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텅 빈 무대에 백발의 노인이 나무 의자에 앉아 공허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허물어진 시선은 등 뒤의 대문 쪽에서 소리가 나자 생기를 찾아 번쩍인다. 허둥지둥 일어나 문으로 달려가 보지만 대문 밖에는 아무도 없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돌아와 의자에 앉는다.

문소리가 날 때마다 번쩍이며 돌아보고, 뛰어갔다가 허탈한 동작으로 돌아오고...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공허함과 번쩍임과 허탈한 동작이 반복되자, 관객들은 그녀에게 연민을 보내기 시작하지만, 어쩌면 그 연민들이란 그들 각자가 자신들의 기억 속에 있는 각자의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자기 연민일지 모른다. <행당동 115번지>에서 70년을, 북으로 간 가족을 기다리며 살아온 여자의 한이 그렇듯 쉽게 무대에서 관객으로 전이되기에는 그 한이 너무도 크고 깊다.   
 
기다림, 그 잔인한 몸짓 그녀는 어딘가 먼곳을 보며 기다리고 있다. 생사를 모르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란 그 자체가 잔인한 형벌, 남자 무용수의 고통스러운 안무가 그녀를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 기다림, 그 잔인한 몸짓 그녀는 어딘가 먼곳을 보며 기다리고 있다. 생사를 모르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란 그 자체가 잔인한 형벌, 남자 무용수의 고통스러운 안무가 그녀를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 김은희

 
잠시 후, 한반도가 모양 그대로 무대 바닥에 깔리고, 세 명의 제국주의자들이 땅에 코를 박듯이 들여다보며, 혹은 그 위를 뛰어서 넘나들며 자기들 멋대로 땅에다 금을 긋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아파온다. 그들은 땅 따먹기 하듯 혹은 게임을 하듯 땅을 나누어 가지는 춤을 춘다. 무용수들이 역사적 사건을 춤으로 표현하는 아주 이색적인 장면이다.

그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밀고 당기며 격렬한 몸짓을 하다가, 그리 오래지 않아 셋이 모여서 우리의 땅에다 찌익 하고 허리를 잘라 금을 긋기 시작한다. 내 몸의 어딘가가 찢겨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저리도 쉽게 갈라지는 대지가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삶이 저 장난 같은 금긋기에 무너져 내렸을까. 관객들의 아픔이 무대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장면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미국 영국 소련의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땅을 놓고 땅따먹기를 하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 보는가 하면 뛰어 다니면서 서로 다투고 경계하다가 이윽고 합심하여 땅을 두동강을 낸다. 한스러운 장면이다.

▲ 모스크바 삼상회의 미국 영국 소련의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땅을 놓고 땅따먹기를 하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 보는가 하면 뛰어 다니면서 서로 다투고 경계하다가 이윽고 합심하여 땅을 두동강을 낸다. 한스러운 장면이다. ⓒ 김은희

 
이윽고 민중들의 군무가 시작되고 그들은 아무 잘못한 것도 없이 이유도 모른 채 갈라져 있다가 전쟁을 맞고 서로 죽고 죽이기 시작한다. 고통도 슬픔도 그리고 분노도 모두 민중의 몫이다. 그 억울한 감정들이 무용수들의 춤사위에 녹아있다. 절망과 분노도, 고통과 슬픔도 그리고 가녀린 희망까지도. 현란한 춤사위를 보여주는 무용수들은 모두 젊은 세대들이다.

그들이 저 춤을 추려면 의자에 앉아있는 한 많은 어머니의 슬픔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러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렇듯 슬프고도 분노에 찬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들이 오히려 우리의 희망이 아닐까. 그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군무는 스크린의 역사 흐름 장면과 겹쳐져서 잠시 우리를 들뜨게한다. 그러나 행당동의 어머니는 여전히 수많은 엇갈림 속에서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걷고 또 걷지만 여전히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이산가족 그들의 절박한 몸짓과 온갖 노력에도 끝내 가족은 만나지 못한다. 무대에서 그들의 몸짓은 차라리 처절하다. 가까이 스치기도 할 때는 혹시 만날 수 있지 않나 하고 마음을 졸이지만 결국 온 힘을 다해 뛰어 다니다가 주저앉고 만다. 슬픔은 온전히 그들만의 몫이다.

▲ 이산가족 그들의 절박한 몸짓과 온갖 노력에도 끝내 가족은 만나지 못한다. 무대에서 그들의 몸짓은 차라리 처절하다. 가까이 스치기도 할 때는 혹시 만날 수 있지 않나 하고 마음을 졸이지만 결국 온 힘을 다해 뛰어 다니다가 주저앉고 만다. 슬픔은 온전히 그들만의 몫이다. ⓒ 김은희

 
분단은 남북의 땅만 자른 것이 아니다. 그 통한에 대한 세대 간의 단절 역시 허리가 잘린 땅만큼이나 아프다. <행당동 115번지>에서 본 춤꾼들은 모두 분단의 통한이나 통일에 대한 갈증이 없는 세대들이다. 그들의 현란한 몸짓을 보면서, 과연 백발의 가슴에 뿌리 박힌 어머니의 한을 이해는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한을 춤으로 풀어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저 어려운 춤동작을 보여주는 무용수들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가장 큰 수단인 언어 없이 그녀의 한을 공유하기란 이 땅의 분단만큼이나 쉽지 않다. 이 땅에서 무용극이라는 무대를 관객들이 공감하게 만들기란 영화같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분단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그것도 관객과의 소통이 쉽지 않은 무용극으로 무리 없이 풀어낸 연출가의 탁월한 역량이 놀랍다. 무용수들의 현란한 몸짓도 연출가의 욕심에는 턱없이 모자랐을 것이었다.

이 땅에서 아직은 낯선 무용극 <행당동 115번지>는 지난 7월 30일 서울 오류동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길게 남은 여운과 함께 그 작품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명료하다. 허리가 잘린 남북의 땅만이 아니라 그 통한의 땅보다 더욱더 단단히 잘린 채로 굳어져 가는 세대 간의 단절을 넘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이다.

누군가는 이 힘든 작업을 계속해야 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매달려야 한다. 춤은 젊은이들의 선호도가 높은 장르이다. 비보이의 춤이든, 랩을 부르며 흔드는 춤이든, 비티에스의 춤이든, 춤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같이 흔들게 하며 세대를 넘나들 수 있게 하는 소통의 도구이다.
 
절규 통일에 대한 염원일까 아니면 분단에 대한 절망일까. 고통이든 절망이든 모든 아픔은 오롯이 민중들만의 몫이 되었다.

▲ 절규 통일에 대한 염원일까 아니면 분단에 대한 절망일까. 고통이든 절망이든 모든 아픔은 오롯이 민중들만의 몫이 되었다. ⓒ 김은희

 
그 도구를 이용하여, 분단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통일에 대해 시큰둥한 세대를 공감대로 인도해야 한다. 우리의 슬픔이 너희의 슬픔이며 우리의 통일에 대한 희망이 너희의 희망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고 모두 같이 하나 된 땅에서, <행당동 115번지>에서 행복한 춤을 추어야 한다. 끝으로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은 내용으로 연출한 김은희 총감독과, 현란한 춤사위로 관객들의 넋을 빼앗게 한 윤혜정 안무 감독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낸다.
무용극 행당동115번지 AOK 통일 분단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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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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