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69세 69세  효정의  용기있는 성폭력 고발

▲ 69세 69세 효정의 용기있는 성폭력 고발 ⓒ 기린영화사

 
60대인 내게 지난 20일 개봉한 임선애 감독의 첫 장편 영화 < 69세 >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리 사회에서 60대 여성은 중년도 노년도 아닌 낀 나이에다, 존재감이 미미한 세대다. 그 존재감 없는 69세 여성이 수술로 입원한 병원에서 29세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 사실을 고발한 뒤 싸워 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게 영화 < 69세 >다.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불편한 주제를 논하지만 품격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예수정의 연기는 절제되어 있으면서 기품이 있어 유럽 영화를 연상케 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에서 69세는 실제로 고령이 아니고 노인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하간 더 품격이 있어 보인 건 효정의 동거인으로 등장하는 기주봉씨가 연기한 시인 겸 책방 주인인 동인의 사고였다. 동인은 남성 중심적이고 자본주의가 뿌리 깊게 박힌 사회에서 가난하고 고독하며 의지할 곳 없는 노년의 여성, 게다가 젊은 남성에게 강제로 성폭력을 당한 여성에 대한 온갖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시선을 뛰어넘어, 인간 존재 그 자체로 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영화는 불편하고 어두운 사건을 암시하듯 깜깜한 화면에 누군가의 대화 목소리로 시작된다. 관객은 대화를 통해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 효정은 파견 입주 간병인이다. 파견 간병인으로 만나 동거하게 된 동인이 퇴원 날짜에 맞춰 마중을 나온다. 마중나온 동인을 따라 퇴원을 한 효정은 책방에서 책을 옮기면서 멍하니 서 있기도 하고 다리미질을 하면서 생각에 골몰해 와이셔츠를 태워먹기도 한다.
 
전자레인지의 붉은 빛에 어떤 사건이 떠오르는 듯 전율하며 트라우마를 드러내던 효정은 동인에게 성폭력 당한 사실을 고백한다. 당사자가 어렵게 결단을 내린 후 고발한 29세 남성 간호조무사의 69세 여성 환자에 대한 성폭력 사건에 사회나 법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령 여성인 효정을 치매 환자라고 몰아가는가 하면, 정액 등이 묻은 성폭행을 입증할 만한 증거물을 요구하고도 법원은 나이차이를 이유로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번번히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69세 간병인 여성 효정에 대한 편견과 폄훼가 담긴 '노인네가' '그렇게 차려입고 다니면 누가 간병하는 아주머니인줄 알겠느냐' '다리가 날씬해 뒷모습만 보면 처녀인 줄 알겠다'라는 대사는 우리 사회가 고령 여성에게 갖는 편향된 시선과 편견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주인공 효정이 용기를 얻는 것은 동거중인 동인의 인간적인 시각과 동인의 시 "봄볕에 눈물도 찬란하게 빛난다"라는 구절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인의 시집은 낡고 먼지가 묻은 채 화분 받침 대신 화분 아래 깔려 있었다. 누구도 관심 두지 않던 시집을 꺼내고 먼지를 털어내고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시 구절을 마음에 새겨둔다.
 
효정은 성폭력 사건을 자신만의 치욕스러운 비밀로 가슴에 묻고 자책하며 살아가는 대신, 자신을 가둔 어둠 속에서 밝은 햇빛으로 걸어나와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효정은 자신의 가슴에 담아 둔 시 구절처럼 눈물도 찬란하게 빛나게 할 따사로운 봄볕으로 걸어나와 살아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했으리라.
 
영화를 보며, 이창동 감독 영화 <시>의 주인공 미자씨의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이라는 바람과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씨가 절규하며 내뱉은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라는 대사가 동시에 떠올랐다. 

<밀양>의 신애,  <시>의 미자씨가 남성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벽에 부딪혀 아파하고 희생당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 69세 >의 효정씨는 조금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사회의 편견과 차별과 벽을 깨고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신애씨와 미자씨, 효정씨 등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소외되고 편견의 벽에 갇힌 이들 모두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낸다.
 
이 땅의 수많은 신애, 미자, 효정씨의 눈물이 봄볕에 찬란하게 빛나기를.
아니, 다시는 신애씨, 미자씨, 효정씨가 겪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과 편견이 없어 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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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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