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망했다. 왜 그리 열심히 했을꼬?"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영화 소개 첫 줄에 나오는 말이다. '아니, 내 이야기인 줄.' 읽자마자 반가웠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도 날 안 찾는다."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다가 감독이 돌연사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마흔 살 비혼 여성 찬실이 후배에게 한 넋두리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뼈 때리는 이 대사에 두 번째로 마음이 훅 빠져들었다.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쳐서 열심히 일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영화 감독의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제로'로 돌아가 버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백수로 전락. 찬실이는 갑자기 들이닥친 폭탄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살아보려 하지만 이제는 쓸모가 다한 건전지처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달동네로 이사하고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해 친한 배우 '소피'네 집에서 가사 도우미 일을 시작한 찬실. 여기까지의 상황 설명만 보면 거의 '이생망' 수준이다.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의 줄임말이다. 우리는 어떤 때 '이생망'이라고 할까. 찾아보니, '부정적이고 자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표현으로, 주로 20대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주로 취업이 안 되거나 시험을 망치는 등 견디기 힘든 상황을 표현할 때 쓴다'고 나와 있다. 어디 20대 뿐이랴. 찬실이처럼 중년에도 '이생망'을 외치고 싶은 순간은 불청객처럼 늘 불쑥 찾아드는 걸.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이미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이미지 ⓒ 찬란

 
나를 머뭇거리게 하는 질문

나는 지금 프랜차이즈 가게에서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글 쓰는 일을 하고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얼마 전 <내가 힘들었다는 너에게>라는 책을 내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환경에 잘 적응하는 편이어서 별 어려움 없이 일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아무렇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순간적이나마 나를 머뭇거리게 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요즘 뭐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이다.

직업으로 대표되는 정체성, 사회적으로 아직 효용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인증 등등 그 질문 앞에 서면 열심히 살았는데도 사회에서 누락된 느낌이 전기처럼 찌르르 온몸을 불쾌하게 훑고 지나간다. 그때마다 중년 이생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커튼 제치듯 씩씩하게 치우며 말한다.

"글 쓰면서 생계형 알바하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개봉한 지 꽤 되는 이 영화를 만났다.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났니?"라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마냥 반가웠다.

무엇보다 이생망 수준의 40대 여성을 어둡거나 악착같거나 궁상이 뚝뚝 흘러넘치는 캐릭터가 아니라 매우 씩씩하고 유머 있는 인물로 그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 피디를 하다가 친한 영화 배우 소피의 가사 도우미로 생활하면서도 찬실씨는 기 죽지 않는다. 소피의 불어선생님이자 단편영화 감독인 연하남 김영을 만나 '사랑이나 해볼까'하며 직진하기도 한다. 물론 '누나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로 사랑마저 수포로 돌아가지만. 진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그때, 찬실씨는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역)의 달관한 인생관과 수상한 남자(김영민 역)의 도움으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이미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이미지 ⓒ 찬란

 
'적당히 행복하게' 사는 법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한글을 막 배우기 시작한 주인 할머니와 찬실씨의 대화 장면이다.

늙으면 하고 싶은 게 없어져서 좋다는 할머니. 그 말에 찬실씨는 이 세상에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한다.

할머니의 나이쯤 되면 그게 가능할지 몰라도 오십의 나는 아직 '달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영화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찬실씨처럼 나도 계속 무언가에 나를 걸곤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게 때로는 직업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내가 쓴 책 <내가 힘들었다는 너에게>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십 언저리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분명하게 변한 부분도 있다. 예전보다 포기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얻어지지 않는 게 있다는 사실도 빠르게 인정한다. 결국 원하는 걸 얻는다 해도 그게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어 버린 탓이다. 어떤 때는 그 얻음이 나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내 몸에서 욕심이 다 빠져나가서가 아니라 그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으며 체득하게 된 진리다. 아마도 할머니가 하고 싶은 게 없어져서 좋다는 건 그런 의미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직 할머니처럼 하고 싶은 게 없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마흔의 찬실씨도 주인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생계와 경력의 위기, 건강 문제, 부모의 질병 등 중년의 삶의 지형을 뒤흔드는 일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일상을 침범한다. 삶에 브레이크가 걸릴 때마다, 원하던 것이 허물어질 때마다, 더 이상 애를 쓴다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길을 잃은 것 같을 때마다, 공들인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 때마다, 삶을 야속해하며 휘청인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이생망 수준의 찬실씨는 건강한 자기애로 처음부터 끝까지 씩씩하고 경쾌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당신이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하며 찬실씨를 응원하게 되는데, 다 나 같은 마음인지, 영화 속 찬실씨의 동료들도 찬실씨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연대한다. 아무리 씩씩하다고 해도 사람은 혼자 설 수 없으므로. 씩씩함, 건강한 자기애, 그리고 서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과의 연대. 슬기로운 중년 생활을 위해 찬실씨가 전해 준 팁이다.
 
그렇다면 찬실씨가 찾은 진짜 하고 싶은 중요한 건 무엇일까? 찬실씨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은 김초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엔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어떻게 살겠다는건 없었어요. 영화만 하면 삶은 어찌됐든 해결될 줄 알았던 거죠. 위기를 지나며 느낀 건 제가 삶 자체를 궁금해 하지 않고 그저 뭔가를 하기만 하며 살았다는 사실이었어요. 삶이 삶으로서 의미 있어야 하는데, 영화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행복하자고 마음먹은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부처를 알고 싶으면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을 멈추라"는 뜻이다. 그리고 영화는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도 있냐'는 찬실이의 말에 대한 주인 할머니의 대답으로 오늘 하루 '적당히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려준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그래서 난 오늘도 노트북 앞에 앉아 오늘 하고 싶었던 일, 글을 애써서 쓰고 있다.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8,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