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 69세 > 포스터

영화 < 69세 >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지난 20일 개봉한 영화 < 69세 >(연출, 각본 임선애 감독)는 29세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69세 여성 심효정(예수정 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개봉 직후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남녀갈등을 부추기는 영화"라는 이유로 평점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 69세 >를 본 관객이라면, 이 영화가 그들의 주장처럼 터무니없는 이야기이고, 성별 갈등을 부추기는 영화인지를 놓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영화는 노년 여성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편견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자기 존엄성을 회복하는 의미있는 과정을 보여준다. 좀 놀라운 건 이 과정에서 남성 캐릭터에 상당 부분 비중을 할애했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성폭력 가해자인 이중호(김준경 분) 외에도 효정의 동거인 동인(기주봉 분), 효정의 사건 담당 경찰(김중기 분), 동인의 아들(김태훈 분)과 같은 남자들이 전면에 등장 하는데, 각자의 입장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효정의 사건을 바라보고 대한다. 

효정의 사건 바라보는 남성들의 태도
 
 영화 <69세>

영화 <69세> ⓒ 기린영화사

 
먼저, 은퇴 후 작은 동네서점을 운영하는 동인은 효정의 사건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강력한 조력자이다. 사실상 효정의 현 배우자이기도 한 동인은 효정의 사건에 분노하고 어떻게든 효정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고군분투 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사실상 성폭력 고소인(영화는 피해자라는 표현 대신 고소인이라는 단어로 효정을 지칭하고자 한다)의 가족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분노하고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면 피해를 입은 아내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남편보다 아내의 품행을 탓하며 사건이 알려지길 원치 않는 배우자가 꽤 많은 게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효정을 지지하고 사건 해결에 더 앞장서는 듯한 동인은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비칠 정도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사건 처리에 참다 못한 동인은 가해자와 성급하게 대면하고 오히려 일을 더 어긋나게 만드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동인은 원하는 결과를 빨리 얻지 못했고 효정과도 멀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효정의 지지자이자 어떻게든 효정이 의미 있는 결과를 받아들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 인물로 남는다. 
 
 영화 <69세>

영화 <69세> ⓒ 기린영화사

 
반면, 변호사인 동인의 아들은 효정의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이 지극히 양가적이다. 아버지 동거인을 바라보는 아들의 입장은 아버지와 다를 수밖에 없다. 동인의 아들이기 전에 법조인으로서 그 또한 효정의 사건이 매우 유감이고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 되길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이겠지만, 효정(의 사건)으로 인한 아버지의 심신쇠약을 감당할 수 없었던 아들은 일단 '외면'을 택한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끈질긴 부탁과 법조인으로서 일말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었던 동인의 아들은 아버지의 동거인 이전에 성폭력 피해자이자 고소인 효정이 찾아오자 어떻게든 그녀의 편이 되고자 한다. 
 
 영화 <69세>

영화 <69세> ⓒ 기린영화사

 
효정의 사건을 담당한 형사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초반 효정의 말을 믿지 않고 치매 환자로 몰고가는 등 2차 가해를 가했던 형사는 시간이 지날 수록 어떻게든 효정의 사건이 제대로 해결될 수 있도록 돕고 싶어한다. 하지만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과 성범죄 처리 방법에 대한 무지로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수사를 감행한다.

지금보다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낮았고 성폭력 특별법이 본격적으로 발효-적용되기 전인 2012년을 배경으로 제작한 영화지만, 2020년대에 접어든 현재도 제대로 된 성범죄 처벌과 수사가 이뤄지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게 만드는 인물과 설정이다. 

이렇게 < 69세 >에는 성폭력 가해자 외에도 고소인을 지지하거나, 상처를 안겨주거나 혹은 외면하는 남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성폭력을 겪은 여성이 사건 해결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이와 같은 남성 캐릭터들은 효정이 아픔과 분노를 딛고 당당히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목할 지점은 효정 주변 남자들의 강력한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효정을 일으켜 세운 것은 그들이 아닌 효정 자신이라는 데 있다. 

효정의 느릿느릿하지만 침착한 변화
 
 영화 <69세>

영화 <69세> ⓒ 기린영화사

 
효정의 느릿느릿하지만 침착한 변화는 노인이자 여성인 효정이 다시 일어서게 하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효정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주변인들과 노년 여성, 성범죄에 대한 편견에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결코 부조리한 현실에 굴복하거나 숨지 않았다. 어두웠던 터널을 지나 따뜻한 봄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효정의 차분한 발걸음을 마음 깊숙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처럼 성범죄 피해자에게 모멸감과 수치심을 안겨주는 현실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여성의 성장과 미진하지만 그녀의 행보를 지지, 응원하는 남성들의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 < 69세 >는 말한다.

성범죄는 성별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며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이다. 그리고 피해자가 '피해자다움'에 갇히거나 수치심을 강요받는 대신 다양한 감정을 인정받으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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