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올해로 발표 50주년을 맞은 김민기 작사·작곡, 양희은 노래의 <아침이슬>은 박정희 문화정책의 실패를 상징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1970년 8월 28일 발표된 이 노래는 박 정권 하에서 사전심의를 통과하고 1971년에 건전가요상을 받기까지 했다. 또 상업음반 시장에서도 유통됐다.
 
이 노래가 저항가요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은 김민기와 양희은의 발언에서도 증명된다. 두 사람은 <아침이슬>이 자신들의 노래가 아닌 대중의 저항가요가 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2015년 4월 23일자 <한겨레> 인터뷰 기사 '아침이슬, 그 사람'에 따르면, 김민기는 1987년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노제 당시 <아침이슬>이 백만 군중에 의해 합창될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앗, 뜨! 뭐 그런 느낌··· 백만 명이 부르는데, 그 백만 명이 다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내가 그걸 뭐라고 감히 말하겠나?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양희은도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2016년에 <인물과 사상> 제220호에 실린 이영미 문화평론가의 '유신 말기의 나비 효과'는 이 사연을 이렇게 소개한다.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된 뒤의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렇게 대중가요 시장에서 사라진 <아침이슬>은 대학가에서 부활했다. 양희은은 이 충격을 방송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 있는데, 나도 사석에서 들은 적이 있다. 서강대학교 캠퍼스에서 시위대가 이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기타를 손에 든 상태였다. 시위대의 합창으로 터져 나오는 <아침이슬>을 듣는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고 온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양희은의 1971년 1집 음반 (2011년 CD 재발매반) 표지.  대표곡 '아침이슬'이 금지곡 처분을 받고 판매금지 되었다가 1987년이 되서야 해금조치됐다.

양희은의 1971년 1집 음반 (2011년 CD 재발매반) 표지. 대표곡 '아침이슬'이 금지곡 처분을 받고 판매금지 되었다가 1987년이 되서야 해금조치됐다. ⓒ 예전미디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사람들마저 충격을 받을 정도로, 이 노래는 전혀 다른 의미의 노래로 거듭났다. 노래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해석에 의해 새롭게 창조됐던 것이다. 이 노래를 낳은 것은 김민기이지만, 이 노래를 기른 것은 1970년대 이후의 대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건전가요'로 태어났던 이 노래는 1975년 한국연예협회에 의해 방송 금지곡이 되고 이듬해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음반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1975년 12월 개정된 공연법 제25조의 3에 의해 설립된 공연윤리위원회는 대통령령에 의해 조직 및 운영 사항이 정해지고 문화공보부장관에 의해 공연윤리위원들이 위촉되고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었다. 이 기관이 <아침이슬>을 금지곡으로 지정한 데는 김민기의 개인 이력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위의 이영미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72년 초에 김민기가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한 행사에서 '해방가'를 부른 '사고' 때문에, 김민기의 음반이 시장에서 사라졌다. 물론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불법적인 보복 조치였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텄네/ 동무야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로 시작하는 '해방가'는 8·15 다음 해인 1946년 만들어진 노래로 1960년 4·19 혁명 때 시위대에 의해 불려졌다. 1946년 당시의 제목은 '독립행진곡'이다.
 
이 노래는 가수 안치환에 의해서도 리메이크됐다. 다만, 가사가 약간 달라졌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에서는 '동무야'가 '동포여'로 바뀌었다. 원래 가사에 있었던 '설움아 눈물아 너와도 하직'은 안치환의 노래에서는 '눈물아 한숨아 너희도 함께'로 대체됐다.
 
이외에 박 정권이 <아침이슬>을 싫어할 만한 이유가 더 있었다. 명랑한 노래가 아니라는 점도 이유가 될 만했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6년 6월 <내일을 여는 역사> 제63호에 실린 문화학자 이하나의 논문 '대중문화 통제: 감성까지 국정화하려는 오만'은 <아침이슬>에 대한 탄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퇴폐와 저속의 기준은 무엇이고 그것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일제강점기부터 독재정권 시절에 이르기까지 정권은 항상 대중이 명랑하기를 강요하며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것은 바로,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정권과 체제에 비판적이 되기 때문이다. 국민 대중은 정권이 허용하는 것만 보고 들어야 했으며, 조금이라도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용공으로 몰리지 않으면 저속과 퇴폐라는 낙인이 찍힌다."
 
박근혜가 국정 교과서를 만들려 했듯이, 박정희는 '국정 감성'을 만들려 했다. <아침이슬>에 대한 탄압도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런 정책은 결국 실패했다. <아침이슬>을 비롯한 저항가요들이 1970년대에 대중의 심리를 파고들면서 박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확산시킨 사실은 박 정권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시도했음을 잘 보여준다. 박정희의 문화정책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때리는 부메랑이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과오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박정희로부터 '김똘똘'로 불리며 총애를 받았던 김기춘은 박근혜 정권에서도 박정희의 문화정책을 답습했다. 촛불혁명 기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그것이다.
 
을사늑약 이후 처음 나타난 제국주의적 문화정책

박정희 문화정책이 박정희 자신에게 부메랑이 된 것처럼 박근혜 문화정책 역시 그랬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국정농단 사건과 함께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다.
 
이 같은 문화정책이 박정희-박근혜 2대에서만 계승된 아니다. 이 계보는 훨씬 이전으로 소급한다.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 시기가 그 시발점이다. 이 같은 제국주의적 문화정책은 한국 역사에서는 을사늑약 이후에 처음 나타났다. 위의 이하나 논문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문화에 관한 최초의 제국주의적 입법은 1907년 이완용 내각이 신문을 통제하기 위해 제정한 신문지법과 집회·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만든 보안법이었다."
 
"일제는 문화예술 분야 중에서도 근대의 아이콘이자 신문물의 꽃이었던 영화와 레코드(대중음악)에 대해 특별한 일련의 규제 정책을 내어놓는다. 1922년 극장을 감시와 규제의 대상으로 하는 '흥행 및 흥행장 취체규칙'을 반포하였고, 1926년에는 '활동사진 필름 검열규칙'을 만들어 영화 내용에 대한 검열을 공식화하였으며"
 
"1933년 대중음악에 대한 통제 차원에서 '레코드 단속규칙'이 제정되었다. 규칙 공포 후 첫 7개월 동안 44종이 넘는 레코드가 민족의식 고취, 공산사상 선전 등을 이유로 단속된 한편, 1937년에는 '저속한 유행가를 배격하고 건전한 가요를 보급'한다는 명목으로 가요 정화운동이 실시되었다."
 

대중문화에 대한 간섭과 개입은 박정희·박근혜 때뿐 아니라 위와 같이 일제강점기 때도 유사한 양상으로 존재했다. 박정희·박근혜 뿐 아니라 이승만·전두환·노태우 등의 문화정책도 상당부분은 제국주의적 문화정책과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침이슬>에 대한 탄압은 박정희의 문화정책뿐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적 문화정책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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