영화공간1895를 오간 것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막내인 대학 1년 차가 끓인 라면을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과 김영진(영진위원장. 명지대 교수)에게 갖다 바치고 함께 맛나게 먹었던 때였다"고 추억했다.
 
그는 영화공간1895 대표였던 이언경에 대해 "게으른(?) 아재들 속에서 빛나던 정겨운 이모 같은 존재였다"며 "이언경 누나가 돌아가셨다는 게 아직도 안 믿긴다"며 안타까워했다. 
 
1990년 1월에는 이언경이 주관한 영화마당우리 워크숍에 참여해 단편영화를 제작하는데, 이때 함께 참여했던 워크숍 동기가 부산에서 영화운동을 했던 최낙용(제작자. 백두대간 부대표)이었다.
 
영화운동단체를 오가며 학생운동에도 참여했던 정윤철은 대학 졸업 후 1997년 성수대료 붕괴 사건을 소재로 한 <기념촬영>이 제4회 서울단편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시네마테크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게 된다.
 
1999년 SF 단편 <동면> 클레로몽페랑 영화제 초청되는데, 이후 충무로 연출부 활동 없이 장편영화를 준비하다가, 2005년 <말아톤>으로 데뷔하며, 한국영화의 주목받는 신인감독으로 부상한다.
 
<말아톤>은 주연배우였던 조승우가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황금촬영상, 부산 영평상에서 최우수 남자연기상을 휩쓸었고, 정윤철 감독은 대종상 신인감독상과 각본상,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과 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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