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 < 69세 >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69세 여자와 29세 남자 사이에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 남자는 정형외과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조무사이고, 환자들에겐 상당히 친절하다 알려져 있다. 여자는 관절염으로 그 병원에 입원을 했고, 퇴원 하루 전 물리치료를 도우러 왔던 29세의 남자 간호조무사에 의해 치욕스러운 일을 겪는다.

그녀는 평소 수영을 한다. 그녀가 수영을 하는 건 관절염 때문에 다른 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이 수영을 배우는 젊은 여자들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그 나이로 안 보일 정도로 몸매가 좋다'며 시샘인지 뒷담화인지 모를 말들을 한다.  

편협한 상상력의 현실
 
영화 '69세' 메인 포스터 영화 '69세' 메인 포스터

▲ 영화 '69세' 메인 포스터 영화 '69세' 메인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지금 이 69세의 여자는 물리치료실에서 일어났던 일을 성폭행이라고 말하고 29세 남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걸 들은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I.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이 여자는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는데 그녀의 고소 내용을 알게 된 형사가 처음 내뱉은 말은 "남자가 친절이 과했네"다. 그러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농담인듯 얼버무린다. 한 개인에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성폭행 앞에서 형사가 '친절'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농담은 다시 주워담을 수 있는 수준에서만 농담이다. 이미 쏘아버린 화살을 되돌릴 수는 없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런 화살을 쏠 권리는 없으며, 거둘 수 없는 화살은 폭력이 될 수 있다. 

II. 같은 수영장에 다니는 젊은 여자들은 왜 그녀의 몸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들은 그녀를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이는 그 젊은 여자들의 말투에서 드러난다). 그녀가 수영을 하는 실제 이유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69세나 된 여자 노인이 그런 몸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다. 또한, 이 사건을 조사 중인 형사는 그녀에게 옷을 잘 차려입고 다닌다고 말한다. 수영장의 젊은 여자들과 형사는 노인이면서 여성인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노인다움'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전형을 보여준다.    

III. 사건이 있기 전 남자 간호조무사가 이미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추적하던 중 만나게 된 한 '여자' 간호사로부터 "조심 좀 하지 그랬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녀가 '조심'하지 않았기에 성폭행이 일어났다는 뜻일 테다. 과잉 친절을 말했던 형사처럼 그 여자 간호사는 절대 '무심코'일 리 없는 말을 던지고는 그녀의 눈치를 본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많은 사건들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2차 가해 방식이다.  

IV. 69세, 사회적으로 노인으로 분류되는 나이에 있는 그녀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계속 치매환자로 의심 받는다. 기억이 안 난다는 이유 하나가 치매 가능성으로 신속, 정확하게 전환된다. 결국 이 사건은 폭행을 입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법정 문 자체를 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이 29세였다면 가해자의 영장이 기각되었겠냐고 형사에게 묻는다. 이 노인의 말을 사회가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편견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영화 '69세'의 효정이 가해자를 대면하는 장면 영화 '69세'의 효정이 가해자를 대면하는 장면

▲ 영화 '69세'의 효정이 가해자를 대면하는 장면 영화 '69세'의 효정이 가해자를 대면하는 장면 ⓒ (주)엣나인필름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매체를 통해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성폭력의 주체가 젊은 남성이고 그 대상이 노년 여성인 경우는 흔히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영화 < 69세 >가 노년 여성과 젊은 남성사이의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삼은 건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일 테다. 이런 낯선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당황하고, 사건의 개연성이 의심스러워 여러 가지 방어막을 친다.

그건 그녀가 노인이기 때문이다. '여자 노인'인 사람에게서 우리는 구부러진 어깨와 허리, 처진 가슴과 늘어진 뱃살을 가진, 성욕이라곤 한 톨도 없는 존재를 상상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녀는 뚱뚱하지도 않고 옷도 잘 갖추어 입고 다닌다. 이상하다. 그러니 그녀에게도 원인이 있을 거라 추측한다.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여자 노인을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거기에 '치매'라는 변수로 이 사건은 더 이상 폭력을 증명할 수 없게 된다. 

'살아있음'의 희망을 말하다
 
영화 '69세' 효정이 시를 읽는 장면 영화 '69세' 효정이 시를 읽는 장면

▲ 영화 '69세' 효정이 시를 읽는 장면 영화 '69세' 효정이 시를 읽는 장면 ⓒ (주)엣나인필름

 
이 영화는 노인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편견을 보여주는 데에만 머물지 않는다. 영화는 더 나아가 희망을 말한다. 그녀는 경찰의 대질신문에 응하는 대신, 하얀 백지 위에 자신의 주장을 또박또박 적어 자신만의 고발문을 만든다. 그리고 수백 장을 복사해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그저 그늘에 숨어 숨만 쉬며 살아가고자 했던 그녀가 그늘에서 나와 햇빛을 향해 나아간다.

'봄볕에 눈물도 찬란하게 빛난다'.

그녀의 가슴 속에 저장되어 있던 시의 한 구절은 그녀가 희망을 부여잡으려 할 때 고발문 위로 다시 떠오른다. 책상 밑으로 굴러 떨어졌어도 몸체 안에 부러지지 않은 견고한 흑심이 박힌 연필은 다시 깎으면 되는 것처럼, 그녀가 용기를 낼 수 있는 건 '살아있다'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 '69세'의 효정 영화 '69세'의 효정

▲ 영화 '69세'의 효정 영화 '69세'의 효정 ⓒ (주)엣나인필름

 
영화의 소재가 성폭력 사건이라 분위기가 어두울 수 있다는 편견을 접어 두고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39세이든 49세이든 69세이든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서 사유를, 성장을 멈추지 말아 달라는 그녀의 간곡한 호소에 귀 기울이면 좋겠다. 그리고 그녀의 찬란한 시작을 응원해주자.
덧붙이는 글 제 블로그 https://blog.naver.com/fullcount99 에 같은 글이 개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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