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고등학교 학생들이 흉내낸 가나의 장례문화

의정부 고등학교 학생들이 흉내낸 가나의 장례문화 ⓒ 의정부고등학교 학생자취회 페이스북

 
매년 여름이 되면, 누리꾼들의 관심은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의 졸업 사진에 집중된다. 전형적이고 경직된 졸업 사진에서 벗어나, 개성과 유머 감각을 한껏 과시한다. 올해만 해도 '파맛 첵스', 음원 차트를 장악하고 있는 혼성 그룹 '싹쓰리', 비의 '깡', 유튜브 '가짜 사나이' 등 최근 유행하는 요소들을 유쾌하게 구현해냈다.
 
댄스 음악에 맞춰 망자의 관을 들고 춤추는 아프리카 가나의 장례 문화 '관짝 댄스(Coffin Dance)' 역시 의정부고 학생들의 레이더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온라인상에서는 '관짝소년단'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학생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논란거리가 생겼다. 학생들이 이들을 흉내내는 과정에서 얼굴을 어두운 색깔로 칠했는데, 이것이 '인종차별적 행위'라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에서는 백인이 흑인처럼 얼굴을 검게 칠한 '블랙 페이스(Black Face)' 분장을 한 채 무대에 오르는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가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백인 공연자들은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흑인을 묘사했다. 이는 흑인 인권 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흑인은 여전히 백인과 동등한 존재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흑인 분장이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문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의정부고 학생들은 (인터넷에서 본) 재미있는 한 장면을 재현하는 것에만 의의를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누군가에게 인종주의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인종차별은 더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17년 한 코미디언이 흑인 분장을 하고 등장했을 때, 방송인 샘 해밍턴은 "인종을 놀리는 행동이며 말도 안 되는 행동"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동료 코미디언 황현희는 "단순히 분장한 모습이 어떻게 흑인 비하가 될 수 있느냐",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랑 받았던 <시커먼스> 역시 흑인 비하인가?"라고 되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예로 들었던 '시커먼스'는 전형적인 인종차별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최근 황현희는 이 발언에 대해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사과했다).

'인종'으로 사람을 규정할 수 있나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2018 러시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조별 리그에서 독일을 꺾는 기염을 토했다. 멕시코는 스웨덴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꺾은 한국 덕분에) 2위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때 멕시코인들은 한국에게 고맙다며 두 눈을 양쪽으로 찢는 포즈(동양인의 얼굴을 흉내낸 것. 전형적인 인종차별적 행위다)를 취했다. 당시 멕시코인들은 한국을 비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호의적인 감정을 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여기서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흑인의 생김새를 따라 하는 것, 그리고 동양인의 생김새를 따라 하는 것은 동일한 무게의 해악을 지닌다. 인간을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인종이라는 표면적 정체성만으로 일원화하고 타자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정부고 학생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지 않길 바란다. 지적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 차별인가'를 알려주지 않았던 교육의 영역이다. 차별과 혐오는 오랜 시간에 거쳐 일상화되어있다. 한국에서 차별 감수성(젠더, 인종, 연령, 학력, 장애 등 차별적 요소에 대해 이해하는 능력)이 고개를 든 역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15년 전에야 크레파스에 '살색'이라고 쓰여있던 것이 '연주황색'으로 바뀐 나라다.
 
최근 시민의식이 성숙해지면서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차별에 관한 논의들이 뒤늦게 이뤄지고 있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이젠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아직 과도기이기 때문에, 때때로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프로 불편러'라는 멸칭을 듣기도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의 저자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는 전방위적인 성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김 교수는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없다"고 했다. 차별이란 악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흑인 친구가 있고, 성 소수자 친구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비하의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차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지향한다면, 지금보다 더 가혹할 만큼 예민해지는 것도 필요한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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